DJ 공보·수행비서 지낸 유훈근, 소설 ‘크리스티나’ 출간

  • 문화일보
  • 입력 2023-05-1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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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서 쓴 글, 잊고 지내다 이삿짐 정리 중 30년 만에 햇빛
"인간은 사랑을 위해 살고, 사랑은 어떠한 대가도 후회도 않는 것"

1980년대 DJ(김대중 전 대통령) 공보비서를 지냈으며 미국으로 정치적 망명 당시 유일하게 수행 비서를 역임한 측근이 책을 출간했다면 흔히 정치적 비화를 담은 ‘회고록’을 연상하기 쉽다. 그러나 회고록이 아닌 레트로 감성의 러브스토리를 냈다면 다소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특히 KBS·MBC 기자와 PD, 앵커를 지내며 국민가수 김상희, 남진, 송대관을 비롯해 유명 가수를 발굴해 키워낸 인물이며 김상희 한국연예인한마음회 이사장 부군이라면 더욱 그렇다. 여든을 훌쩍 넘긴 ‘실버 작가’연호(然湖) 유훈근(柳勳根·82) 전 동해펄프 회장이 주인공이다. 그가 최근 소설 ‘크리스티나’(해바라기뜨락)를 출간해 주목을 받고 있다.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DJ 공보·수행비서 지낸 유훈근 전 동해펄프 회장

이 소설은 저자가 정치계에 몸담았을 때, DJ와 함께 민주화 운동을 벌이다 수차례 고문을 받는 등 고생한 뒤 정치적 사건으로 가벼운 옥고를 치를 때 쓴 킬링타임의 산물이다. 작가는 교도소 독방 속 작은 밥상 위에 몇 자루의 볼펜과 약간의 A4용지를 가지고 24일 만에 이 소설을 썼을 만큼 문학적 감각이 놀라울 정도다. 책을 펴내게 된 배경도 극적이다. 30년 전 쓴 원고 존재를 잊고 지내다 최근 이삿짐을 정리하던 중 우연히 발견해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누구나 가슴 깊은 곳에 무덤까지 가져가고 싶은 과거의 지고지순했던 사랑 하나쯤 있다. 저자는 실패로 끝난 다수의 러브스토리를 소설로 풀어냈다. 저자는 "사랑은 인간에게만 있는 영원한 굴레며 숙제다. 인간은 사랑을 위해 산다. 사랑은 어떠한 보상도 대가도 사과도 후회도 없는 열병과 같은 고통이다. 낭만과 희열은 사랑의 그림자다. 이 그림자를 환한 세상으로 끌어내는 작업은 모든 창작의 영원한 운명, ‘시지프스의 운명’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작게나마 크리스티나는 하늘의 별같이 셈을 헤아릴 수 없는 넓은 곳에 점을 하나 찍었다"고 덧붙였다.

유 작가는 "문학은 순수하고 이상적이어야 한다. 꿈과 동화가 깃들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항시 처량하고 찌그러지고 반사회적 좌절과 퇴폐로 내일이 없는 군상들만을 그리려 하는 불쌍한 경향이 나는 싫다. 숱한 작가 중 내가 좋아하고 고마워하는 작가가 있다면 이병주 선생 정도다"라며 문학에 대한 소신과 강한 자신감도 내비쳤다.

그는 언제나 창작을 한다면 ‘위대한 개츠비’와 같은 작품을 쓰겠다는 마음을 간직하곤 했다고 한다. 어느 사회나 ‘위대한 개츠비’는 있고, 어떤 의미에서는 필요한 존재다. 그는 특히 "소설은 어디까지나 픽션(fiction)이지만 현실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며 "하지만 ‘픽션’을 ‘팩트(fact)’처럼 쓴다면 웃음을 잃은 사람처럼 된다"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소설은 재미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확고한 신념이다.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소설 ‘크리스티나’표지

유 작가는 젊은이들처럼 워드 프로세싱을 쉽게 다룬다면, 죽기 전, 아니 죽을 때까지 재미있고 사랑스러운 창작물을 남기고 싶은 욕심이 있다며 나름 실버 작가로서의 의욕을 드러낸다.

저자는 "양주동 선생은 책은 삼상(三上)에서 읽는다고 했다. 삼상이란 측상(화장실), 침상(寢上), 마상(馬上)을 말한다"라고 했다. 그는 화장실에서 용변 중 읽고, 잠자기 전 침대 위에서 읽고, 자동차·전철·버스에서 이동 중이나 여행 중 읽는 흥미진진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잔잔한 여운이 남는 그러한 문학작품을 창작하고자 하는 열망이 강하다.

사실 그 역시 킬링타임용으로 책을 읽는다. 시간을 버리기 위해 지루하고, 답답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하염없고 그럴 때 책을 읽는다고 한다. 평상시 유 작가가 읽는 책은 어려운 책하곤 거리가 있고 소설류를 즐겨 읽는데 소설은 모름지기 서스펜스에 쫓겨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크리스티나’는 그런 측면에서 안성맞춤이다.

그는 "‘일의 마침은 다른 일의 시작’이라고 했는데 그 끝이 시작이라는 만용을 우리는 흔히 듣고 산다"며 "나는 아니다. 이 나이에 다시는 글을 쓸 수 없을 거다. 그렇다 해도 작가가 아니기에 아쉽지도 않다"고 말한다.

한편, 유 작가는 1940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나 자랐다. 연세대와 미국 N.Y.U에서 국제정치학과 정치광고학을 공부했다. 일찍이 시심(詩心)에 취해 신석정(辛夕汀), 박두진(朴斗鎭)에게 시작(詩作), 시상(詩想)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그 후 ‘아주문예’를 통해 시단에 등단했다. KBS·MBC에서 프로듀서, 기자, 앵커 등으로 활동하며 초창기 TV문화 창달에도 기여했다. 그 후 정계에 부름을 받아 김대중(DJ) 공보·수행 비서를 거치며 조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일조했다. DJ와 함께 미국에서 귀국 후 정치 현실에 크게 실망해 정치와 거리를 두고 한효건설 사장, 동해펄프 회장 등을 역임하는 등 언론인을 거쳐, 정치인, 기업가로도 활약했다. 아르헨티나, 노르웨이, 리비아 등 지구촌 방방곡곡 47개 국가를 공·사적으로 두루 밟았다.

박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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