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압 작전 나섰지만 붙잡힌 고교생 3명 몰래 빼내 살려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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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입력 2023-05-18 11:58
업데이트 2023-05-18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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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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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17일 경기 남양주시 자택에서 김귀삼 씨가 5·18 민주화 운동이 벌어진 1980년 당시 3공수여단 12대대 특공중대 선임하사로 복무했던 사진 등을 보여주며 설명하고 있다. 곽성호 기자




■ 5·18 민주화 운동 당시 계엄군으로 복무했던 김귀삼 씨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 공개증언
당시 피해자들의 회복에도 도움

“두 아들은 데모, 한 아들은 진압”
어머니 “나더러 어쩌란 말이냐”

“계엄군 = 악마 이분법 벗어나
화해와 용서로 고통 해소해야”


남양주=권승현 기자 ktop@munhwa.com

5·18 민주화 운동 당시 계엄군으로 복무했던 김귀삼(69) 씨는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공개적으로 증언하는 데서 나아가 피해자들의 회복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 이제는 미움·증오에서 벗어나 화해·용서로 나아가야 한다는 믿음에서다. 그는 당시 광주 시민 시위 진압에 나섰지만, 처벌을 무릅쓰고 ‘포로’로 잡힌 고등학생 3명을 몰래 빼내 집으로 돌려보내기도 했다. 그의 남동생은 당시 시민군으로 활동했으며, 그때 입은 후유증으로 아직도 고생하고 있다.

17일 경기 남양주시 자택에서 만난 김 씨는 군 복무 시절 사진과 부대 표기, 명찰 등이 담긴 앨범을 꺼내며, 25세였던 당시 3공수여단 12대대 특공중대 선임하사로 복무했던 순간을 더듬었다. 그는 1980년 5월 20일 광주역에서 벌어진 시위 진압에 투입됐으며, 옛 광주교도소 주둔 당시엔 총을 쐈다고 공개 증언한 바 있다. 이때 저항하는 시민들을 상대로 동료들과 진압 작전에도 투입됐다.

광주역 시위 당시, 그는 시민군 포로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꼼꼼히 확인했다고 한다. 광주 서구 치평동이 고향인 김 씨는 자신의 가족들이 시위 현장에 있을까 봐 전전긍긍하던 터였다. 그러다 교련복을 입은 고등학생 3명이 곤봉에 잔뜩 맞아 피투성이가 된 채로 앉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왜 시위하러 나왔느냐”는 김 씨의 물음에 학생들은 “우린 사람이 많길래 구경 온 것뿐”이라며 울먹였다. 김 씨는 막냇동생 생각에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그들을 몰래 데리고 나와 한 명씩 들어서 담벼락 뒤로 넘겨줬다. 김 씨는 그중 한 명인 이모 군에게 “우리 집에 전화해 ‘절대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전해달라”며 자신의 집 번호를 가르쳐주기도 했다.

김 씨는 제대 후 이 군과 재회했다. 이 군은 “생명의 은인”이라며 그에게 자신의 고향인 전남 고흥군 백일도로 초대했고, 섬 주민들은 김 씨에게 “고맙다” “장하다”며 환영했다. 이 군의 아버지는 김 씨에게 큰절을 올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김 씨는 “제대 후 고향인 광주로 돌아가자 ‘광주에 돌아올 면목이 있느냐’며 반역자 취급을 받았는데 이 군 가족들의 따뜻한 말들이 참 고마웠다”며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이라고 말했다.

5·18민주유공자 8차 보상을 앞두고, 김 씨는 이 군이 국가유공자가 될 수 있도록 증언해줄 예정이다. 이 군은 당시 허리 부상으로 43년이 지난 지금까지 병원 통원을 하고 있다. 황일봉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회장은 “(이 군이) 국가유공자가 된다면, 계엄군의 증언을 통해 국가유공자가 되는 첫 번째 사례가 될 것”이라며 기대했다. 김 씨는 ‘계엄군=악마’라는 이분법적 시각 대신 화해와 용서를 위한 복합적인 시각으로 바라봐줄 것을 호소했다. 그 역시 가족(형·남동생)이 5·18 민주화 운동의 피해자다. 5·18 민주화 운동 당시 김 씨가 묵고 있던 숙영지(전남대)에 속옷가지를 챙겨 온 김 씨의 모친은 “두 아들은 데모하고, 한 아들은 그런 사람들 잡으러 가고 나더러 어쩌란 말이냐”며 오열했다고 한다. 그는 “진정한 화해와 용서야말로 양측의 트라우마와 고통을 해소할 수 있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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