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종(末種) 국가[오후여담]

  • 문화일보
  • 입력 2023-09-18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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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훈 논설위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위험한 만남’을 두고 미국 국방부 매슈 밀러 대변인은 지난 13일 “국제적으로 버림받은 국가(pariah nation)에 지원을 구걸(begging)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북한을 따돌림당한 국가, 러시아를 걸인 국가로 규정했다. ‘pariah’의 사전적 뜻은 사회적 존중이나 신뢰를 잃어버린 것을 말한다. ‘파리아 국가’는 국제 외교나 관련 학계에선 자주 사용하는 용어다. 유형은 여러 가지다. ‘정치 체제, 이념, 통치 행태로 인해 외교적으로 고립돼 있고, 도덕적 비난을 받는 국가’ ‘국제 행동 규범을 위반한 국가’ ‘세계 공동체에 심각하게 악영향을 끼친 국가’ ‘외교 수단이 없으면서 핵무기를 획득해 다른 국가에 해악을 줄 상황인 국가’. 이 범주들에 대부분 해당하는 게 북한이다.

국내에선 ‘왕따 국가’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적절해 보이진 않는다. 왕따라는 말은 다수가 특정 소수를 겨냥해 집단 따돌림(bullying)을 하는 행위나 대상을 지칭한다. 국제사회에서 지탄받는 행동을 한 국가나 통치자를 왕따라고 하면, 되레 피해자란 오해를 줄 수 있다. ‘파리아’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에서 가장 낮은 신분인 불가촉천민(untouchables)을 지칭한다. 법적으로 카스트 제도가 사라졌지만, 인도인들은 아직도 파리아를 ‘더는 타락할 수 없고, 더 더러울 수 없는 사람들’로 인식한다. 막스 베버가 중세 시대 천민 출신 유대인의 상업 행태를 비판하는 데 사용한 천민자본주의(pariah capitalism)도 거기서 나왔다. 그때만이 아니다. 몇 년 전 코로나19의 최초 발생지를 놓고 신경전이 벌어졌을 때 영국 보리스 존슨 전 총리는 “중국이 대대적인 개혁이 없다면 국제사회에서 ‘불가촉천민 국가(pariah state)’ 위기에 처할 것”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어원을 따지면 ‘왕따 국가’보다는 ‘천민국’이 낫지 않을까. 김숙 전 유엔대사는 ‘말종(末種) 국가’로 번역한다. 행실이 매우 나쁜 사람을 이르는 말이니 북한의 행태나 상황에 맞는 표현일 듯하다.

북한은 오랫동안 불량국가(rogue nation)로 불렸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한 이후 미국이 새로운 적을 규정한 용어다. 2002년 9·11 사태 직후엔 ‘악의 축(axis of evil)’으로 규정됐다. 이름이 바뀐다고 본질이 바뀌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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