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을 단순 기술로 여기는 한국… 부커상 후보 2편 옮겼지만 무관심”

  • 문화일보
  • 입력 2023-09-19 09:00
  • 업데이트 2023-09-19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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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 15일 서울 구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번역가 안톤 허. 그는 첫 에세이 ‘하지 말라고는 안 했잖아요?’에서 수많은 ‘갑’들을 유쾌하면서도 날카롭게 비판한다. 곽성호 기자



■ 첫 에세이 ‘하지 말라고는 안 했잖아요?’ 펴낸 안톤 허

“무례한 소설가·공기관·출판사
번역가를 ‘대체가능부품’ 여겨”
‘갑질’ 관습에 대해 과감한 비판

“한국 문학계엔 비범한 작가 많아
원작자 따라가려 부단히 애써
번역, 하나의 작품 만든다 생각”


지난해 봄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영국의 부커상 롱리스트에 정보라의 ‘저주토끼’와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이 동시에 올랐을 때, 대부분의 언론은 한국 소설 두 권이 후보에 올랐다는 사실에 환호했다. 두 권 모두 한 사람이 번역했다는 사실이 알려졌지만 특별한 관심은 두지 않았다. 바로 그 번역가 안톤 허(42·본명 허정범)는 그때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 일이 얼마나 맨땅에 헤딩인지를 계속 이야기해야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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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출간된 그의 에세이 ‘하지 말라고는 안 했잖아요?’(어크로스)에서 안톤 허는 번역가의 현실을 이렇게 솔직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가차 없이 이야기한다. ‘하지 말라고는 안 했기에’ 하는, 사실은 ‘하지 말라고 했어도’ 했을 그의 일화들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지난 15일 서울 구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안톤 허는 “광대가 쓴 글처럼 읽어주길 바란다”고 했다. 적절한 비유다. 그의 글은 광대들의 한판 놀음처럼 재미있다가도 그 속에 담긴 비판으로 날카롭다.

안톤 허의 도마 위에 오르는 것은 수많은 ‘갑’이다. 한국인 번역가 지망생을 차별하는 공공기관, 번역가를 “대체 가능한 부품”으로 보는 작가와 출판사, “은퇴하고 번역가나 할까”라고 말하는 교수 등. 그는 무례한 행동을 저지르는 모든 이에게 화살을 날린다.

관련된 이들을 직접 비판한 데 대한 부담은 없었는지 물었다. “단순히 좋은 책만 번역하는 게 아니라 이 업계에서 뭔가를 이루고 싶다면 당연히 잘못된 체제에 대해서 비판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문학 번역가가 되기 전에 성공적인 번역가, 통역사였기에 당장 문학 번역을 그만둬도 전혀 지장이 없으므로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정보라의 ‘저주토끼’와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은 각각 영문판 ‘Cursed Bunny’ ‘Love in the Big City’로 번역돼 출간됐다.



한국 문학 번역가는 우리가 흔히 ‘번역가’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를 뛰어넘는 일을 한다. 한국 출판사를 설득해 작품의 번역권을 따내고, 미국으로 직접 날아가 현지 출판사에 제안서를 내민다. 번역하는 시간보다 메일을 주고받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쓰는 날도 있다. “이 일이 그냥 되는 게 아니에요. 얼마나 맨땅에 헤딩인지를 계속 이야기하고 다니지 않으면 모르시더라고요. 제가 말하지 않으면 다음 세대 번역가들, 저보다 덜 유명한 번역가들은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겠어요.”

그는 한국 문학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평가에도 반기를 들었다. “한국 문학의 위상은 전혀 높아지지 않았어요. K-팝은 한국 문학과 전혀 상관이 없어요. 한국에서도 블랙핑크 노래를 들었다고 황석영 소설을 읽고 싶어 하진 않잖아요. 왜 외국인들은 그럴 거라 생각하나요?”

하지만 책에 날카로운 비판만 가득한 것은 아니다. ‘하지 말라고는 안 했잖아요?’는 안톤 허가 한국 문학에 보내는 러브레터이기도 하다. 그는 한국 문학이 위대한 이유는 한국에 대범하고 비범한 작가가 유독 많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문학에 대한 사랑은 번역가 안톤 허를 지탱하는 원동력이다.

그에게 번역이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번역을 프랑스어 번역가 케이트 브릭스의 표현을 빌려와 ‘에어로빅’이라고 했다. “댄서가 아닌데도 열심히 춤을 추듯, 원작자가 아니지만 열심히 원작자를 따라가려 애쓰며 번역해요. 그렇게 춤추는 즐거움. 나의 글은 투박하지만 원작자의 아름다운 안무가 그 투박함을 통해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이에요.”

책에서 “시는 아직도 내가 뚫어야 할 시장으로 남아 있다”고 했지만 그는 그 시장을 뚫었다. 이성복 시인의 ‘무한화서’를 번역해 미국 시장에 내놓았고 ‘그 여름의 끝’의 번역권도 최근 따냈다. 창작자로 나서 그가 쓴 첫 번째 소설도 내년 7월쯤 영미권의 주요 출판사인 하퍼콜린스에서 나올 예정이다.

에세이에 이어 소설까지, 창작자로서도 활동 범위를 넓혀가는 그가 번역가로만 알려졌을 때 수많은 사람은 ‘스스로의 글로 책을 써볼 생각은 하지 않으시나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이 질문을 그는 상당히 불쾌하게 느꼈다. 이 말의 기저에는 ‘번역은 창작에 미치지 못한다, 예술이라기보다는 기술이다’는 생각이 깔려있다고 생각하기 때문. 이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제가 번역한 작품은 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고. 그리고 그들에게 되묻는다. “스스로의 글로 책을 번역해 볼 생각은 하지 않으시나요?”라고.

박세희 기자 saysay@munhwa.com
박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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