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지만 아름다운 ‘남자 줄리엣’

  • 문화일보
  • 입력 2023-09-20 09:18
  • 업데이트 2023-09-20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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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배효섭(왼쪽) 안무가와 모지민(오른쪽)은 10년 지기 친구다. 이들은 “아름다운 것들은 금세 사라지기 마련이다. 공연 역시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니 집중해 달라”고 당부했다.



■ 무용 ‘로미오와 줄리엣 and more’ 무대에 올린 두 사람

줄리엣 역 모지민
이태원 지하세계서 지상 올라와
발레리노 아닌 발레리나 꿈이뤄
숨은 성소수자들 용기 얻었으면

연출가 배효섭
로미오 역할 제안받았으나 고사
모지민에 걸맞은 상대역 찾으려
미국·독일 발레리노까지 샅샅이 접촉


“이태원 지하세계에서 지상으로 올라와 아름답게 춤을 출 수 있게 돼 감동적이죠. 이번 무대에서 드디어 발레리나의 꿈을 이룰 겁니다.”(모지민, 줄리엣 역)

“모지민 씨가 처음 저에게 ‘로미오’ 역을 제안했으나 거절했어요. 모지민의 줄리엣을 소화할 수 있는 로미오를 구하기 위해 국립발레단 수석 무용수부터 미국, 독일, 폴란드 발레리노까지 콘택트했죠.”(배효섭, 연출·안무)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새로운’ 무용으로 재탄생해 20일 LG아트센터 무대에 오른다. 특별한 점은 줄리엣을 남성이 연기한다는 것. 지난해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모어’로 유명한 드래그 아티스트(성별·성정체성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을 꾸미고 표현하는 퍼포머) 모지민이 그 주인공이다. 공연 ‘로미오와 줄리엣 and more’는 10년 지기인 모지민과 배효섭 안무가가 공동으로 연출과 안무를 담당한 무용 작품이다. 희곡의 기본적인 스토리라인을 따르지만 정형화된 동작이나 구체적인 대사 없이 독창적인 안무와 소품 활용으로 공연이 진행된다. 개막을 앞두고 준비가 한창인 이들을 지난 18일 LG아트센터에서 만났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발레를 전공한 모지민은 이번 무대에서 ‘발레리나의 꿈’을 이루고 싶다고 한다. 그는 8월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한 낭독극 ‘왜 내가 너의 친구라고 말하지 않는 것인가’를 비롯해 연극, 뮤지컬, 지하클럽 등 다양한 무대에서 발레를 선보였다. 하지만 작품의 일부로 무용을 한 것이고 온전한 발레 무대에 오르지 못한 것이 큰 아쉬움이었다. 모지민은 “이번에 100퍼센트 무용수로서 무대에 오른다. 내 평생의 꿈이었다”며 “나는 생물학적 남성으로 태어났고 정체성은 트랜스젠더다. 발레리노가 아닌 ‘발레리나’라는 염원을 드디어 이루게 된 것”이라며 감격스러워했다.

그의 꿈을 이루기 위해선 완벽한 로미오를 찾아야 했다. 모지민이 로미오로 낙점한 인물은 10년 지기 친구인 배 안무가. ‘모지민의 언어’를 완벽히 이해하고 있는 그에게 연출과 로미오 역을 제안했으나 배 안무가가 고사했다. 배 안무가는 “안무와 연출은 이전에도 동시에 맡은 적이 많았다. 하지만 무용수와 연출 역할을 동시에 하기엔 내 역량이 부족하다고 느껴 거절했다”며 “처음엔 정통 발레리노를 로미오 역할로 캐스팅하려고 했다. 하지만 기성 무용을 하는 사람이 ‘모지민’이라는 인물이 걸어온 인생, 삶의 태도 등을 이해하기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현대 무용수를 섭외했다”고 설명했다. 로미오 역할은 배 안무가의 페르소나인 이현석 무용수가 맡는다.

이들은 “이번 작품을 통해 모지민과 같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고 입을 모았다. 모지민은 ‘털 난 물고기’(모어)라는 그의 예명이 알려주듯이 낯설고 이질적인 존재로 살아왔다. 한예종 재학 당시 선배로부터 “여성성을 버려”라는 말을 듣고 폭행을 당했다. 이후 한예종 졸업을 포기하고 이태원 지하클럽에서 20여 년간 공연하며 자신의 ‘여성성’을 버리는 것을 거부했다. 모지민은 “올리비아 핫세나 클레어 데인즈가 연기한 줄리엣을 내가 표현할 순 없다. 내가 보여줄 것은 세상에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이상하고 수상한 줄리엣”이라고 했다. 그는 “지하클럽에서 번듯한 대형 공연장으로 올라와 기쁘다”며 “공연을 보고 성소수자들이 용기를 얻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배 안무가는 “오랜 시간 혼자서 고생하면서 지내온 사람이 ‘세상이 아름답다’고 외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공연은 23일까지 LG아트센터에서.

글·사진=유민우 기자 yoome@munhwa.com
유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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