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시간 유연화, 선택 아닌 필수다[문희수의 시론]

  • 문화일보
  • 입력 2023-11-17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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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희수 논설위원

노동 경직성에 생산성 꼴찌 수준
주 52시간 개편 후퇴 개혁 실기
여론은 제조업·생산직 유연화

AI시대, 새로운 시스템 필요해
2030세대 워라밸 선호에도 부합
일 더 원하면 할 수 있게 길 터야


노동시장 경직성은 고질적인 병폐다. 국가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핵심 원인으로 지목된 지 오래다. 미국의 싱크탱크인 헤리티지재단은 지난 3월 보고서에서 한국 노동시장이 근로시간 경직에다, 해고·채용 등에서 규제가 많다며 거의 낙제점수(100점 만점에 56.2점)로 평가했다.

매년 주요 국가의 경쟁력 순위를 발표하는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의 평가도 다르지 않다. 올 한국의 국가경쟁력 순위는 64개국 중 28위였지만, 노동시장은 한참 밑이다. 기업 효율성(33위)의 세부 평가항목인 노동시장 규제는 39위, 노동생산성은 35위다. 특히, 노동생산성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7개국 중 33위로 사실상 꼴찌라는 게 한국경영자총협회의 분석이다. 윤석열 정부가 노동개혁을 연금·교육과 함께 3대 국정과제로 설정하고, 고용노동부가 주 52시간제를 개편해 근로시간 유연화에 나선 것에 기대가 컸던 이유다.

이런 판에 고용부가 돌연 후퇴해 버렸다. 주 69시간 과로를 조장한다는 프레임을 못 넘고 보완책조차 못 낸 채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발을 뺀 것이다. 노동계가 일체의 개혁에 반발하는 터에 내년 4월 총선까지 경사노위에서 의미 있는 합의안을 도출한다는 것은 희망 고문에 가깝다. 고용부 스스로 내놓은 국민설문조사 결과와도 맞지 않는다.

이 조사에서 연장근로 계산 기준을 현행 주간에서 월·분기·반기·연간으로 확대하자는 설문에 근로자 41.4%, 사업주 38.2%, 국민 46.4%가 동의했다. 특히, 일부 업종·직종에 시행하는 방안에는 근로자 43.0%, 사업주 47.5%, 국민 54.4% 등으로 동의율이 더 높았다. 1순위로는 제조업과 생산직을 꼽았다. 당사자인 노사를 포함한 국민 여론이 최소한 제조업·생산직의 근로시간 유연화를 찬성한 것이다. 그런데도 고용부가 경사노위에 공을 넘긴 것은 개혁을 후퇴시킨 큰 실책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물론 노사 합의가 필요하다. 경사노위도 분명 역할이 있다. 그렇지만 고용부는 지난 3월 개편안이 장기 근로 논란으로 역풍을 맞은 이후 8개월 동안 설문조사를 했을 뿐, 대안은커녕 노동계·야당은 고사하고 국민을 대상으로 오해를 풀고 이해를 구하며 여론을 선도하지도 못했다. 주 69시간 프레임에 갇혀 개혁할 적기를 놓친 셈이다.

근로 유연화는 근로시간 총량 확대가 아니라, 바쁠 때는 일을 더 하되 일이 없을 때 추가로 일한 시간만큼 더 쉬자는 게 핵심이다. 일감이 일시에 몰리거나 처리 기간이 정해져 있는 제조업·건설업, 연구·개발 같은 직종, 바빠도 일손 충원이 힘든 중소기업 등엔 유연화가 더욱 절실하다. 추가 연장 근로에 합당한 보수를 주고, 무리한 연속 근로가 없도록 쉴 시간을 배치하는 등의 보완책은 당연하다. 노사 합의를 통해 월·분기·반기·연간 기준으로 연장 근로와 휴식 시간을 배분해 탄력적으로 운영하는 것은 노사 모두에 도움이 된다. 휴식을 중시하는 2030세대 중심의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 측면에서도 지금보다 더 잘 부합한다.

인공지능(AI) 시대의 근로 방식은 달라져야 한다. 추가 소득을 위해 일을 더 하려는 투잡·스리잡이 보편화하고, 20대 청년과 여성을 중심으로 시간제 일자리 취업자도 증가하는 등 일자리에 대한 수요가 다양해지고 있다. 코로나 때 확산한 재택근무처럼 근무 형태 등의 변화에 대한 대비도 필요하다. 한국의 근로시간 역시 급격히 줄어드는 추세다. 지난해 임금 근로자의 주당 근로시간은 평균 42시간으로, OECD 평균과 불과 1.3시간 차이다. 앞으로 더 좁혀질 것이다. 정치권과 노동계는 근로 유연화가 과로를 초래한다고 공격하지만, 이제 장기 근로로 역주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OECD 꼴찌 수준인 노동생산성을 끌어올리는 게 시급하다. 고용 경직성이 청년 취업난을 부추기는 마당에 바닥권인 노동생산성마저 방치해선 미래가 없다. 근로시간과 근로 형태의 유연화와 다변화는 싫으면 안 해도 되는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 갈 수밖에 없는 필수 코스다. 일자리를 필사적으로 만들었던 독일식 하르츠 개혁은 못할망정 일을 더 원하는 사람은 더 일할 수 있게 길을 터줘야 한다. 새 시대엔 새 시스템이 필요하다. 노동시장 경우엔 더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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