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받는 서민 걷어차는 국회[이관범의 시론]

  • 문화일보
  • 입력 2024-01-29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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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범 산업부장

“코로나19 때보다 더 심각해”
“경영의 神 와도 살리지 못해”
활시위 떠난 중대재해처벌법

대기업 노조 목소리 휘둘리며
총선 표 계산 골몰하는 정치권
1일이 줄폐업 막을 마지막 기회


겨울은 동이 트기 전이 가장 어둡고 춥다. 성장률·수출·소비 등 거시 지표가 조금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만, 경제 실핏줄인 서민경제가 바닥부터 무너져 가는 조짐이 심상치 않다. 폐업 점포에서 쏟아져 나온 냉장고·싱크대 등 중고 기기를 내다 파는 특성상 ‘경기 바로미터’로 불리는 서울 중구 황학동 주방거리. 이곳에서 주방기기 점포를 운영하는 박모(67) 씨는 본보 기자와 만나 “개업을 하는 데가 없어 설비가 잔뜩 쌓여 있다”면서 “지금이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할) 때보다 사정이 더 좋지 않다”고 말했다. 폐업 정리 업체를 운영 중인 그조차 “가게 문을 닫고 싶어도 나가질 않아서 적자를 버티며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버티고 있다”고 털어놨다.

서울 중구 남대문시장에서 장신구 도매상을 운영해온 김모(62) 씨는 “지난 40년간 이곳에서 장사를 해왔지만, 지금처럼 힘든 적은 없었다”고 토로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되면서 물건이 조금씩 팔리는가 싶었는데, 엄청나게 뛴 물가와 금리의 후폭풍으로 소매상의 발길은 끊기다시피 했다고 한다. 디자인해서 공장 여러 군데에 주문을 줘 왔는데, 더는 주문 넣을 물량이 없자, 거래하던 공장 대부분도 문을 닫았는지 연락조차 닿지 않는다고 했다. 마지막까지 함께 일한 직원에게 집이 팔리면 밀린 월급을 주겠다고 각서를 써줘야 했다.

최근 만난 한 상장사 창업주는 “지금 같은 상황에선 경영의 신(神)이 와도 회사를 제대로 운영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지난 정부의 유물인 과도한 기업·노동 규제가 초래한 생산성과 경쟁력 저하 등을 모래주머니처럼 찬 채 고물가와 고금리, 경기 둔화, 지정학적 위기, 공급망 분절 등의 여파와 사투를 벌이고 있다고 했다. 그는 “제조업 영업이익률이 보통 3% 남짓인데, 원자재 가격은 30∼40% 이상 뛰고 연 2% 이던 금리는 5∼6%로 치솟고 러시아에서 오던 주문은 끊겼다”면서 “오죽하면 태영건설의 91세 된 창업주가 눈물로 채무 유예를 호소하겠느냐”라고 말했다. 코로나19 직후에도 흑자를 냈던 그의 회사는 최근 2년간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회는 “중대재해처벌법(중처법)이 1월 27일부터 5∼49인 영세사업장으로 확대 시행되면 줄 폐업 위기에 몰릴 것”이라는 83만7000여 영세 경영인의 목소리를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이대로면 다 죽는다”며 중처법 적용을 마지막으로 1∼2년 더 유예해 달라고 호소를 했지만, 국회는 관련 법 개정안을 지난 25일 국회 본회의에 상정조차 하지 않았다. 본보가 입수한 중소기업 정책 민간 연구기관 파이터치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중처법을 5∼49인 사업장에 확대 적용할 경우 해마다 1만1000개의 일자리가 사라진다. 수치 자체는 상대적으로 크지 않아 보일 수 있겠지만, 영세 근로자의 실직은 생계 자체를 위협받는 것이라는 점에서 경중이 다르다. “처벌을 피하고자 5인 미만으로 인원수를 줄이고 한솥밥을 먹어온 식구 같은 직원을 내보내야 할 판”이라는 현장의 목소리가 나온다.

시행된 지 사흘이 됐지만, 본인이 중처법 적용 대상인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속출하는 등 현장은 대혼돈 상황이다. 본지 기자와 만난 한 식당 주인은 아르바이트생을 여럿 쓰기 때문에 5인 이상 사업장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상용·일용 등 고용 형태와 상관없이 사업장에서 5인 이상이 일하면 중처법 적용 대상이라는 점을 모르는 대답이다. 지난 2년여 동안 이 같은 상황을 내버려 둔 채 뒤늦게 법 개정을 호소하며 뒷북을 치는 정부에도 비판이 쏟아지는 이유다.

여야는 모두 민생을 챙긴다고 외치지만, 4·10 총선을 앞두고 표 계산에만 골몰하고 있다. 야당은 여당이 산업안전보건청 설치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민생을 외면한다고 비판하고, 여당은 야당이 노동계 표를 의식해 무리한 요구를 한다며 책임 공방만 반복하고 있다. 대기업 노조가 주도하는 노동계는 서민경제의 현실과 고통에 눈 감은채 “유예는 안 된다”며 원론적인 목소리만 높이고 있다. 그야말로 바닥 경제는 최악이다. 오는 2월 1일 국회 본회의에서조차 영세 경영인의 목소리를 외면한다면 여야와 노동계 모두 서민경제를 지옥으로 등 떠민 책임을 심판받을 때가 곧 닥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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