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살며 생각하며]

  • 문화일보
  • 입력 2024-02-02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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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미 시네라처문화콘텐츠연구소장, 영화평론가, 前 숙명여대 교수

시한부 인생 그린 영화‘리빙’
죽음 앞두고 일상 되돌아봐
가치 있는 일 하는 거야말로

진정한 삶이라는 것 깨달아
죽음을 이성적으로 사유하면
슬픔 아닌 기쁨의 감정 느껴


톱니바퀴처럼 반복되는 일상이 지겨워 좀 벗어났으면 싶은 때가 가끔 있다. 하지만 정작 병으로 어느 날 갑자기 시한부의 삶이 되어 어쩔 수 없이 삶을 끝내야 한다면 어떤 심경이 될까. 그리스 극작가 에우리피데스는 ‘죽음은 우리가 갚아야 할 빚이다’라고 했다.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와 맞물린다.

개봉작 ‘리빙:어떤 인생’은 암으로 6개월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런던시청 30년 근속 공무원 윌리엄스(빌 나이)가 생의 마지막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한 후, 그동안 행정편의주의로 방치해 왔던 일을 해결하는 모습으로 변화하는 스토리의 영화다. 이 시나리오를 집필한 2017년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는 다섯 살 때부터 영국에 이민 와서 살았다. 어느 날 일본의 거장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우리말로 ‘산다’는 뜻인 1952년 작 영화 ‘이키루’(生きる)를 보고 영국 버전으로 이 영화를 만들기를 오랫동안 꿈꿔 오다가 ‘이키루’의 일본 도쿄(東京) 배경을 영국 런던으로 옮겨 리메이크하게 된 것이다. 이 두 영화는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병에 걸린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통해 그의 삶과 주변인들의 시선을 묘사한 소설이다. 이 소설은 성실한 법원 공무원인 이반 일리치가 사망한 장례식에서 시작한다. 톨스토이는 상당히 냉소적인 시선으로 지인은 물론 가족까지도 주인공의 장례식에 얼마나 형식적으로만 참여하는지를 강조한다. 진실로 슬퍼하는 사람은 없고 각자 자신들의 이득이나 흥미에만 관심 가지는 사람들의 이기심을 드러낸다. 장례식 뒤에 전개되는 그의 삶은 판사로서 겉으로는 성공한 인생으로 보이지만, 일상에 매몰된 그의 삶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드러난다. 죽게 되는 과정을 이처럼 냉정하면서도 치밀하고 리얼하게 그린 톨스토이의 문학성이 돋보인다.

죽음을 통해 삶의 일상을 비판적으로 되돌아보며 인간 존재의 허무감이나 주변인들의 이기심을 드러내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과는 달리 ‘이키루’와 리메이크작 ‘리빙:어떤 인생’은 시한부 선고가 그동안의 매너리즘에 빠진 일상을 되돌아보고 삶의 진정한 가치를 실천하게 되는 과정을 그린다. 이 두 영화는 배경만 다를 뿐 스토리라인은 거의 비슷하다. 아내를 잃고 아들 하나만 보고 살아왔던 주인공이지만, 함께 사는 아들과 며느리는 아버지의 존재를 무시하기 일쑤고 아버지의 집을 떠나 둘이서만 살기 바란다. 시청 관료인 주인공이 시한부의 삶을 선고받고 잠시 방황하며, 평생 결근 한 번 없었던 직장을 무단결근하며 쾌락에 의존하지만, 허무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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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퇴직한 예전 여직원을 우연히 만나자 그에게 며칠만 만나 달라고 부탁한다. 젊고 발랄한 그를 만나 최고의 호텔에서 먹고, 어린아이처럼 즐겁게 지내면서 자신에 대해 되돌아보게 된다. 그 여직원에게서 자신의 별명이 ‘이키루’에서는 ‘미라’, ‘리빙:어떤 인생’에서는 ‘좀비’라는 것을 듣게 된다. 아무런 생명력이 없이 죽은 사람처럼 굳어진 삶을 사는 사람으로 타자에게 보였다는 것이다. 그와 며칠 만나면서 지금껏 몰랐던 자신의 일상을 되돌아보게 되고, 오히려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남은 날을 위한 삶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2주간의 결근을 마무리하고 다시 출근한 주인공은 그동안 무관심하게 내버려두었던 서류 더미 속에서 일거리를 찾아낸다. 관료들의 행정편의주의로 인해 다른 부서에 서로 떠넘기기만 했던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공터에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를 만들어 달라는 건의를 다시 살피며 진행해 간다. 여러 부서에 직접 돌아다니며 합의를 끌어내고 결국 최종 결정자의 승인을 받아내기까지의 주인공의 노력은 진정성 그 자체였고, 어렵사리 놀이터를 만들자 주민들의 환호를 받게 된다. 주인공은 눈 내리던 어느 날 그의 노력으로 탄생한 놀이터 그네에서 삶을 마감하는데, 주인공이 그네를 타면서 부르는 노래는 관객의 마음을 적신다.

하지만 그의 장례식 이후 사람들의 태도는 여전히 행정편의주의에 젖어 있을 뿐이며, 그의 업적을 자신들의 업적으로 공치사하기에 바쁘다. ‘리빙:어떤 인생’에서는 신입 공무원 피터 웨이클링을 화자로, 그가 보는 직장 상사 윌리엄스의 삶과 그의 죽음 이후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다. 그의 직장 동료는 윌리엄스의 사후 “그의 모범, 그가 우리 앞에 세운 교훈을 통해 배우겠다고 다짐합시다. 다시는 우리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겠다고 맹세합시다”라면서도 행정편의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태도로 일관한다. 웨이클링은 퇴근길에 윌리엄스의 업적인 놀이터 앞에서 그를 다시 떠올리며 그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본 경찰에게서 그를 칭송하는 말을 듣는다.

‘리빙:어떤 인생’은 멋진 런던의 풍광과 귀를 부드럽게 자극하는 배경음악으로 우리를 삶과 죽음, 그리고 진정한 기쁨과 행복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네덜란드 합리주의 철학자인 스피노자는 기쁨이나 슬픔은 외적 요인이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수동적인 것이라고 보고 슬픔도 무엇이 우리의 실존을 위험하게 만들었는지를 인식하는 순간 완화된다고 보았다. 즉, 죽음이라는 슬픔도 우리가 이성적으로 사유할 때 실존을 위협하는 것이 되지 못하고 다시 기쁨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고 본 것이다. ‘리빙:어떤 인생’은 죽음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이 가치 있는 능동적인 행동으로 이끌어 기쁨이라는 감정적 결과를 얻는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황영미 시네라처문화콘텐츠연구소장, 영화평론가, 前 숙명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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