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는 않고 ‘명화집’ 수집”… 소년의 취미, 역사가 됐다

  • 문화일보
  • 입력 2024-02-27 09:30
  • 업데이트 2024-02-27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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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김달진 관장이 자신의 삶을 조명한 ‘김달진, 한국 미술 아키비스트’를 들고 활짝 웃고 있다. 그의 뒤에는 평생 모은 보물인 한국 미술가들의 자료가 빼곡히 꽂혀 있다. 김 관장은 “이 자료들을 디지털로 아카이브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제공



■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김달진 관장

학창시절 헌책방 다니며, 막노동하면서도 자료 수집
일당 4500원 받으며 국립현대미술관 임시직도
전문가들도 찾는 ‘국내 1호 미술 아키비스트’로
내년이면 일흔… 목 수술까지 받았지만 “아직도 수집”


“미술계 정보를 상시로 탐색한다. 작가 및 유족의 기증, 방문수집, 전시회 자료, 미술품 유통경로 등 미술 자료 및 정보를 수집한다. 기록의 진본성과 맥락을 유지하기 위해 기록생산정보 및 기록 사이의 관계를 기록한다….”

한국고용정보원의 한국직업사전엔 ‘미술 아키비스트’란 직무가 등재돼 있다. 아키비스트(archivist), 보존 가치를 지닌 기록을 다루는 이 일은 ‘기록 보관 담당자’로 흔히 이해되지만 앞에 ‘미술’이 붙으면 격(格)이 달라진다. 미술 아키비스트는 평생을 바쳐 기록을 모으고 분류하고, 의미를 부여해 한국미술에 서사를 부여한 한 사람의 삶을 담아낸 직업이란 점에서다. 한국 미술계에서 ‘걸어 다니는 미술사전’, 기록하는 사람이란 뜻의 ‘호모 아키비스트’란 이명이 따라다니는 김달진(69)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관장 얘기다.

미술계에 발을 딛는 사람이라면, 작가·큐레이터·평론가·기자를 막론하고 가장 먼저 마주치는 인물이 바로 김 관장이다. 새 미술 전시가 열리는 현장에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누구보다 먼저 나타나 관련 자료를 모으고 떠나는 사람이 바로 그다. 이런 일을 무려 60년 가까이 빠짐없이 해왔으니, 미술계에서 김 관장을 모르면 간첩이란 말도 이상하지 않다. 최근 그의 생애를 조명한 ‘김달진, 한국 미술 아키비스트’(빛나래) 책까지 출판된 이유다. 출간을 앞둔 지난 20일 문화일보와 만난 김 관장은 “기록하는 일이 내 인생의 전부이고 역사”라며 “고통스럽고 끝이 보이지 않는 일이지만, 조금씩 인정받는 것 같아 의미가 있다”고 소회를 밝혔다.

고통스럽다는 그의 말대로 미술 아키비스트가 밟아온 길은 손에 잡히지 않는 꿈을 향해 달리다 수없이 넘어지는 일의 연속이었다. 미술 자료를 모은다는 행위 자체가 인정받지 못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우표, 껌·담뱃갑 상표를 모으던 충북 옥천의 시골소년은 집안의 기대를 한몸에 받아 대전을 거쳐 서울로 유학을 왔지만, 청계천 헌책방을 쏘다니며 서양 명화의 화집을 모으는 데 시간을 쏟았다. “소심한 성격에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채워지지 않는 상실감을 수집으로 달랬던 것 같다”는 그는 “성적은 떨어지고 어른들은 ‘맨날 신문 쪼가리만 모아 어떻게 밥 먹고 사냐’고 나무라고, 판·검사가 되길 바라며 뒷바라지해준 형이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좌절도 컸지만 수집을 포기할 순 없었다”고 했다.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198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근무하던 시절 김주경의 ‘북악산을 배경으로 한 풍경’(1927)과 서 있는 김달진 관장, 1970년대 완성한 서양미술전집, 1991년 월계동 집에서 작업하는 김 관장의 모습.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제공



1972년 경복궁에서 국립현대미술관이 연 ‘한국 근대미술 60년 전(展)’은 수집 인생의 ‘터닝 포인트’다. “한국에도 이런 작가들이 있었구나 싶었다”던 그는 “이중섭, 박수근 같은 작가에 대한 자료는 있지만 어떤 작가는 대단한 화업에도 남겨진 자료가 없더라. 그래서 내가 직접 한국 근현대 작가들의 데이터를 수집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고 했다. 이때부터 종이신문과 잡지, 전시회 팸플릿을 모아 만든 스크랩북을 당시 홍익대 박물관장이었던 이경성 교수에게 보여줬고, 이를 눈여겨봤던 이 교수는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으로 취임하며 김 관장을 불러 미술관에서 자료를 모으는 일을 시킨다. 비록 일당 4500원의 임시직으로 먹고살려면 ‘투 잡’을 뛰어야 했지만, “평생 미술자료 모으는 일을 업으로 삼아 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그에겐 일생일대의 자랑이자 성취였다고 한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보낸 14년은 행복한 기억뿐이다. 그는 “금요일엔 출근하자마자 쇼핑백을 들고 나가 미술관, 화랑 전시회 팸플릿을 싹 다 모아 ‘금요일의 인사동 사나이’란 별명이 붙었다”면서도 “1992년엔 문화부 장관 모범 공무원 표창도 받았지만 별정직 계약이 끝났을 때 그만두거나 기능직으로 강등해 일하란 말을 들었다. 훗날 사표를 쓰게 된 이유”라고 말했다. 생계 문제도 있었지만, 미술 자료를 모으는 자신의 일의 가치를 낮추는 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관람객은 속고 있다’는 글로 정확한 자료 보존의 힘을 주장하며 미술계 안팎에서 주목받기도 했지만, 여전히 세상은 아키비스트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김 관장은 결국 가나아트를 거쳐 2001년 자신이 직접 미술자료박물관을 만들었다. 셋방살이 하며 모아놓은 자료를 둘 곳도 없어 전전긍긍하면서도 2008년 서울시 2종 박물관으로 등록하다 2014년 상명대 앞에 건물을 마련했다. 지금 이곳은 국내외 미술 연구자들이 한국 미술을 알기 위해 반드시 순례해야 하는 성지가 됐다. 이를 두고 미술평론가인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한 인간이 의지와 집념으로 문화 창조의 길을 개척한 ‘인간 만세’ 이야기”라고 평가한다.

김 관장은 “매일같이 무거운 자료가 담긴 가방을 메고 다니느라 양팔이 고장 나고 목 수술까지 받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수집하러 나간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 미술의 역사를 만든 데엔 이중섭이나 천경자만 있던 게 아니라 시골 작가도 있었다”면서 “이 모든 걸 아카이브해야 한국미술이 더 풍부하고 세계로 뻗어 나갈 원동력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유승목 기자 mok@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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