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세계는 복합 위기(polycrisis)의 한복판에 있다. 혼합형 갈등 양상으로 구조화된 미·중 전략 경쟁이 계속되고, 세계는 코로나19 팬데믹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분쟁도 실마리를 못 찾고 있으며, 각국의 선거전은 국가의 사활적 이익(vital interests)을 내세운 민족주의 색채가 짙다.
북한은 지난해 말 제8기 제9차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한민족 개념 거부와 남북통일론 파기를 통해 대남·통일정책의 근본 방향 전환을 선언했다. 남한 체제를 미국의 식민지로 규정했고, 남북관계를 전쟁 중의 교전국 관계로 단정했다. 동시에 핵무력으로 남한 영토를 평정하는 무력통일론 제시하며 체제 경쟁에 불을 붙이는 양상이다.
이 절박한 안보 문제가 한국적 정치 현실에서 포퓰리즘으로 이용되고 있다. 중국에 대들지 말아야 하며 대만 문제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면서 ‘셰셰(謝謝·감사하다)’라는 말로 넘어가자는 발언은 극단의 현실 무시다. 현 정부의 정책 변화가 양국 갈등을 초래했다는 중국은 연일 매체를 통한 대서특필로 한국에 책임을 돌리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SK하이닉스에 대한 경고까지 들으면서 한국 여론을 움직이려는 우회적 선거 개입까지 자초한 셈이다.
그러나 한·중 관계는 엄밀히 말해 1992년 수교 당시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출발했다. 난제인 북한 요인에 대한 언급은 구동존이(求同存異)라는 미명(美名)으로 배제됐고, 상호 보완적 경제 관계의 확대는 양자 교류에 착시현상을 초래했다. 중국의 발전은 한국의 중간재 수입국으로서의 경제 관계를 변화시키고 있고, ‘핵보유국’ 북한이 탄생했다. 한·중 갈등의 골은 갑자기 생긴 게 아니라, 이러한 선천적인 구조적 문제에 그 본질이 있다는 뜻이다.
호혜적 한·중 관계의 추구를 강조하는 현 정부는 북핵 문제와 경제에 있어 지나친 중국 의존을 지양하고, 북한 문제를 기준으로 국제관계를 판단하던 틀에서 벗어나는 ‘외교의 정상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중국은 이를 한국의 대미 경사(傾斜)로, 한·중·일 3각 협력 확대를 아시아판 ‘작은 나토(NATO)’로 인식한다. 한·중 관계 교착에 대한 우려는 이해하지만, 양안(중국·대만) 문제마저 우리와 무관한 일이라는 희화적 언급은 안보 의식의 폄훼다.
특히, 양안 관계는 우리 안보와 직결된다. 대만해협은 한국 물동량의 45%, 중동 원유 수입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주요 수송로(SLOC)다. 미국 에너지경제 재무연구소(IEEFA)의 한 보고서가 한국 에너지 안보의 취약성을 경고한 것도 이 때문이다. 또, 대만 분쟁은 지역 분쟁을 넘어 다양한 충돌을 야기할 수 있으며, 계속 우리 안보를 위협한다. 대만 유사시 미·일이 개입할 수 있고, 남·동중국해로의 충돌 확대와 한반도에서 북한의 오판까지 우려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한국이 주장하는 ‘양안 관계의 평화 유지’는 내정간섭이 아니라, ‘일방의 일방적인 현상 변경에 대한 반대’라는 국제주의 원칙의 한 표현이다. 특정 국가의 편에 서서 특정 상대를 자극하는 게 결코 아니다. 한국이 자유·민주·시장경제를 신봉하는 국가로 글로벌 중추국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지당하다. 적어도 본질이 호도되면 안 된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강준영 한국외국어대 교수·중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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