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은 미국 동북부에서 30년 만에 가장 추웠다. 그렇다고 매년 하던 일을 미룰 수는 없었다. 집 앞 작은 정원의 장미 나무를 가꾸는 일이다. 추운 날씨에 하기가 힘들기도 하고, 늦가을에 미리 해둬도 좋지만 장미 나무가 추위를 이겨내기를 기다렸다가 봄이 오기 직전에 하는 것이 오래된 습관이다. 계절과 관계없이 정원을 가꿀 때마다 할아버지가 떠오른다. 정원 가꾸기에 대해 내가 아는 거의 모든 것은 할아버지에게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니 꽃이며 나무를 가꾸거나 낙엽을 치울 때마다 할아버지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영어에서는 할
문화일보 2025-04-11 11:47
강철수 만화가, 방송작가 결혼 축의금 강요하지 않지만 혼주에게는 많을수록 좋은 것 수십 년간 쌓아온 인간관계 돈으론 절대 환산할 수 없어 봉투가 얇든 두툼하든 간에 애틋한 마음을 담아 건네야 결혼식장의 꽃이 신랑 신부면, 조연급 스타는 주례 선생님이다. 연세 지긋하고 풍채가 좋은가, 콧수염이 있나 없나, 말씀이 너무 길지 않나 차이가 있을 뿐 주례사는 세계 어디를 가도 대동소이 거의 판박이다. “함께 역경을 이겨내고 검은 머리 백발이 되도록 행복해라.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부부가 되어라.” 그런데 미국 주례만 딱 한 대목 다르다. ‘
문화일보 2025-04-04 12:05
이근미 소설가 대학 동기들은 뛰어난 문재들 천재 집단에 잘못 끼었다 좌절 베스트셀러 작품 난도질했지만 최고 소설가들 삶 얘기에 감동 영혼 담아 필생의 작품 빚어낸 구도자들 인생에 경외와 존경심 인생을 한 줄, 또는 한 단어로 요약하라면 ‘비교’를 빼놓기 힘들 것이다. 남들에게 비교당하기도, 스스로 비교하기도 하면서 살아가기 마련이다. 가장 가까운 비교 대상은 형제들이 아닐까. 나는 자라면서 두 명의 남동생과 외모 비교를 많이 당했다. 어찌 된 셈인지 두 녀석이 지나치게 ‘예뻐서’ 수난 아닌 수난을 감내해야 했다. 여드름 폭탄까지 맞아 잔뜩 위축되었던 20대 때, 남동생과 내가 남매라는 사실을 안 교회 오빠로부터 “친동생 맞아?”라는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그런 말에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던 나는 동생들로 인해 ‘외모로 승부하긴 힘들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자각했다. 어릴 때의 기개가 다 사라진 20대 끝단, 뭇별 같은 작가를 배출한 데다 국어 교과서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강의하는 학과에 발을 들이밀었다. 위대한 선배들의 전설이 떠다니는 학교에 함께 입성한 동기들은 대개 고교 문예 공모에서 상을 받은 문
문화일보 2025-03-28 11:43
최인아 최인아책방 대표, 前 제일기획 부사장 한 분야 정통한 사람 일컬어 오로지‘專’써서 전문가 지칭 하지만 하나만 꿰뚫어선 안돼 모든 대상에 ‘사람’이 있어야 전문성 갖추되 사람을 향하는 ‘스페셜 제너럴리스트’가 돼야 전문가. 사전에서 이 말을 찾아보면 어떤 분야를 연구하거나 그 일에 종사하여 그 분야에 상당한 지식과 경험을 가진 사람이라고 나와 있다. 한자로 전문가는 ‘專門家’로 쓴다. 나는 ‘오로지 전’ 자(字)를 주목한다. 내친김에 ‘전(專)’ 자가 들어간 다른 말도 찾아본다. 전업(專業). 전문으로 하는 직업이나 사업이라는 뜻이며, 한
문화일보 2025-03-21 11:38
로버트 파우저 언어학자, 前 서울대 교수 ‘나만 옳고 넌 틀리다’ 이분법 갈등·대립 만들어내는 원천 한·미 등 정치적 상황서 폭발 한번 사로잡히면 못 빠져나와 빨강·파랑 뒤섞이면서 소통 보라색 세상이야말로 인간적 미국 로드아일랜드주 프로비던스의 지난 1월은 30년 만에 가장 추운 날씨를 기록했다. 사방이 눈으로 덮인 겨울을 보냈다. 그렇게 추운 어느 겨울밤, 몇십 년 만에 영화 ‘매트릭스’를 다시 봤다. 1999년에 개봉 당시 큰 화제가 되었고, 2003년에 이어 2021년까지 속편이 나왔다. 인공지능(AI)이 세상을 지배하게 된다면 인간은 일종
문화일보 2025-03-14 11:33
강철수 만화가, 방송작가 36년 전 여행 자유화 시행되자 해외 나가 웃지 못할 촌극 봇물 요즘 젊은이들은 관광지 대신 맛집 찾고 호젓한 해변서 힐링 명승지에 버젓이 낙서행위 등 여전히 철부지 여행객들 ‘눈살’ 여행은 혼자보다 둘이 좋다. 심심하지 않고, 비싼 음료수 한 잔을 둘이 마시면 경비도 절약된다. 곤경에 처할 때 서로 의지가 되고, 한 사람이 영어, 한 사람이 프랑스어가 되면 그야말로 천하무적 환상의 조합이다. 얼핏 들으면 그럴듯하지만 반대 의견도 많다. 여행을 왜 둘이 가나, 혼자 떠나라! 둘이 가면 싸운다. 정말 둘이 가면 싸울까
문화일보 2025-03-07 11:40
이근미 소설가 지인 사이에 일어난 돈거래 잊을 만하면 사고로 이어져 “믿을 만한 사람인 줄 알았다” 빌려준 쪽만 속앓이할 뿐 결국 소문은 널리 퍼지는 법 ‘친구의 선의’ 저버리지 않길 어릴 때 동네를 발칵 뒤집은 사건이라면 단연 ‘계 오야(契主·계주) 아줌마’의 야반도주였다. 일자리가 많은 공업도시여서 엄마들도 일찌감치 생활 전선에 나섰던지라 규모가 꽤 큰 계들이 성행했다. 조용할 리 있겠는가. 잊을 만하면 돈 들고 튄 계주들 얘기로 동네가 콩 볶듯 시끄러웠다. 계주였던 친구 엄마가 밤중에 도망을 가 버렸고, 연일 동네 사람들이 몰려들어
문화일보 2025-02-28 11:48
최인아 최인아책방 대표, 前 제일기획 부사장 요즈음 책 펴내는 사람 많아 듣기보다 말하는 경향 짙어져 미술관 경비원 변신한 브링리 침잠의 시간으로 兄 사별 치유 수많은 사람과 얽혀 있는 세상 바쁠수록 의식적인 사색 필요 큰 조직에서 일할 때는 사람들과의 소통이 절반 이상이라 온종일 말들을 쏟아내고 나면 기진맥진했다. 인풋은 없이 아웃풋만 있으니 기운 빠지고 지친다는 생각을 종종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조직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지금도 충전보다 꺼내 쓰는 게 더 많은 건 별반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생각한다. 말이 너무 많다고. 말을 줄여야
문화일보 2025-02-21 11:50
로버트 파우저 언어학자, 前 서울대 교수 눈 대신 치워준 고마운 이웃들 요즘 보기 힘든 ‘아날로그 풍경’ 얼굴 보며 대화하는 사람 수 줄어 아주 친한 사람 외엔 교류 단절 가벼운 인사·잡담 나눌 수 있는 이웃과의 ‘적당한 소통’ 그리워 지난 1월 하순, 내가 사는 미국 프로비던스에 연일 강한 한파가 찾아왔다. 눈도 꽤 많이 내렸다. 며칠 전부터 허리가 아파서 눈 치울 일이 걱정되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나갔다. 마침 길가에 나와 있던 옆집 아주머니와 인사를 나눴다. 허리 때문에 눈을 다 못 치울 수도 있겠다고 양해를 구하자 그는 삽
문화일보 2025-02-14 11:46
강철수 만화가, 방송작가 가난한 시절엔 ‘밥’ 대접받아 지금은 다양한 음식 탓에 홀대 ‘고깃집 도장깨기’하던 청년 절밥 먹은 뒤 음식철학 변해 돈만 깨지는 食 습관 버리고 ‘K-밥집’으로 새 문화에 도전 ‘식사하셨습니까?’ 가난했던 시절 우리네 인사말이다. 선진국이 된 지금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밥은 먹고 다니냐?’ ‘밥심이 최고.’ ‘밥 먹고 합시다!’ 친구와 헤어질 때 아이들은 ‘안녕∼’, 어른들은 ‘언제 밥 한번 먹자’고 한다. 하루 세 번 먹는 밥이 그리 중한가. 그런데 이상하다. 밥을 먹자고 거리로
문화일보 2025-02-07 11:31
이근미 소설가 오랜만에 참석한 출판 시상식 나이도 분위기도 너무 달라져 예전엔 질펀·끈끈함이었는데 이제는 화려한 상큼 모드 물씬 내년엔 ‘못 오겠다’ 생각하다가 ‘와서 자극받겠다’로 마음 돌려 코로나19로 인해 멈췄던 정기 행사들이 2023년부터 대부분 재개되었다. 어느새 모임에 나가지 않는 게 습관이 되어 꼭 필요할 때 외에는 칩거하는 중이다. 요즘처럼 생각이 첨예하게 갈릴 때는 가급적 거리를 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도 한몫했다. 그러던 중 지난해 말, 한 출판사의 시상식에 가게 되었다. 내 소설을 낸 출판사인 데다 담당자와 개인적인 친분이
문화일보 2025-01-31 11:44
최인아 최인아책방 대표, 前 제일기획 부사장 어지러운 시절엔 공부와 독서 책과 함께하며 통찰력 길러야 가짜 뉴스 판치는 위험한 세상 우리 사회는 갈수록 이성 잃어 단박에 휩쓸려 믿어버리지 말고 천천히 깊이 생각하는 훈련 필요 해마다 연말 연초는 정부든 기업이든 개인이든 한 해를 정리하고 새해를 어떻게 꾸릴지 골몰한다. 하지만 지난해 12월 이후론 계엄 이야기가 온통 우리의 눈과 귀를 점령한 탓에 생각을 하나로 모으기가 힘들다. 우리는 개별자이기도 하지만 사회적 존재이기도 하므로 개인의 운명도 사회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무겁게 가라
문화일보 2025-01-24 1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