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르고 벼르다가 드디어 봄맞이 대청소를 한다. 집안을 정리하는 것, 특히 버릴 것을 골라내는 과정은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이걸 버려야 하나 그대로 두어도 되지 않으려나, 아까운데, 언젠가 쓸모 있을 건데 등등 내적 갈등이 만만찮다. 특히 욕실까지 모든 벽이 페인트칠로 되어 있는 데다가 유리 창문 안에 창호지 창문이 하나 더 달린 이 집은 정말 불편하다. 설계하신 건축가 선생님의 트레이드마크인 이 창호지 창문은 조금만 건드려도 그대로 구멍이 나서 금세 여기저기 너저분하게 되어 버린다. 언젠가 그 건축가 선생님을 모임에서 만나게 되었다
문화일보 2026-04-17 11:29
나는 강의할 때, 베토벤을 단지 한 명의 음악가로 소개하지 않는다. 그는 위대한 작곡가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자 시대의 목소리였다. 그의 음악은 개인의 감정과 고통 및 한 시대의 이상이 만나 만들어진 결과였다. 그러니 그의 작품을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히 악보를 읽는 일이 아니라, 한 인간의 삶과 그가 지나온 시간을 함께 들여다보는 일과도 같다. 베토벤의 삶을 들여다보면 음악은 절대 추상적인 예술이 아니다. 그것은 한 인간이 살아낸 시간의 기록이며, 그 속에서 겪은 고통과 선택의 결과다. 불우한 환경, 청력 상실, 그리고 끝내 피할 수
문화일보 2026-04-10 11:20
지난 3월 중순, 새 책 ‘문자 전파담’ 집필을 마무리하고 오랜만에 짧은 여행에 나섰다. 미국 북동부 로드아일랜드의 겨울은 매우 춥고 눈도 많이 왔다. 그렇다고 장거리 비행은 내키지 않아 초봄의 워싱턴 DC로 향했다. 자주 다녀오긴 했는데, 온전히 여행으로만 간 것은 거의 10년 만이었다. 미국의 행정수도이자 계획도시인 이 워싱턴 DC는 경관이 좋고 녹지가 많아 전원도시 같은 분위기다. 도착한 날은 온도가 갑자기 28도까지 오르고 햇살도 강해서 마치 한여름 같았다. 오랜 시간 산책을 즐겼다. 도시 곳곳에 목련꽃과 수선화가 피기 시작
문화일보 2026-04-03 11:33
지난겨울, 추위에 파카의 모자를 뒤집어쓰고 가는데 자꾸 뒤에서 따라오는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 내가 길을 막고 있나 싶어 돌아보면 아무도 없다. 여러 번 돌아보다가 사실은 지퍼 손잡이가 달그락대는 소리가 막힌 모자로 인해 증폭돼 발소리처럼 들린 것임을 알았다. 동네 작은 공원의 모퉁이를 돌아서는데 멀리 미끄럼틀 위에서 빨간 옷을 입은 젊은 여성과 베이지색 파카에 모자를 쓴 남성이 미끄럼틀 양쪽 지지대에 매달려 논다. 가까이 가서 보니 미끄럼틀 양옆에 아이들이 떨어지지 않게 막아둔 반투명의 볼록 유리와 맞은편 미끄럼틀 계단의 붉은
문화일보 2026-03-27 11:49
봄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 봄이다. 봄의 생동감은 진짜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다섯 살 유치원에 입학하던 때부터 이 나이가 되도록 봄은 늘 내게 새 학년, 새 학기를 가져다준다. 학생 신분으로, 그리고 교수로 남들보다 훨씬 더 많은 새 학기를 맞이한 덕분인지 봄은 새 얼굴, 새 학기, 새로운 연구와 도전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설렘을 선물한다. 어릴 때 새로 산 노란색 봄 운동화와 분홍색 책가방을 머리맡에 두고 자면서 새 학기를 기다렸던 그 아득했던 기억이 봄기운과 함께 늘 밀려온다. 이번 학기에
문화일보 2026-03-20 11:40
우리는 종종 “클래식 강국”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영재 강국”에 더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국제 콩쿠르에서 한국 연주자들의 입상 소식은 끊이지 않는다. 이처럼 꾸준히 성과를 내는 나라도 드물다. 분명 어떤 교육적 토양과 문화적 에너지가 작동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른 질문을 던지고 싶다. 우리는 과연 ‘강국’인가, 아니면 ‘성과에 익숙한 사회’인가. 우리는 왜 이토록 어린 영재의 탄생에 열광하는가. 아마도 그것은 한 개인의 재능에서 국가적 성취를 확인하고 싶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러나
문화일보 2026-03-13 11:29
이번 겨울 로드아일랜드에 10여 년 만에 폭설이 내렸다. 학교는 이틀 동안 휴교를 했다. 제설 작업도 애를 먹었다. 이후 약 일주일 동안은 혹한이었다. 매일 동네를 산책하는 나로서는 답답한 일이었지만, 이렇게 되었으니 미뤄둔 책장 정리를 하기로 했다. 산책처럼 운동이 되는 건 아니지만, 옛 추억을 돌아볼 수 있으니 그 또한 즐거운 일이다. 오래전 읽었거나 앞으로 읽지 않을 것 같은 책을 정리한다는 생각으로 가볍게 시작했다. 웬걸, 그 기준은 이내 무너졌다. 오래된 책 중에 차마 버릴 수 없는 것들이 계속 나왔기 때문이다. 1980년
문화일보 2026-03-06 11:37
전정 박항환 선생께서 내 연구실에 불쑥 들러 들려주신 이야기다. 갓 스무 살 청년 시절 목포 남농(南農) 허건(許楗·1907∼1987) 선생 댁에서 화업(화業)을 익힐 때 일이다. 국전 응모가 있을 무렵이면 가르침을 청하려고 그림을 들고 찾아오는 후학이 많았다. 하루는 스승과 둘이 화실에 앉아 그림 공부를 하는데, 서울서 내려온 40줄의 화가가 먼 길을 찾아왔다. 가져온 그림을 펼치자 화면 가득 청기와 지붕뿐이었다. 손을 대면 까끌까끌한 기와의 거친 질감이 느껴질 만큼 생생했다. 그 대담한 구도와 과감한 붓질을 보자 눈이 번쩍 떠졌
문화일보 2026-02-27 11:29
무언가에 재능이 있는 사람을 만나면 참 부럽다. 대화·노래·요리·운동… 내게 없는 이 숱한 재능들을 갖고 싶어 안달이 난 적도 있다. 내게 없는 능력, 남의 떡이 부러운 건, 내가 가진 재능은 내겐 너무나도 당연해, 그게 뭔지 스스로 자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니 남이 잘하는 건 나와 달라 눈에 금방 들어오고, 그저 부럽고, 때론 박탈감까지 느끼게 된다. 그러다 다짐한다. 저 재능은 저 사람이 타고 태어난 우주의 기운이다, 내게 없는 재능을 좇아 가랑이 찢어지지 말자. 숱하게 마음을 다잡아보지만, 나이가 들어도 쉽게 포기되지 않
문화일보 2026-02-20 11:15
요즘 연주를 들으며 자주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 ‘우리는 언제부터 연주자에게 정통에 충실한 연주보다 색다른 해석을 더 강하게 요구하게 되었을까.’ 이 변화는 갑작스럽거나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사회가 변했고, 예술이 놓인 환경도 달라졌다. 연주자에게는 더 많은 자유가 주어졌고, 곡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 결과 연주자마다 개성이 더욱 뚜렷해졌고, 청중으로서는 연주의 풍경이 훨씬 더 다채로워졌다. 이 변화가 주는 장점은 분명하다. 같은 작품을 들어도 연주자에 따라 전혀 다른 감정을 느낄 수
문화일보 2026-02-13 10:50
지난해 봄 한국에서 한 달 가까이 대림동에 머물렀다. 중국인이 많이 모여 사는 지역으로, 주민 대다수는 한국계 중국인, 이른바 조선족이라 여러 언어 사용 실태를 조사할 수 있겠다 싶어서 이곳을 거주지로 삼았다. 거리에는 중국어 간판이 가득하고, 한국어와 중국어를 포함한 다양한 언어들이 귀에 속속 들어왔다. 식당마다 다양한 문화권의 음식 냄새가 퍼져 나와 이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특히 기억나는 곳은 중국차 전문 카페다. 중국차 종류도 많지만 한국차와 커피도 갖췄고, 과자 종류도 맛이 있었다. 더 좋은 건 분위기다. 주문하고 난
문화일보 2026-02-06 11:08
날마다 초서 연습을 한다. 근래는 당나라 승려 회소(懷素, 725∼785)의 소자(小字) 초서 천자문에 집중해서, 오늘로 열여섯 번째 임서를 마쳤다. 처음엔 ‘자서첩(自敍帖)’이나 ‘성모첩(聖母帖)’ 등 그의 활달한 다른 글씨에 비해 서툴고 버성겨 보이던 천자문의 필획들이 임서한 횟수가 늘어 갈수록 야무지고 단단한 줄을 알겠다. 어깨에 힘을 빼고, 구물구물 흘러갔지만 필획마다 향배가 다르고, 강약과 지속(遲速)의 리듬이 묘하게 살아 있다. 당나라 때 육우(陸羽)의 ‘승려 회소가 안진경과 더불어 초서를 논하다’(釋懷素與顔眞卿論草書)란
문화일보 2026-01-30 11: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