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기획·고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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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과 찌개를 듬뿍 떠먹으며 다짐하듯 말했다… 내일은 세 배로 운동해야지
■ (12) 최진영 식단 - 삶은 계란 그는 서른 살 생일을 맞아 금연을 결심했고 서른세 살 생일인 오늘까지 그 결심을 지키고 있다. 일주일에 딱 두 번, 금요일과 토요일 저녁에만 술을 마시겠다는 다짐 또한 대체로 지켰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때는 -친구나 동료에게 힘든 일이 생겨서 같이 술을 마셔야만 한다거나 지위가 높고 나이가 많은 사람이 권하는 술을 거절할 수 없을 때- 소주 세 잔까지만 마시려고 나름 애를 썼다. 그러니까 그는 적어도 자기가 겪는 스트레스 때문에 술을 마시진 않았다. 오늘 식당 앞에서 만났을 때 그의 몸에서 풍기는 은은한 시트러스 향
박동미 기자 | 2024-05-13 09:03 -
재벌 구해준 썰만 풀어도 먹고살 수 있다니… 참 사랑스러운 나라야
■ (11) 김동식 돈 - 그분의 목숨을 구하다 저번에 과학고 초청 강연에서 말이야. 알고 보니 문학상을 휩쓴 작가랑 나랑 둘 중 누구를 초청할지 학생 투표를 했었는데 내가 압도적으로 이긴 거더라고. 미리 알았으면 내가 양보했을 건데 말이지. 학생들한테 나 따위보다 그 작가가 훨씬 도움 됐을 거 아니야? 난 거기 안 갔어도 어차피 일정이 꽉 차서 시간이 모자랐었거든. 어휴, 사실은 지금도 난 내가 전문 강연자로 살고 있는 게 신기해. 그쪽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배운 것도 없고, 배울 점도 없고, 선한 영향력을 펼치는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말을 웃기게 잘하는 것도 아니고. 객관적으로 절대 전문 강연자가 될 수 없는 거잖아. 그런데도 그 어떤 강연자보다 폭발적인 반응이란 말이지. 특히 청소년들은, 평소 떠들고 딴짓만 하던 녀석들도 내 강연은 열광해서 듣는다니까. 못 믿겠어? 그쪽도 내 이야기를 들으면 하던 일을 멈추고 집중할 수밖에 없다고 무조건 장담하는데? 그 일이 일어난 날은 말이야. 오랜만에 친구 놈들이랑 같이 놀러 가서 진탕 마시고 잠든 새벽이었어. 술을 잔뜩 퍼마신 녀석이 새벽에 나가
신재우 기자 | 2024-04-29 09:02 -
영은은 조금 더 집중했다… 미진이 속삭인 말을 간신히 떠올렸다
■ (10) 강화길 중독 - 화원의 주인 오래전 그날, 미진은 영은의 국사 교과서에 물을 쏟았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 사람을 피하다 균형을 잃었고, 그 바람에 손에 들고 있던 컵이 와락 엎어진 것이었으니까. 다행히도 물은 거의 다 책상에만 쏟아졌다. 교과서에는 대여섯 방울 정도만 튀었다. 설사 교과서가 다 젖었다고 해도 영은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국사 공부에 별 관심이 없었고, 무엇보다 미진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까. 하지만 미진은 영은에게 지나치게 미안해했다. 사과를 연속으로 다섯 번쯤 했고, 영은을 매점으로 데려가 과자
신재우 기자 | 2024-04-22 09:27 -
배송된 택배 상자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누군가 돌려주러 오지 않을까
■ (9) 김혜진 노동 - 사람의 일 주민센터로 들어서자마자 희수는 그곳의 분위기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사람들로 붐비는 민원실은 여느 때와 다름없어 보였지만 뭔가가 그곳의 활기를 억누르고 있는 듯했다. 청원 경찰(얼마 전, 공무원과 민원인 간의 다툼 건으로 새로 배치된 사람이었다)이 한 손을 허리춤에 올린 채 경계하듯 그녀를 훑어보았다. 아니, 그의 시선은 그녀가 아니라 그녀를 뒤따라오는 누군가를 향해 있었다. 그녀는 번호표를 뽑고, 민원인들을 위해 마련된 기다란 의자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각자 다른 조바심을 매만지고 있는 듯한 사람의 눈길은 자신의 용무를 해결해 줄 창구를 향해 있었다. 그녀는 주민등록, 등/초본, 가족관계증명서라고 적힌 창구를 주시하면서 이따금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 그 사람이 있었다. 자신을 뒤따라 들어온 푸른색 점퍼를 입은 남자. 청원 경찰이 내내 자신을 주시한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뭔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창구 안쪽 직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차하면 창구 안으로 곧장 돌진하겠다는 듯, 필경대에 비스듬히 기대어 선 그는
장상민 기자 | 2024-04-15 09:01 -
한 침대에 누워있다고 상상하니 어색했다… 다시 뜨거워질 수 있을까
■ (8) 정진영 섹스리스 - 가족끼리 왜이래 남편 대혁이 밴드 스매시의 재결성 공연 티켓 예매에 성공했다고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을 때, 수연은 마치 로또에 당첨되기라도 한 듯 흥분했다. 밴드 멤버들이 다시 한 무대에 서는 모습을 보는 날이 오기를 오랫동안 간절하게 기다려왔으니 말이다. 밴드의 재결성 소식도 놀라운데, 대혁이 발 빠르게 나서서 공연 티켓까지 확보하다니. 수연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가 튀어나오려는 입을 손으로 막았다. 공연 일자는 두 달 뒤, 장소는 밴드가 9년 전 고별 공연을 열었던 부산시민회관 대극장이었다. 팬들에게 작별을 고했던 장소에서 열리는 재결성 공연이라니, 이보다 더 극적인 귀환이 또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대혁이 보낸 다음 메시지가 끓어올랐던 수연의 흥분을 가라앉혔다. ―9년 만에 부산으로 내려가는 건데, 공연 끝나고 해운대로 움직이자. 포차거리에서 한잔하고 근처 호텔에서 하룻밤 자면 딱이겠네. 어때? 옛날 생각도 나고 재미있겠다. 수연은 대혁에게 답을 하려다가 멈칫했다. 호텔? 하룻밤? 호텔에는 보통 더블베드 침대 하나가 놓여 있지 않나? 수연은 대혁과
장상민 기자 | 2024-04-08 09:12 -
쓰러진 아버지를 이웃이 발견했다… 짖어댄 우동이 덕분이었다
■ (7) 정이현 반려동물 - 남겨진 것 우경과 영민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그들이 비교적 평범한 부부라는 말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겐 아홉 살짜리 딸 솔이가 있었다. 눈치 없는 누군가가 ‘둘째 계획은?’이라고 물어오면 우경과 영민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유치원에 들어가면서부터 솔이는 동생을 갖고 싶다고 조르기 시작했다. 우경은 ‘나중에’라며 대충 상황을 모면하곤 했지만 남편 영민은 달랐다. “아니”라고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안 되는 걸 빨리 포기하도록 돕는 게 효과적인 교육법이라는 남편의 생각에 우경도 동의했다. 동생 대신 강아지, 라고 아이가 입장을 바꾼 건 초등학생이 되고 나서였다. “대신이라는 표현은 잘못됐어. 강아지도 하나의 생명체니까. 한 생명이 다른 생명을 대신할 수는 없잖아.” 영민이 말했지만 솔이는 수긍하지 않았다. “그래도 키우고 싶다고요.” “하고 싶은 걸 다 할 수는 없어. 본인이 완전히 책임질 수 있을 때 하는 거지.” “내가 책임질 수 있어요.” “너는 아직 어린이잖아. 어린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영민의 말에 솔이
박동미 기자 | 2024-04-01 09:07 -
발길질이 멈추지 않았다… 견디며 악착같이 오토바이를 지켰다
■ (6) 백가흠 다문화가족 - 빈의 두 번째 설날 발목 높이까지 소복소복 쌓이는 눈을 보고 있자니 쩐호우빈은 가족들이 생각났다. “빈아, 눈 처음 봐? 뭘 그렇게 넋 놓고 보냐.” 이 씨가 빈의 등 뒤로 슬쩍 다가와 말했다. 빈은 한국어가 서툴렀고 이 씨가 하는 말을 전부 알아듣지 못했다. 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눈 처음 볼 수도 있겠구나. 그나저나 좀 쉬자.” 이 씨가 손짓으로 커피 마시는 시늉을 했다. “내일부터 설 연휴인데 뭐 하며 지낼 거야? 공장도 문 닫는데.” “우리도 친구들이랑 명절 보낼 거예요.”
장상민 기자 | 2024-03-25 09:10 -
상자 더미 속 두 눈과 마주쳤다… 그게 사람이었나 길고양이였나
■ (5) 천선란 새벽 배송 - 새벽 속 “습관이 생겼어요. 시계를 자꾸 봐요. 해가 떠도 밤 같아요. 해가 없어야 마음이 편한 거 있죠.” 윤애는 내용물을 다 마신 종이컵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지은이 윤애가 쓴 문장을 읽고 있는 순간부터 윤애는 긴장감에 떠오르는 모든 말을 계속 내뱉는 중이었다. 윤애가 쓴 건 에세이도, 소설도 아닌 모호한 글이었다. 일기 같지만 화자가 자신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지만 소설처럼 주인공에게 사건이 일어나는 건 아니라는 점에서 그랬다. 그래도 운전대를 책상 삼아 틈틈이 쓴 문장들이었다. “새벽이 지나면 밤이 온다.”
박동미 기자 | 2024-03-18 09:03 -
갑자기 팀 미팅이 잡혔다… 회의실 창밖은 교전 구역이었다
■ (4) 배명훈 무관심 - 파티션 너머에서 우리는 안녕하지 긴 출장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회사 옆 건물이 교전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지하철이 회사 앞 사거리를 무정차 통과하고 나서야 나는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회사에서 전 직원에게 보낸 안내 메일에는, 교전 기간이 최대 열흘간이고 최대 소음 발생일은 월화수 사흘이라고 나와 있었다.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미팅 시간에 딱 맞춰서 나왔는데, 한 역을 더 가서 내려야 했다. 얼른 다른 교통수단을 알아봤지만, 도로도 차단된 모양인지 시간이 단축될 것 같지는 않았다. 결국 다른 팀 동기에게 연락해
장상민 기자 | 2024-03-11 09:03 -
있지, 엄마도 왕년에 좀 갔었다니까… 우리 셋이 가자 !
■ (3) 이경란 팬심 - ‘덕질 삼대’ 할머니가 효자손으로 내 어깨를 탁탁 쳤다. 주말에 뭐 할 거냐고 엄마가 물었을 때 바쁘다, 아주 중요한 일이 있다고 대답하지 못한 걸 후회하느라 바빠서 할머니가 부르는 소리를 놓쳤다. 티브이 소리가 너무 크기도 했다. 혹시 백화점에 따라가겠느냐고 물어볼까 봐 여지를 둔 거였는데 엄마는 바로 훅 들어왔다. 며칠만 네가 할머니 당번 좀 해. 어차피 할 일도 없잖아. 운동화 하나 건져 보려다 이 무슨 황당 시추에이션. 끝없이 울려대는 티브이 소리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왜요? 할머니가 효자손으로 티브이 리모컨을 가리켰다. 화면에선 어느새 트로트 프로가 끝나고 시끄러운 광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채널을 바꾸라는 뜻이었다. 그걸 어제 할머니 집에 오고 삼십 분 만에 알게 되었다. 리모컨으로 대형 달력 여백에 적힌 채널 번호를 찍었다. 번호는 일고여덟 개쯤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는데 이 채널들이 모두 트로트 프로그램을 방영하는 것임도 어제 알게 되었다. 할머니, 드라마 안 본다. 드라마 안 보는 할머니도 있어? 안 보는 게 아니라 못 보는 거야.
박동미 기자 | 2024-03-04 09:01 -
“그 아이, 꼭 데려오셔야 해요!”… 돈은 많고 추위가 싫은 의뢰인을 위해
■(2) 손원평 오픈런 - 그 아이 길게 늘어선 행렬의 끝이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영하 9도. 기후 위기에 전 세계적 전염병이 더해진 서울의 어느 가을 아침 풍경은 가히 소리 없는 전투를 방불케 했다. 모두들 추위 속에 내뿜는 입김이 뜨거운 증기처럼 사납게 퍼져나갔다. 수민은 당당히 그 줄의 일곱 번째에 자리하고 있었다. 애매했다. 뒤로 끝없이 이어진 줄을 보면 분명 선두에 속한 건 맞는데 안정권은 아니었다. 곰처럼 두텁게 껴입고 핫팩으로 무장을 했지만 새벽 두 시부터 여덟 시간째 야외에 서 있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옷 안으로 파고드는 엄혹한
박동미 기자 | 2024-02-26 09:01 -
산을 내려가는 시시포스도 쉽지 않다고… 숲과 바람이 속삭였다
한국 대표 소설가들이 릴레이 연재하는 ‘소설, 한국을 말하다’가 시즌2의 막을 올린다. 구효서, 정이현, 손원평, 최진영, 천선란 등 꾸준히 묵직한 질문을 던져온 중견 작가들뿐 아니라 신선한 시각으로 문단에 활기를 불어넣는 젊은 작가들도 대거 참여했다. 12인의 소설가가 바라본 한국과 한국인, ‘지금, 여기’의 풍경은 매주 월요일 한 편씩 공개된다. ■ (1) 구효서 자연인 - 산도깨비 “딱 좋아, 딱 좋아.” 기분이 좋을 때 노영필 씨가 하는 말입니다. 지금처럼 산을 오를 때는 딱이라는 말에 맞춰 손뼉까지 딱딱 칩니다. 손뼉을 치면 장 기능이 강화되고 당뇨합병증도 예방된다고 굳게 믿습니다. 중풍과 치매에는 달걀 박수, 혈액순환에는 먹보 박수가 좋다며 노영필 씨는 친구들에게 열두 가지에 이르는 박수법을 가르쳐주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노영필 씨는 건강에 관한 것은 물론이요 드론 같은 무인 멀티콥터라든지 해송과 진백나무 분재, 그리고 이안 반사식 카메라에 이르기까지 두루 해박합니다. 무엇에든 꽂히기만 하면 기어이 남들보다 먼저 전문성을 획득해야 직성이
박동미 기자 | 2024-02-19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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