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기획·고정물
살며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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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의 세계관
한국어로 글을 쓸 때마다 모어인 영어와의 차이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두 언어 사이의 문자와 문화 차이는 늘 새롭게 다가온다. 지금까지 신경 쓰지 않던 흥미로운 차이를 최근 발견했다. ‘있다’와 ‘없다’의 간결함이 그것이다. 있다와 없다는 영어로 크게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첫 번째는 ‘존재’다. ‘there is’로 표현한다. 두 번째는 ‘장소’다. ‘to be (somewhere)’로 표현한다. 세 번째는 ‘소유’다. 주로 ‘to have’로 표현한다. 그 밖에 있다는 동사의 진행형에서 사용하기도 한다. 없다는 있다의 부정이지만
문화일보 | 2026-05-08 11:32 -
녹비홍수, 초록이 살진 시절
다산이 김매순(金邁淳)에게 보낸 편지는 ‘동쪽 지방으로 한 열흘 유람하고 돌아왔더니, 어느새 초록은 살지고 붉은 꽃은 수척해져서 짙은 그늘이 바다와 같습니다’(東游十日而還 已綠肥紅瘦 繁陰如海)로 시작된다. 추사가 장인식(張寅植)에게 보낸 편지에는 ‘한번은 비 오고 한번은 바람 불다가 어느새 봄이 돌아감을 재촉하여, 초록이 살지고 붉은 꽃이 파리해진 것을 느끼니, 먼 데 향한 그리움을 고물고물 가라앉히지 못하겠습니다’(一雨一風 冉冉催春歸 已覺綠肥紅瘦 遠緖搖搖 不自定)라고 했다. 심희순(沈熙淳)에게 쓴 추사의 편지에도 ‘초록은 살지고
문화일보 | 2026-04-24 11:35 -
불편함의 역설
벼르고 벼르다가 드디어 봄맞이 대청소를 한다. 집안을 정리하는 것, 특히 버릴 것을 골라내는 과정은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이걸 버려야 하나 그대로 두어도 되지 않으려나, 아까운데, 언젠가 쓸모 있을 건데 등등 내적 갈등이 만만찮다. 특히 욕실까지 모든 벽이 페인트칠로 되어 있는 데다가 유리 창문 안에 창호지 창문이 하나 더 달린 이 집은 정말 불편하다. 설계하신 건축가 선생님의 트레이드마크인 이 창호지 창문은 조금만 건드려도 그대로 구멍이 나서 금세 여기저기 너저분하게 되어 버린다. 언젠가 그 건축가 선생님을 모임에서 만나게 되었다
문화일보 | 2026-04-17 11:29 -
베토벤과 원두 60알
나는 강의할 때, 베토벤을 단지 한 명의 음악가로 소개하지 않는다. 그는 위대한 작곡가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자 시대의 목소리였다. 그의 음악은 개인의 감정과 고통 및 한 시대의 이상이 만나 만들어진 결과였다. 그러니 그의 작품을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히 악보를 읽는 일이 아니라, 한 인간의 삶과 그가 지나온 시간을 함께 들여다보는 일과도 같다. 베토벤의 삶을 들여다보면 음악은 절대 추상적인 예술이 아니다. 그것은 한 인간이 살아낸 시간의 기록이며, 그 속에서 겪은 고통과 선택의 결과다. 불우한 환경, 청력 상실, 그리고 끝내 피할 수
문화일보 | 2026-04-10 11:20 -
초봄, 워싱턴의 감동
지난 3월 중순, 새 책 ‘문자 전파담’ 집필을 마무리하고 오랜만에 짧은 여행에 나섰다. 미국 북동부 로드아일랜드의 겨울은 매우 춥고 눈도 많이 왔다. 그렇다고 장거리 비행은 내키지 않아 초봄의 워싱턴 DC로 향했다. 자주 다녀오긴 했는데, 온전히 여행으로만 간 것은 거의 10년 만이었다. 미국의 행정수도이자 계획도시인 이 워싱턴 DC는 경관이 좋고 녹지가 많아 전원도시 같은 분위기다. 도착한 날은 온도가 갑자기 28도까지 오르고 햇살도 강해서 마치 한여름 같았다. 오랜 시간 산책을 즐겼다. 도시 곳곳에 목련꽃과 수선화가 피기 시작
문화일보 | 2026-04-03 11:33 -
착각
지난겨울, 추위에 파카의 모자를 뒤집어쓰고 가는데 자꾸 뒤에서 따라오는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 내가 길을 막고 있나 싶어 돌아보면 아무도 없다. 여러 번 돌아보다가 사실은 지퍼 손잡이가 달그락대는 소리가 막힌 모자로 인해 증폭돼 발소리처럼 들린 것임을 알았다. 동네 작은 공원의 모퉁이를 돌아서는데 멀리 미끄럼틀 위에서 빨간 옷을 입은 젊은 여성과 베이지색 파카에 모자를 쓴 남성이 미끄럼틀 양쪽 지지대에 매달려 논다. 가까이 가서 보니 미끄럼틀 양옆에 아이들이 떨어지지 않게 막아둔 반투명의 볼록 유리와 맞은편 미끄럼틀 계단의 붉은
문화일보 | 2026-03-27 11:49 -
봄이라는 ‘신선한 시작’
봄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 봄이다. 봄의 생동감은 진짜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다섯 살 유치원에 입학하던 때부터 이 나이가 되도록 봄은 늘 내게 새 학년, 새 학기를 가져다준다. 학생 신분으로, 그리고 교수로 남들보다 훨씬 더 많은 새 학기를 맞이한 덕분인지 봄은 새 얼굴, 새 학기, 새로운 연구와 도전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설렘을 선물한다. 어릴 때 새로 산 노란색 봄 운동화와 분홍색 책가방을 머리맡에 두고 자면서 새 학기를 기다렸던 그 아득했던 기억이 봄기운과 함께 늘 밀려온다. 이번 학기에
문화일보 | 2026-03-20 11:40 -
박수는 짧지만 음악은 길다
우리는 종종 “클래식 강국”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영재 강국”에 더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국제 콩쿠르에서 한국 연주자들의 입상 소식은 끊이지 않는다. 이처럼 꾸준히 성과를 내는 나라도 드물다. 분명 어떤 교육적 토양과 문화적 에너지가 작동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른 질문을 던지고 싶다. 우리는 과연 ‘강국’인가, 아니면 ‘성과에 익숙한 사회’인가. 우리는 왜 이토록 어린 영재의 탄생에 열광하는가. 아마도 그것은 한 개인의 재능에서 국가적 성취를 확인하고 싶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러나
문화일보 | 2026-03-13 11:29 -
책장의 책들과 인연 끊기
이번 겨울 로드아일랜드에 10여 년 만에 폭설이 내렸다. 학교는 이틀 동안 휴교를 했다. 제설 작업도 애를 먹었다. 이후 약 일주일 동안은 혹한이었다. 매일 동네를 산책하는 나로서는 답답한 일이었지만, 이렇게 되었으니 미뤄둔 책장 정리를 하기로 했다. 산책처럼 운동이 되는 건 아니지만, 옛 추억을 돌아볼 수 있으니 그 또한 즐거운 일이다. 오래전 읽었거나 앞으로 읽지 않을 것 같은 책을 정리한다는 생각으로 가볍게 시작했다. 웬걸, 그 기준은 이내 무너졌다. 오래된 책 중에 차마 버릴 수 없는 것들이 계속 나왔기 때문이다. 1980년
문화일보 | 2026-03-06 11:37 -
이게 뭔가
전정 박항환 선생께서 내 연구실에 불쑥 들러 들려주신 이야기다. 갓 스무 살 청년 시절 목포 남농(南農) 허건(許楗·1907∼1987) 선생 댁에서 화업(화業)을 익힐 때 일이다. 국전 응모가 있을 무렵이면 가르침을 청하려고 그림을 들고 찾아오는 후학이 많았다. 하루는 스승과 둘이 화실에 앉아 그림 공부를 하는데, 서울서 내려온 40줄의 화가가 먼 길을 찾아왔다. 가져온 그림을 펼치자 화면 가득 청기와 지붕뿐이었다. 손을 대면 까끌까끌한 기와의 거친 질감이 느껴질 만큼 생생했다. 그 대담한 구도와 과감한 붓질을 보자 눈이 번쩍 떠졌
문화일보 | 2026-02-27 11:29 -
‘빨간 박탈감, 파란 패배감’
무언가에 재능이 있는 사람을 만나면 참 부럽다. 대화·노래·요리·운동… 내게 없는 이 숱한 재능들을 갖고 싶어 안달이 난 적도 있다. 내게 없는 능력, 남의 떡이 부러운 건, 내가 가진 재능은 내겐 너무나도 당연해, 그게 뭔지 스스로 자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니 남이 잘하는 건 나와 달라 눈에 금방 들어오고, 그저 부럽고, 때론 박탈감까지 느끼게 된다. 그러다 다짐한다. 저 재능은 저 사람이 타고 태어난 우주의 기운이다, 내게 없는 재능을 좇아 가랑이 찢어지지 말자. 숱하게 마음을 다잡아보지만, 나이가 들어도 쉽게 포기되지 않
문화일보 | 2026-02-20 11:15 -
개성과 다름 사이
요즘 연주를 들으며 자주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 ‘우리는 언제부터 연주자에게 정통에 충실한 연주보다 색다른 해석을 더 강하게 요구하게 되었을까.’ 이 변화는 갑작스럽거나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사회가 변했고, 예술이 놓인 환경도 달라졌다. 연주자에게는 더 많은 자유가 주어졌고, 곡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 결과 연주자마다 개성이 더욱 뚜렷해졌고, 청중으로서는 연주의 풍경이 훨씬 더 다채로워졌다. 이 변화가 주는 장점은 분명하다. 같은 작품을 들어도 연주자에 따라 전혀 다른 감정을 느낄 수
문화일보 | 2026-02-13 1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