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기획·고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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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입니다>신경림 시인은… 농촌현실 배경으로 농민의 애환 그려
1935년 충북 충주군(지금의 중원군) 노은면 연하리에서 4남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신응식(申應植). 집안에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 주위에서 쉽게 이광수, 김동인 등의 책을 구해 일찍 문학을 접할 수 있었다. 1948년 충주사범 병설 중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사범학교를 마치면 국민학교 교사로 발령 받을 수 있었으나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한 신경림은 풍금을 칠 줄 몰라 끝내 사범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 1952년 충주고등학교에 입학했다. 1955년 동국대 영문과에 입학, 대학 2학년인 이듬해 시 ‘낮달’ 등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1957년 낙향해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하다 1965년 서울로 올라왔다. 1967년 동국대 영문과를 서른둘의 나이에 뒤늦게 졸업했다. 1973년 첫 시집 ‘농무’를 냈으며 이듬해 증보판을, 1975년엔 ‘창비시선’ 1권으로 재출간했다. 모더니즘이 지배적이었던 시단에서 ‘농무’는 시인들이나 독자들 모두에게 새로운 충격을 던졌다. 신 시인의 작품세계는 주로 농촌 현실을 바탕으로 농민의 한과 울분을 노래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우리 민족의 정서가 짙게 깔려 있는 전통적인 무대를 배경으로 민중과 공?
김영번 | 2012-06-29 14:24 -
<오랜만입니다>신경림 “절친 김근태 세상뜬 뒤 술 딱 끊어… 오늘로 5개월 21일째”
“술을 끊은 지 딱 5개월하고 21일이 됐네요. 지난해 12월30일 김근태 고문이 돌아가셔서 올해 1월1일 상가에서 술을 마신 게 마지막입니다. 그 이후로 술은 일절 입에 대지 않고 있어요.” 지난 21일 서울 성북구 정릉동 자택에서 만난 신경림(77) 시인은 술 끊은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농무(農舞)’의 시인이 술을 끊다니, 뉴스가 아닐 수 없었다.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 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시 ‘농무’ 중에서) 인터뷰 = 김영번 차장(문화부) 시인의 첫 시집 ‘농무’가 1973년에 나왔으니 무려 40년의 세월이 지난 셈이다. 하지만 지금도 ‘농무’를 읊조리면 막 내린 시골 마을 가설무대와 파장을 맞은 장터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김영번 | 2012-06-29 14:22 -
<오랜만입니다>“복싱은 나의 운명”… 식당 한편에 손수 만든 링… 高3 제자 키워
박종팔은 요즘 개를 키운다. “주인이 부자든 거지든 무조건 따릅니다. 사람에게 하도 속아서 살아서 그런지 그런 개의 심성이 마음에 와 닿아요. 처음 키우던 진돗개 어미개는 한 달 전 나가서 안 들어오네요. 저 놈도 진돗개라는데 아직 강아지입니다. 이름은 그놈이나 이놈이나 다 ‘금팔이’요. 주인 별명(돈팔이)을 그대로 붙일 수는 없어 돈 들어오라고 금팔이라고 했죠.” 복싱은 인생 그 자체였다는 박종팔은 아직 복싱과의 인연을 완전히 끊지는 않은 것 같다. 식당 한편에 손수 만든 링이 있다. ‘박종팔이 하는 식당’이라는 홍보성도 있지만 그 링 하나만으로도 허전함을 잊는다고 한다. 제자도 키운다. 동네 친구 부부의 요청으로 그 집 아들을 받아들였다. 고 3인 제자는 체중을 빼려 복싱을 시작했는데 92㎏이었던 체중을 27㎏이나 줄인 후 선수로 나설 생각을 해 올가을 쯤 데뷔시킬 계획이다. ▲1958년 8월11일 전남 무안에서 박인규(1987년 작고)씨의 4남1녀 중 넷째이자 3남으로 출생(호적에는 형제 모두가 2년 씩 늦게 올라가 1960년생으로 되어 있다) ▲1977년 프로데뷔. MBC 신인왕 ▲1978년 한국 미들급 챔피언 ▲1979년 동양 미들급 챔피
이동윤 | 2012-06-22 14:26 -
<오랜만입니다>박종팔 “한때 별명이 ‘돈팔이’, 갈퀴로 긁어… 다 잃고나니 행복 찾아와”
한국 프로복싱 사상 가장 화끈했던 파이터 박종팔(54). 프로 통산 52번 싸워 46승5패1무의 전적을 남겼는데 그중 KO승을 39번 거뒀다. 19연속 KO승이라는 진기록도 남겼다. 5패 중 KO로 진 게 4번이다. 이기든 지든 화끈했다. 박종팔은 지난달 미국 하와이에서 열린 국제복싱연맹(IBF) 설립 30주년 기념행사에서 ‘IBF 30년 역사를 빛낸 복서’로 선정돼 특별상을 받았다. 세계타이틀전이 열리는 날은 시내가 철시하다시피 했던 ‘복싱의 시대’인 1980년대를 풍미했던 많은 챔피언 중에서도 그는 세계 중량급(슈퍼미들급·76.2㎏ 이하)을 지배했던 ‘전설’이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그는 “내 인생은 3라운드다. 1라운드는 성공의 시대였다면 2라운드는 좌절의 시기였다. 나이 50 넘어 맞은 3라운드에서 이제야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고 말한다. ‘돈팔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부동산 갑부였던 그는 주위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재산을 다 날리고 죽기 위해 수락산을 찾았었다. 이제 그는 그 수락산에서 식당을 하며 살고 있다. 지난 12일 경기 남양주시 별내면 수락산 ?
이동윤 | 2012-06-22 14:24 -
<오랜만입니다>이주호 “창작열정 식었을 때 일가족 자살 뉴스에 울컥, ‘사랑으로’ 만들었죠”
방송 화면의 3분의 2를 차지하던 그의 몸집이 반으로 홀쭉해졌다. 선글라스를 끼고 카페 안으로 들어오는 그의 모습은 지난 세월의 흔적을 깡그리 무시할 만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체격도 체격이지만, 윤기가 흐르는 그의 보드라운 얼굴 피부에서 어떤 ‘변화’가 읽혔다. ‘혈색이 좋아 보인다’고 하자, 그는 “술 끊고 25㎏ 뺐다”고 자신감 넘치는 대답을 내놓았다. “2년간 25㎏ 뺐으면 대단한 노력 아니에요? 하하. 어느 날 너무 피곤하고 힘들어서 병원에 갔더니 덜 먹으면 된다고 해서 아침엔 계란 한 개, 점심엔 공기밥 3분의 1, 저녁엔 야채 샐러드로 식단을 바꾸고, 운동도 병행했죠. 제가 술도 좋아해서 한번 마시면 14시간 동안 마시는 두주불사(斗酒不辭)형인데, 그걸 끊었으니….” 이주호(57). 이정선, 한영애 등과 함께 4인조 혼성 포크그룹 ‘해바라기’의 일원으로 활동하다, 솔로 데뷔 이후엔 ‘행복을 주는 사람’ ‘모두가 사랑이에요’ ‘사랑의 시’ ‘어서 말을 해’ ‘사랑으로’ 등 소위 주옥같은 히트곡을 쉴새없이 쏟아낸 포크계의 ‘전설’이다. 그의 노래는
김고금평 | 2012-06-15 13:47 -
<오랜만입니다>그룹 ‘해바라기’는… 당시로선 파격 코드 실험
혼성그룹 ‘해바라기’는 이정선, 이주호, 한영애, 김영미 등 4인조로 1977년 출발했다. 뛰어난 음악성과 화음으로 포크계의 ‘신문물’을 선사했던 이들은 그러나 이주호가 군에 가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자연스러운 해체 수순에 들어간 해바라기는 제대한 이주호가 다시 그룹명을 자신의 듀오에 쓰면서 부활했다. 이주호와 유익종으로 새로 결성된 포크 듀오 해바라기는 1집 수록곡 ‘행복을 주는 사람’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 곡은 당시 주류에서 쓰던 기본 코드와 달리 재즈에서 사용하던 세븐 코드가 들어간 CM7으로 시작돼 제작자가 “대중이 이해하지 못하는 선율”이라며 발매 자체를 꺼렸던 곡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기념 음반식으로 200장만 찍은 이 음반은 그러나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며 대중의 심장을 낚아챘다. 당시 음반 한 장이 5000원이었는데, 이 음반은 10만 원에 거래될 정도였다. 이주호는 “당시 주류 포크가 동요 패턴에서 벗어나지 않는 수준이어서 우리는 음악을 발전시키고 싶어 기존에 쓰지 않던 코드를 많이 썼다”며 “지금도 나만 아는 코드를 개발하고 있?
김고금평 | 2012-06-15 13:47 -
<오랜만입니다>민 교수의 ‘영어 비법’ Tip… 자녀들 영어캠프 보내지 말고 영어 동화책 읽혀라
민병철 교수를 만나기 전 자녀들의 영어공부를 어떻게 시켜야 하는지, 또 매년 해가 바뀌면 ‘영어공부’를 벼르고 있지만 좀처럼 늘지 않는 직장인들의 영어 공부 방법만은 꼭 물어볼 요량이었다. 먼저 민 교수가 학부모들에게 권하는 자녀 영어 교육의 팁(Tip). 그는 “공교육에서 초등학교 3학년부터 영어를 시작하는 시대”라며 “그러나 돈 안 들이고 영어공부를 할 수 있는 무료 영어 사이트가 인터넷에 지천으로 깔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인터넷 활용과 함께 영어 동화책 읽기를 특별히 권장했다. 동화책은 돈을 들이지 않고도 무료로 도서를 대여해주는 도서관이 많아 학부모들의 비용부담이 없이도 자녀들에게 영어공부를 쉽게 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독서와 인터넷 콘텐츠를 이용하면 전혀 돈을 들일 필요도, 또 해외로 보낼 필요도 없다”고 했다. 특히 그는 “대신 엄마가 관심을 가지고 엄마도 자녀에게 영어로 물어보거나 기본적인 영어 몇 마디를 같이하면서 아이들의 공부를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며 “절대로 자녀들을 영어 캠프 등 영어
한강우 | 2012-06-08 13:50 -
<오랜만입니다>민병철 “문법만 따지던 시대 생활영어 충격… 내 방송땐 학원도 텅 빌 정도”
이름 자체가 브랜드인 사람이 있다. 민병철 교수가 바로 그렇다. 민병철 교수는 대한민국 영어 교육의 아이콘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국민 영어선생님’으로 소통 중심의 생활영어 보급에 앞장서 온 ‘실용 영어의 개척자’라 불리며 대한민국에 영어회화 열풍을 불러일으킨 ‘영어 전도사’다. 1981년 ‘민병철 생활영어’로 대한민국 영어 교육의 새로운 지평을 제시한 그는 2009년 9월부터 건국대 국제학부에서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강의 과목은 비즈니스영어. 모든 수업은 영어로 진행한다. 그는 특히 요즘은 학생들과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개발제안서 만들기’에 주력하고 있다. 모든 학생들이 스마트 폰 앱개발 기획서를 발표하고 그 중에서 우수 내용을 채택, 팀별로 만든 앱개발 기획서를 최종 검토한 뒤 해당분야 공공기관 및 기업체와 연결시키는 작업이다. 무궁무진한 에너지와 가르침을 향한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변신을 거듭하고 있는 민병철 교수의 무한진화 스토리를 듣기 위해 지난 5월31일 오후 그를 찾아갔다. “목요일은 강의가 없는 날”이라며 기자를
한강우 | 2012-06-08 13:50 -
<오랜만입니다>양 위원장의 ‘여자 레슬링 육성론’… “한국 여성 강인… 최강국 日처럼 적극 투자해야”
양정모 씨는 “이제 여자 레슬링에 투자할 때”라고 역설한다. “일본은 후쿠다 협회장이 10년 전부터 미래를 보고 여자레슬링에 투자했어요. 도쿄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우에다케 씨가 10세 소녀들을 상대로 손녀들에게 레크리에이션 가르치듯 레슬링의 재미에 빠지게 했지요. 그 결과 일본은 여자 레슬링의 최강국이 됐습니다. 이번 올림픽에서도 여자부 4체급 중 최소 2체급은 아마 일본이 금메달을 딸 겁니다. 한국 여성은 강인합니다. 나는 그 힘을 믿습니다.” 양정모 씨는 한국 레슬링의 몰락에 대해 “그동안 협회가 농사만 짓고 밭갈이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이번 올림픽에 남자는 양 형 합쳐 14체급 중 9체급만 출전권을 땄지만, 여자팀은 저변이 얇은 가운데서도 4체급 중 티켓 2장을 따내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고 강조했다. 양정모 씨는 후배들을 위해 자신의 금메달을 내놓았다. ‘정식품’에 ‘1호 금메달’을 광고에 활용토록 하고 대신 1억 원 상당의 콩 음료 ‘그린비아’를 협찬 받은 것이다. “우리 집이 방앗간을 해서 운동 후 콩국을 많이 먹었는데 감량 후 회복에 아주 좋았어요”라고 말한 그는 “지도자는 식품, 음?
이동윤 | 2012-06-01 14:02 -
<오랜만입니다>“모래조끼 입고 ‘눈물고개’ 훈련… 그 땀이 금메달 낳았죠”
‘체력은 국력’, 1970년대를 풍미했던 구호 중의 하나다. 정말로 ‘체력=국력’이었다. 1948년 정부 수립 후 태극기를 앞세우고 출전한 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은 단 한 개의 금메달도 따지 못했다. 우리 선수들이 덩치 큰 서양 선수에게 깔리고 얻어 맞는 것이 흑백 TV를 통해 본 올림픽의 전부였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페더급(62㎏)에서 부산 ‘방앗간 집 아들’ 양정모가 드디어 건국 이후 첫 올림픽 금메달을 따냈다. 그 이전에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생이 있었지만 그것은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딴 것이 아니었다. 양정모의 금메달은 그래서 우리에게 의미를 갖는다. 이제는 올림픽 금메달도 흔한 것이 되고 말았지만 1976년 당시의 한국 국민에게 1호 금메달은 오랜 기다림이자 사무침이었다. 금메달을 딴 양정모는 부친과 당시로는 귀한 국제전화를 할 기회를 얻었는데 “정모야, 욕봤다”고 한 아버지의 말은 한동안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런던올림픽을 두 달 남짓 남긴 지난 5월29일 서울 노원구 공릉동 태릉선수촌에서 양정모(60) 씨를 만났
이동윤 | 2012-06-01 14:02 -
<오랜만입니다>홍 前 의원은… 7세때부터 대통령이 꿈… 이름 빨리 알리려 탤런트 선택
일반적으로 연기자들은 연기를 하기 위해 탤런트에 도전한다. 그러나 홍성우는 달랐다. 7세때부터 대통령을 꿈 꿔온 그는 정치인이 되기 위해 가장 빨리 이름을 알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탤런트가 됐다. 이 때문에 경희대 화학과 1학년 때 무작정 1960년대 최고 스타 김진규·김보애 내외의 집을 찾아갔다. 새벽 4시부터 기다렸으나 가정부가 번번이 가로막았다. 3일째, 김진규 내외가 집에 있다는 걸 알고 ‘순자’라고 불리는 가정부의 따귀를 때리고 소란을 피우고서야 김진규 내외를 만날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과 의논할 게 있어 난리를 쳤습니다’라고 사과하면서 ‘배우도 15년 뒤 쯤이면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에 도전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3일 뒤에 다시 오라’고 했어요.” 결국 1961년 김진규 선생 부부의 소개로 서울예술대학 자리에 ‘드라마센터’를 만든 유치진 교장을 알게 되면서 연기 인생이 시작됐다. 그곳에서 김성원, 이순재, 오현경, 김혜자 등을 만났고, 그들이 주연일 때 홍성우는 엑스트라였다. 그 뒤 홍두표 TBC(동양방송) 편성부국장 추천으로 탤런트 특채가 됐지만 배역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1973년인?
한강우 | 2012-05-25 14:05 -
<오랜만입니다>“수천억 축재했었다고 ?… 제주 구멍가게·민박도 그나마 날릴 판”
‘홍성우’라는 이름 석자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40∼50대 이상의 도시사람들이다. 그는 TBC(동양방송) 출신의 유명 탤런트다. 하지만 케이블과 위성방송이 없었던 1970년대 난시청 지역이 많은 시골에서는 TBC 스타들을 아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고향이 경주인 기자도 1970년 초부터 흑백 TV를 접했지만 TV 화면에 스크레치가 생기는, 이른바 ‘비가 내리는 화면’의 MBC TV까지만 시청했을 뿐 TBC는 이런 화면조차도 잡히지 않아 홍성우, 고은아, 이순재가 탤런트라는 사실을 알기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는 또 1978년 10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 쟁쟁한 후보들을 물리치고 당선된 ‘연예인 출신 1호 국회의원’이기도 하다. 서울 도봉과 노원 지역에서만 12대까지 내리 3선을 했다. 지난 4월 제주에서 이런 홍성우를 우연히 만났다. 그가 운영하는 작은 구멍가게에서 소주을 마시면서 잠시 들은 71년 인생은 한편의 드라마였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드라마가 아닌 새드엔딩으로 끝나는 비극이었다. 적어도 현재의 홍성우 인생을 보면. 그?
한강우 | 2012-05-25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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