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기획·고정물

S010201778 그때 그 시절
142 | 생성일 2012-07-03 13:59
  • <그때 그 시절>1955년 소년경찰…지금은 손주재롱 보고 있겠죠

    <그때 그 시절>1955년 소년경찰…지금은 손주재롱 보고 있겠죠

    이 소년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1955년 9월 29일 서울 중구 을지로 입구 사거리에서 한 소년이 교통정리를 하고 있습니다. 이날 서울시경찰국에서 주최한 교통순경 정리 경기대회에서 어린이들이 교통정리 시범을 했습니다. 당시 초등학교 3∼4학년쯤으로 보이는 이 소년은 지금 칠순 노인이 돼 있겠네요. 1960년대 정치적 혼란기에 청소년 시절을 보낸 후 한국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던 1970년대에 결혼해 한 가정의 가장으로 고생도 많이 했을 것 같습니다. 10년 전쯤 은퇴해 지금은 손주들의 재롱을 보며 여유 있는 노년을 보내고 있겠죠.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김구철 | 2015-04-28 13:57
  • <그때 그 시절>6·25후 가족부양 위해 미용 기술 배우는 여성들

    <그때 그 시절>6·25후 가족부양 위해 미용 기술 배우는 여성들

    1950년대에는 많은 여성들이 미용 기술을 배웠습니다. 6·25전쟁 후 남성의 부재를 메우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사진은 1950년대 초 한 미용학원 풍경입니다. 여성 수강생들이 서로의 머리를 만지며 실습을 하는 모습입니다. 모두 ‘빨리 배워 개업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진지하게 실습에 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용 일이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1958년 한 신문에 “미망인들 또는 남편을 도와 부업을 원하는 여성들이 열심히 미용 기술을 배우고 있다. 미용이라고 하면 무언지 호화롭고 안일한 것을 연상케 하나 고달픈 일도 많다. 인내심을 가지고 견디

    김구철 | 2015-04-21 14:08
  • <그때 그 시절>손수레 코끼리… 그래도 신났던 어린이날

    <그때 그 시절>손수레 코끼리… 그래도 신났던 어린이날

    1967년 어린이날을 맞아 서울 종로구 세종로에서 가장행렬이 열렸습니다. 손오공으로 분한 사람과 천으로 만든 대형 코끼리가 거리를 지나고 있습니다. 손오공의 소품과 코끼리의 만듦새가 어설퍼 보입니다. 막대기 끝에 끈을 묶어 여의봉을 만들었고, 코끼리 다리 아래로 손수레 바퀴와 수레를 끄는 아저씨의 발이 보입니다. 또 손오공은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들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손에 든 무언가를 보며 걷고 있습니다.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줄 법한데 말입니다. 요즘 아이들 같으면 시시하다고 쳐다보지도 않겠네요. 하지만 길가에서 이 행렬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빛은 초롱초

    김구철 | 2015-04-14 14:40
  • <그때 그 시절>‘풍기문란’ 욕먹던 60여년 전 한강 뱃놀이

    <그때 그 시절>‘풍기문란’ 욕먹던 60여년 전 한강 뱃놀이

    1950년대 말 시민들이 한강에서 뱃놀이를 하는 모습입니다. 피서를 위해 멀리 갈 필요 없이 가까운 한강에서 수영을 하고 뱃놀이도 할 수 있었던 시절이 그립습니다. 하지만 한강 뱃놀이와 수영이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1949년 8월 한 신문 기사에 “한강의 풍기문란이 말이 아니다. 수일 전 백주 벌거숭이 수십 명이 유치장행을 했으며 매춘부들이 한강으로 집결, 심야의 뱃놀이를 했다. 한강의 밤 뱃놀이를 ‘유숙계(留宿屆) 없는 호텔’이라고 한다. 이에 부근 주민들이 당국에 단속을 요청했다”고 쓰여 있습니다. 또 한강에 배를 띄워 빨래터를 마련해놓고 사용료를 받기

    김구철 | 2015-04-07 13:57
  • <그때 그 시절>플라자호텔 자리에 있던 대한체육회 회관

    <그때 그 시절>플라자호텔 자리에 있던 대한체육회 회관

    일제강점기인 1920년 ‘조선체육회’라는 이름으로 창립한 대한체육회는 스포츠를 통해 한국의 저력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대한체육회 창립 초기에는 회장의 집 방 한 칸을 빌려 사무를 봤을 정도로 여건이 열악했습니다. 이후 이곳저곳 사무실을 옮겨 다니다 6·25전쟁 때는 부산에 연락사무소를 두기도 했습니다. 대한체육회가 처음으로 번듯한 회관을 마련한 건 자유당 정권의 실력자인 이기붕 씨가 회장으로 있던 1956년입니다. 서울 중구 태평로 1가 10번지(현 플라자호텔 자리) 목조건물에 자리 잡은 대한체육회는 10년간 이곳에서 업무를 보다 1966년 6월 무교동에 지하 1

    김구철 | 2015-03-31 13:52
  • <그때 그 시절>1971년 6·25전쟁 이후 첫 남북 접촉

    <그때 그 시절>1971년 6·25전쟁 이후 첫 남북 접촉

    1971년 8월 20일 6·25전쟁 이후 첫 남북 접촉이 있었습니다. 이날 판문점 중립국 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남북에서 파견된 각 2명의 적십자사 요원이 남북 적십자회담 개최를 위해 처음으로 접촉했습니다. 1948년 남북 분단 이래 첫 대화 테이블에 나선 주인공은 이창렬, 윤여훈(이상 남측 파견원), 서성철, 염종련(이상 북측 파견원) 등 4명이었습니다. 사진은 4명의 남북 파견원이 악수하는 장면입니다. 왼쪽 두 번째가 이창렬 씨이고, 왼쪽 다섯 번째 모자를 쓴 여성이 윤여훈 씨입니다. 그해 9월 20일부터 1972년 8월 11일까지 총 25회의 예비회담을 거쳐 1972년

    김구철 | 2015-03-24 13:58
  • <그때 그 시절>미용실·당구장·행상·좌판… 50여년前 명동거리

    <그때 그 시절>미용실·당구장·행상·좌판… 50여년前 명동거리

    1960년대 명동거리 모습입니다. 당시에는 이곳이 서울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였죠. 미용실과 당구장, 다방 등이 즐비합니다. 그중 큰 간판을 내건 베엘미용실은 꽤 유명했나 봅니다. 신문에 ‘어느 미장원은 헤어·스타일을 잘하는가 하면, 특히 마사지를 잘하는 미장원도 있다. 친구들이 마사지를 잘하는 미장원이 있다고 하면 이곳저곳 다녀봤지만 아직 명동에 있는 베엘미장원만큼 마음에 드는 곳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이 미용실을 소개하는 한 주부의 글이 실려 있으니 말입니다. 거리는 그리 붐비지 않아 보입니다. 아이를 등에 업은 행상과 좌판을 펼쳐놓고 무료하게 앉아 있는 아주머니가 눈에 띕니

    김구철 | 2015-03-17 13:59
  • <그때 그 시절>광화문 뒤에서 본 45년 전 세종로

    <그때 그 시절>광화문 뒤에서 본 45년 전 세종로

    1970년 광화문 뒤편에서 바라본 세종로 거리 모습입니다. 지금은 광화문광장이 조성돼 있는 자리에 한 줄로 나무가 심어진 중앙분리대가 있습니다. 사진 가운데 ‘짧은 통화는 문화인의 자랑’이라는 간판이 외벽에 붙어 있는 건물(광화문 지붕 왼쪽 끝과 맞닿은 지점)이 광화문전화국입니다. 지금은 이 자리에 세종로공원이 들어섰고, 공원 안에는 ‘정보통신기념비’가 설치돼 있습니다. 광화문전화국 왼편으로 높이 솟은 건물은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입니다. 시민회관은 1972년 12월 2일 문화방송(MBC) 개국 11주년 기념 10대 가수 시상식을 진행하던 중 조명장치에서 불

    김구철 | 2015-03-10 13:53
  • <그때 그 시절>1982년 의령 경찰관 총기난사 56명 사망 비극

    <그때 그 시절>1982년 의령 경찰관 총기난사 56명 사망 비극

    지난 2월 25일 세종시에서 50대 남성이 엽총으로 3명을 살해한 뒤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또 이틀 후인 2월 27일에도 경기 화성시에서 70대 남성이 3명에게 엽총을 발사해 숨지게 한 후 자살했습니다. 국내에서는 총기 사건이 드물지만 지난 1982년 경남 의령군에서 건국 이래 최악의 총기 난사 사건이 터졌습니다. 그해 4월 26일 궁류면 지서에서 근무하던 한 순경이 무기고에서 카빈총 2정과 실탄 144발, 수류탄 8발을 탈취, 인근 4개 마을을 돌며 주민들에게 무차별 난사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56명이 사망했고, 34명이 부상당했으며 범인은

    김구철 | 2015-03-03 13:56
  • <그때 그 시절>6·3사태 때 성균관대 정문… 총칼 무장 군인들

    <그때 그 시절>6·3사태 때 성균관대 정문… 총칼 무장 군인들

    군사정권 시절에는 대학가 주변에 군인들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반정부 시위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방편이었죠. 사진은 지난 1964년 일어난 6·3사태 당시 서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 정문에 총칼로 무장한 군인들이 보초를 서고 있는 모습입니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경제개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정부와의 회담에 저자세로 나섰습니다. 이에 그해 3월 24일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학생들이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됐고, 6월 3일에는 1만여 명의 학생과 시민이 시위에 참가했습니다. 동네 꼬마들은 이런 풍경이

    김구철 | 2015-02-24 13:52
  • <그때 그 시절>남대문로에 소달구지·리어카… 여유롭네요

    <그때 그 시절>남대문로에 소달구지·리어카… 여유롭네요

    1950년대 서울 중구 남대문로 풍경입니다. 한산한 거리에 소달구지와 리어카가 여유롭게 다니고 있네요. 하지만 당시 남대문로는 서울 시내에서 매우 붐비는 도로 중 한 곳이었습니다. 1955년 9월 서울시경찰국 조사에 따르면 종로1가의 차량 통행량이 하루 평균 3만 대로 가장 복잡했고, 뒤를 이어 남대문∼서울역 2만5000대, 광화문∼시청 2만2000대 순이었습니다. 하루 중 오전 8∼9시, 오후 5∼6시가 가장 붐볐으며, 시간당 5만467대의 차량이 서울 시내에서 운행했다고 합니다. 왼쪽 남성은 당시 멋쟁이로 통했을 듯합니다. 깔끔한 머리 모양부터 밑단을 살짝 접어

    김구철 | 2015-02-17 13:30
  • <그때 그 시절>1968년 숭례문 옆 남산 방면 지하보도 공사

    <그때 그 시절>1968년 숭례문 옆 남산 방면 지하보도 공사

    1968년 3월 서울 중구 남대문로5가 숭례문 바로 옆에서 남산 측 지하보도 구축공사가 한창입니다. 그해 6월 이 시설물이 완공되며 남대문로를 통행하는 차량이 신호대기 없이 달릴 수 있게 됐고, 보행자들의 안전도 보장됐습니다. 당시 서울역 앞과 태평로 체신부(현 서울지방국세청 남대문 별관) 앞에도 지하보도가 건설됐습니다. 신문 기사에 따르면 3개 지하보도 총 공사비로 1억6200만 원이 들었습니다. 거리는 그리 복잡해 보이지 않습니다. 노면전차와 버스, 택시 등이 한산하게 오가고 있고, 수입차도 몇 대 눈에 띄네요. 지금은 높은 건물들에 가려 숭례문 앞에서는 보이지

    김구철 | 2015-02-10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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