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기획·고정물
그림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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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 존재의 감춤과 어필
마음과 몸을 집중하며 곧고 차갑게 나아간다. 그렇게 전심전력으로 선을 긋지만, 어디선가 아주 미세한 소음 같은 흔들림이 생긴다. 불가항력으로 주어지는 오차들을 존중한다. 물론 오차를 대놓고 허용할 여유는 없다. 미미한 차이나 오차, 그것들이 쌓이고 쌓일 때 어떤 철학적 사유의 결정체로 부상한다. 무슨 전생의 업보일까. 붓으로 직선을 긋는 것이 이경해 작가에게는 평생의 업으로 수행된다. 그나마 요사이는 유리판 위의 안료 적층을 곧은 띠로 커팅해내는 데 몰두하고 있어 좀 수월해졌나 싶었다. 하지만 켜낸 띠를 캔버스 표면에 붙이고, 트랙
문화일보 | 2026-07-21 11:24 -
바람 앞 낙화에 대한 카오스적 사유
월드컵 대회에서 아틀라스 로봇이 심판에게 공을 건네는 퍼포먼스가 인상적이었다. 앞으로 심판을 볼 날도 머지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인공지능(AI)이 장착된 휴머노이드 로봇이 그림인들 못 그릴까 싶다. 그 탁월한 학습능력과 수행능력을 고려할 때 결과가 궁금하면서도 두렵기까지 하다. 솔직히 생각하고 싶지 않다. 김연옥 작가의 화원에서는 느닷없이 돌풍이 일고 있다. 바람은 그냥 제 갈 길 가는 것으로, 꽃들은 으레 견뎌야 하는 과정일 수도 있다. 생동감 넘치는 역동적 자연의 추상 표현은 원래 작가가 해오던 그대로다. 하지만 예민한 관객으
문화일보 | 2026-07-14 11:23 -
한낱 불꽃인 우리의 삶
시공이 가루처럼 쪼개졌다가도 다시 모이고, 만신창이의 존재를 때마다 일으켜 세워준 시. 세계는 결코 아름답다고만 할 수도 없지만, 그 생명력과 유기적 조화를 관조하며 노래한 시. 일찍이 사춘기 시답잖은 문사의 꿈을 꺾어버린 시.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라는 그 시. 검붉은 소용돌이의 ‘절실한 만남’(위영혜 작)이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는 그 시구의 삽화처럼 쇄도해 온다. 목가적이고 안락한 서정의 심미성을 희구하지만, 세계는 굴곡지고 불안한 모습인 것을 어쩌랴. 하지만 주체에게 끊임없이 엄습해
문화일보 | 2026-07-07 11:28 -
사실적 묘사보다 강렬한… 육안과 심안의 하모니
보통 심안(心眼)이라 하면 육안을 대신하거나 능가하는 제3의 능력을 일컫곤 한다. 하지만 예술에서는 내면 깊은 데서 끌어올린 표현을 의미한다. 관찰력 혹은 눈썰미 같은 분석적 능력과는 별개다. 질적 경험들이 축적됨으로써 나타나는 정서나 무의식, 상상력 등이 직관적·종합적으로 작용하는 역량을 가리킨다. 약관의 신예작가 조수영의 그림들은 육안의 정교한 모델링과 심안의 깊이가 어우러진 세계다. 작가는 콘텐츠에 충실하면서도, 표현 양식이 매우 독특하다. 과학동화 삽화가로도 활동하며 인상적인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화면은 섬세한 감수성과
문화일보 | 2026-06-30 11:02 -
극한의 고통 속에서 발현한 영성
‘미완의 면류관’. 이 작품의 주인공 송번수 작가가 타계했다. 일반인들의 귀에 익은 이름은 아닐지 모르지만, 작품 이미지만큼은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 보는 것만으로도 통증을 느낄 날카로움과 그 그림자의 강렬한 연출. 흔하게 보아온 종교화와는 차원이 다른 영성과 호소력을 가진다. 영화나 그림에서 소품으로만 묘사되는 가시면류관이지만, 크게 클로즈업된 이미지에 많은 것이 함축돼 있다. ‘조롱과 영광’ ‘고통과 구원’이라는 대비가 우리 뇌리를 강타한다. 짙은 그림자에서 강한 섬광이 있었음이 암시된다. 사울을 회심케 한
문화일보 | 2026-06-23 10:53 -
음악의 세계, 그 감동을 그리다
며칠 전 뙤약볕 속에 설악산 산행을 다녀왔다. 대피소에 짐을 내려놓고 대청봉을 향해 두어 시간 더 올라갔다. 그런데 소청에 다다르자 생각지도 못한 천둥과 강풍이 몰아쳐 도망치듯 하산해야 했다. 두 계절이 공존하는 세상이었다. 고형렬 시인의 초현실적인 ‘대청봉 수박밭’에서의 ‘한여름 눈’도 허구가 아니었다. 변덕스러운 산상의 초여름 날씨를 체험한 상황에서 김혜정 화가의 그림은 각별한 공감으로 다가온다. 삽화 같은 간결함과 산뜻함, 아울러 섬세한 전개에 의해 깊은 음악적 조예와 경험을 차분하게 담아내고 있다. 악기 하나하나의 서술도 묘
문화일보 | 2026-06-16 10:58 -
친근한 사물 이미지에 빙의한 미의식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들은 점잖은 시적 삽화 같은 양식으로 사랑받고 있다. ‘이미지의 반역’에서 담배 파이프 하나 그려놓고는 ‘이건 파이프가 아니다’라 한 태연자약이 익살스럽기까지 하다. 허무 개그 같은 맥락이지만, 이미지의 관성과 배후를 흔들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의 초현실주의는 스마트한 데가 있다. 도예가 나유석의 정물 작업을 볼 때, 유사한 컨텍스트가 발견된다. 배(梨) 이미지를 도자로 모델링하고 있는데, 조형의 조건들은 대체로 이미지와 유리되어 있다. 고도로 계산된 의도와 소성 과정의 우연성이 결합된 효과로서의 크랙과 부분적
문화일보 | 2026-06-09 11:05 -
이름 없는 꽃의 잔해를 위한 영가
견달산 산길을 오가다 보면 ‘행복정원’이란 이름의 꽃밭을 만나게 된다. 산중 공터에 익명의 독지가가 화원을 조성한 지 10년도 넘은 듯한데, 해가 갈수록 더 넓어지고 꽃의 종류도 늘어나고 있다. 그 갸륵한 마음씨에 감동받은 동역자가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 지나는 산객들 얼굴마다 행복감으로 가득하다. 꽃의 절정까지는 모종 순간부터 물도 주고 시비에도 정성을 기울인다. 하지만 시들기 시작할 때 바로 없는 것으로서 눈을 돌린다. 바로 이때부터 화가 남여주의 미의식과 감각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천하가 다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이미 추한
문화일보 | 2026-06-02 10:52 -
시간의 흐름이 투영된 칠판
그들의 춘천 정착은 모네의 지베르니행을 떠올리게 했다. 1990년대 초 세계 미술의 중심 뉴욕 화단의 명사가 연고도 없는 곳으로 온 것이다. 그게 엊그제 일 같은데, 얼마 전 남편 김차섭은 고인이 되었고, 부인 김명희만이 내평리 폐교 작업실을 지키고 있다. 자연 귀의와 성찰이라는 순수한 길을 걸어온 것이다. 3년 전, 캠퍼스 같은 작업실에서 보았던 김명희의 ‘차경-여름’을 서울에서 다시 보게 되니 반갑다. 그가 춘천에 정착하면서 일군 시그니처, 곧 ‘칠판 그림’이다. 까끌까끌한 연마제가 섞인 암녹색 표면과 오일파스텔의 궁합이 이상적
문화일보 | 2026-05-26 11:28 -
훈민정음의 휴머니즘을 담다
지금이 전성기인지는 더 두고 봐야겠지만, 다방면의 번영도 따지고 보면 훌륭한 스승 덕 아니겠는가. 불세출의 위인이자 현자인 그가 없었다면 우리의 오늘이 있을까. 세종대왕 탄신일을 ‘스승의날’로 정한 일은 참 잘한 일이다. 인류 최고의 문자를 받고도 흥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무능한 후손인가 말이다. 이렇게 좋은 문자 프로토콜과 체계는 조형적으로도 훌륭한 원천이다. 조각가 국경오는 일찍부터 한글의 원리와 조형성에 매료되어 작업을 해왔다. 특히, 창제 철학에 담긴 휴머니즘을 투영시키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자모를 구성하여 사람 형상을 구
문화일보 | 2026-05-19 11:29 -
하늘에서 조망한 백두의 자락
북한산 백운대는 갈 때마다 장사진이다. 철 난간이 있다 해도 쉽지 않은데, 어떻게들 알고 왔는지 외국인도 엄청나다. 맞은편 인수봉에선 자일에 의지해 암벽을 타는 용사도 많다.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리는 광경 앞에서 자주 생각하곤 한다. 사람은 위험도 아랑곳없이 왜 그렇게 높은 곳을 좋아할까. 날개가 없는 콤플렉스 때문일까. 화가도 하늘에서 땅을 굽어보는 부감(俯瞰)을 선호한다. 화가 백중기도 백두대간을 그릴 때는 대체로 하향 앵글을 채택한다. 겸재의 영향도 크지만, 특히 고산자의 지도에서 영감을 받아서다. 백두의 정기가 어떻게
문화일보 | 2026-05-12 11:22 -
최고의 디톡스 ‘요산요수’
흥분성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은 과다도, 결핍도 문제다. 행복감이나 쾌감이 부족해서 오는 질환도 있지만, 적정 단계를 넘어 중독성을 띠는 것도 심각하다. 디지털 메커니즘도 마찬가지다. 지나치게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중독이 심해지고 있다. 핸드폰 영상을 켜놓지 않으면 잠을 자지 못하는 경우도 한 예다. 우리 생활 곳곳에서 해독작용이 절실해 보인다. 이상권은 최선의 해법이 자연이라고 역설하는 화가다. ‘요산요수(樂山樂水)’는 안식처이자 디톡스(detox)로서의 자연, 거기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의 모습을 독특한 구도와 양식으로 그리고 있다
문화일보 | 2026-04-28 10: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