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기획·고정물

S010202115 박현모의 세종이 펼친 ‘진짜 정치’
81 | 생성일 2018-01-03 10:55
  • <박현모의 세종이 펼친 ‘진짜 정치’>매달 민생문제 경청… 지방수령들 마음 움직인 ‘겸손 리더십’

    <박현모의 세종이 펼친 ‘진짜 정치’>매달 민생문제 경청… 지방수령들 마음 움직인 ‘겸손 리더십’

    ‘기업 CEO의 고객이 사실 소비자가 아니듯, 왕의 고객은 백성이 아니다.’ 이번 주말에 출간될 새 책 ‘세종학 개론’을 탈고하면서 든 생각이다. 세종의 국가경영 전반을 입체적으로 살피고, 인접 학문들(역사학·인물전기·정치학)과 세종학을 비교하면서 세종실록을 다시 읽다 보니, 여름방학이 훌쩍 지나갔다. 이번에 새롭게 발견한 것은 ‘왕의 숨은 고객’이다. 물론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는 말이나 ‘소비자는 왕’이라는 말처럼 겉으로 드러난 고객이 중요하다. 하지만 백성과 소비자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만족시키고 감동시킬 ‘숨은’ 고객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하급 직원과 지방 수령이다. 세종은 발령받고 임지로 떠나는 수령들을 꼭 불러서 만나보곤(引見) 했다. 왕이 아무리 백성에게 도움을 주는 정책을 펼치려 해도, 그 선정 의지를 현지에서 구현하는 사람은 수령들이다. 세종은 즉위 초 변계량이 했던 말, 즉 “백성을 구원하는 요령은 사람됨을 잘 알고 쓰는 데 있다”는 말을 받아들여서 매월 1회가량 수령을 인견했다(총 392회). 그런데 세종이 수령을 만나 그들을 설득하는 방법이 독특했다. 우선 하루에 만

    문화일보 | 2019-08-28 10:57
  • <박현모의 세종이 펼친 ‘진짜 정치’>신하의 말 존중했으나 ‘대의’ 위해선 쇠·돌같이 돌파력 보여

    <박현모의 세종이 펼친 ‘진짜 정치’>신하의 말 존중했으나 ‘대의’ 위해선 쇠·돌같이 돌파력 보여

    “내가 여러 가지 일에서 여러 사람의 의논을 좇지 않고, 대의(大意)를 가지고 강행한 적이 자못 많다.” 흔히 세종은 신하들의 말을 존중해 잘 따른 임금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세종실록’ 속 세종의 모습은 조금 다르다. 그는 신하들의 말을 존중했으나 그저 고분고분하기만 한 임금은 아니었다. 재위 중반에 장수와 재상들이 다 불가하다고 말했지만 그는 토론과 설득을 통해 파저강의 여진족을 토벌했다. 공무원 장기근무제(수령육기제 개혁), 북방 영토경영(양계축성), 관료제의 탄력적 운영(행수법)은 세종 스스로 밝힌 ‘독단 결정’의 예다. 재위 후반부 ‘평양 대성산 떼강도 사건’은 세종의 “쇠와 돌같이 굳건한” 의지와 돌파력을 잘 보여준다. 1447년(세종 29년) 2월, 평양의 감옥에 갇혀 있던 20여 명의 무장한 떼강도가 아전과 관노의 도움을 얻어 집단 탈출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몇 년째 계속되는 흉년으로 먹고살기 힘들어진 백성들이 대성산에 웅거하고 있는 것을, 조정에서 거듭 명령해 체포한 지 1년 만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형조 관리의 보고를 보면 도적 떼의 일부는 도망했거나 탈옥 중에 사망했으며, 붙잡힌 13인

    문화일보 | 2019-08-21 11:16
  • <박현모의 세종이 펼친 ‘진짜 정치’>‘한글창제 목적’ 후대에 전하려… 최만리와 의도 된 ‘찬반논쟁’

    <박현모의 세종이 펼친 ‘진짜 정치’>‘한글창제 목적’ 후대에 전하려… 최만리와 의도 된 ‘찬반논쟁’

    최만리는 과연 설득되었을까? 1444년 2월 20일 세종과 최만리 사이에 벌어진 ‘한글 찬반논쟁’은 세종실록 전체에서 매우 특이한 기록이다. 이날 실록은 최만리 등 집현전 노장파들의 상소로 시작된다. 세종은 경복궁 사정전으로 최만리 등을 불러 그 상소를 읽게 한 다음 대화를 나눴다. 말이 대화이지 왕의 힐책에 가까웠다. 마치 축조심의(逐條審議)를 하듯이 세종은 상소문의 구절구절을 들어 비판했다. 우선 세종은 문자라는 게 왜 만들어지고 사용되는지를 물었다. 중국의 한자나 설총의 이두까지도 모두 백성을 편리하게(便民) 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그는 ‘편민(便民)’이라는 단어를 세 번이나 반복하면서 공부의 목적은 ‘백성들의 삶의 질 향상’에 있음을 역설했다. 명나라에 사대(事大)하는 것 역시 궁극적으로 백성의 생생지락(生生之樂), 즉 모두가 안정되고 즐거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함이라는 게 세종의 주장이었다. 최만리의 대응 역시 만만치 않았다. “군왕이 새롭고 기이한 기예에 빠져 있다고 비난하는 말은 너무 심한 것 아니냐”는 왕의 나무람에 대해서 그는 일단 사과했다. 하지만 그는 곧 설총의 ?

    문화일보 | 2019-08-14 11:01
  • <박현모의 세종이 펼친 ‘진짜 정치’>“팔만대장경 안 주면 침공” 日 협박에도… 국가 간 신뢰 강조한 외교

    <박현모의 세종이 펼친 ‘진짜 정치’>“팔만대장경 안 주면 침공” 日 협박에도… 국가 간 신뢰 강조한 외교

    ‘상상력의 빈곤.’ 영화 ‘나랏말싸미’를 본 후 든 소감이다. 창작물인 영화를 두고 역사 왜곡이니 세종 폄훼니 비판하는 자체가 난센스다. 따라서 온전히 역사적 상상력 자체에 집중해서 봤다. 결과는 실망 그 자체다. 한글 창제에 대한 해석이나 배우의 연기 문제가 아니다. 그 많은 인력과 예산을 들여 고작 그 정도에 그쳤다는 게 못내 아쉬웠다. 영화감독이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흉내를 낸 것이 첫 번째 실패 이유다. 어차피 새로울 것 없는 세종과 한글 창제에 관한 것이니, 지난번 영화 ‘사도’처럼, 제작팀이 열심히 공부해서 각색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한 듯했다. 그러다 보니 영화의 첫 장면부터 익숙한, 전혀 새롭지 않은 스토리들이 자주 등장했다. SBS 사극 ‘뿌리깊은 나무’의 불교 버전을 보는 듯도 했다. 특정 종교의 관점이 투영된 것은 아무래도 괜찮았다. 두 번째 실패 이유인 빈곤한 상상력이 문제였다. 영화 ‘신과 함께’는 다분히 특정 종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도 종교영화라고 시비 걸지 않는다. 종교 시비를 훨씬 뛰어넘는 문학적 상상력이 있기 때문이다. 대안은 분명히 있었다. 감독이 만약 세종처

    문화일보 | 2019-08-07 11:08
  • <박현모의 세종이 펼친 ‘진짜 정치’>소헌왕후가 ‘역적’이 된 친정어머니 만날 수 있도록 신하들 설득

    <박현모의 세종이 펼친 ‘진짜 정치’>소헌왕후가 ‘역적’이 된 친정어머니 만날 수 있도록 신하들 설득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화롭게 만드는 것이 물론 큰일이다. 하지만 집안 다스리는 일이 제일 어렵다(齊家最難).” 가정경영이 제일 어렵다는 세종의 이 어록만큼 사람들에게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 말은 없는 듯하다. 남녀와 세대를 떠나 심지어 청소년들까지도 가족 간 화합이 어렵다는 데 깊이 공감했다. 이 점에서 더욱 궁금해지는 것이 세종의 가정경영이다. 세종은 어떻게 후궁을 8명이나 뒀으면서도 가정불화 없이 평생 아내의 존경을 받으며 지낼 수 있었을까? 그 일차적인 이유는 왕비인 소헌왕후의 인품이다. 세종에 따르면 그녀는 “남편을 의심하거나 후궁들에 대해 투기하지 않았다(無所疑忌)”고 한다. 심지어 “후궁 중에 왕이 총애하는 이가 있으면 더욱 융성한 대우를 해주었다”고 한다. 소헌왕후의 초인적인 “자기 절제력(自飭)”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다. 세종의 아내 사랑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진심으로 아내를 칭찬하고 감사했을 뿐만 아니라 늘 세심히 배려했다. 음악공연은 세종이 아내를 기쁘게 하기 위해 자주 준비한 선물이었다. 1443년(세종 25) 3월 세종은 왕비와 함께 온양 온천으로 가는 길에 ?

    문화일보 | 2019-07-31 11:02
  • <박현모의 세종이 펼친 ‘진짜 정치’>소헌왕후 정신적 外傷 극복 비결은, 외조부 큰 사랑·남편 세종 신뢰

    <박현모의 세종이 펼친 ‘진짜 정치’>소헌왕후 정신적 外傷 극복 비결은, 외조부 큰 사랑·남편 세종 신뢰

    “소헌왕후는 어떻게 그렇게 부드러우면서도 결단력 있는 리더십을 갖게 됐나요?” 여주에 있는 ‘진달래길’, 즉 세종영릉 근처에 있는 진달래 숲길을 걸을 때 어느 분이 한 질문이다. 세종과 소헌왕후의 합장릉이 여주로 옮기게 된 과정과 조선왕조에서 왕비의 위상과 역할, 그리고 지난주 칼럼에 쓴 도성 대화재사건 때 소헌왕후가 발휘한 리더십 사례는 이곳 답사 코스에서 꼭 들려드리는 이야기다. 이런 질문, 즉 어떻게 그런 인물이 됐느냐는 물음은 대답하기가 녹록지 않다. 결과로 나타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야 하고, 현상의 이면까지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조선왕조실록과 ‘열성후비지문’ 등 관련 자료를 샅샅이 살펴봤다. 그 결과 소헌왕후는 결코 평탄하지 않은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남편 세종이 왕위에 오른 후 두 달간의 짧은 영화(榮華)를 누렸지만, 곧바로 친정 가문이 풍비박산되는 아픔을 겪었다. 왕비가 된 지 4개월째인 1418년 12월에 친정아버지 심온이 ‘강상인 옥사’에 연루돼 죄인으로 사망했고, 친정어머니 안씨는 천인으로 전락했다. 자신도 자칫 폐비(廢妃), 즉 왕비 자

    문화일보 | 2019-07-24 11:04
  • <박현모의 세종이 펼친 ‘진짜 정치’>도성 화재때 위기 극복·민심 수습… 세종의 최고 조력자 소헌왕후

    <박현모의 세종이 펼친 ‘진짜 정치’>도성 화재때 위기 극복·민심 수습… 세종의 최고 조력자 소헌왕후

    “세종이 진정으로 은애(恩愛)한 여인은 누구였나요?” 조선왕조에서 후궁을 제일 많이 둔 왕이 누구인지 묻는 분이 종종 있다. 세종을 염두에 두고 묻는 그분들에게 나는 조선왕조실록을 근거로 ‘그렇지 않다’고 말씀드리곤 한다. 후궁을 가장 많이 둔 왕은 연산군이고(14명), 그다음이 성종이다(11명). 세종은 8명의 후궁을 두어 숙종과 함께 공동 5위다. 세종의 사랑을 받은 여인으로 먼저 떠오른 이는 신빈 김씨이다. 그녀는 궁궐의 여종 출신으로 세종의 눈에 띄어 6남 2녀를 낳고 정1품의 품계까지 받은 ‘세종시대의 신데렐라’다. 그런데 세종에게서 사랑은 물론 존경까지 받은 여인은 소헌왕후 심씨이다. 그녀는 1408년(태종8)에 두 살 연하의 세종과 혼인한 후, 남편으로부터 “품성이 덕스럽고 부드러우며, 아름답다(德柔嘉)”는 자랑을 들으며 살았다. “마음가짐이 깊고 고요한(宅心淵靜)” 여성이며 “스스로 마음을 통제할 수 있는(自飭)” 분이라고 칭찬받기도 했다. 정인지가 쓴 ‘영릉지(英陵誌)’를 보면 세종은 “왕비가 들어오거나 나갈 때면 반드시 일어서서 맞이하고 배웅했다(後之進退 殿下必起立)”고 한다. 세종은

    문화일보 | 2019-07-17 11:09
  • <박현모의 세종이 펼친 ‘진짜 정치’>“세상 모든 것, 백성의 눈과 귀 통해야”… 현장 민심 정책에 반영

    <박현모의 세종이 펼친 ‘진짜 정치’>“세상 모든 것, 백성의 눈과 귀 통해야”… 현장 민심 정책에 반영

    “우리라고 시민들이 원하는 것을 왜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문화재 위원들이 결정하면 우린 따를 수밖에 없어요.” 며칠 전 세종영릉을 함께 걸었던 문화재청 직원의 얘기다. 문화재 복원에 관한 필자의 칼럼을 읽었는데, 문화재 심의 회의의 분위기는 시민들의 바람과는 아주 딴판이라고 말했다. 광화문만 해도 현장에서는 ‘현판을 한글로 바꿔서 세종정신과 한글을 빛내자’는 여론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문화재 위원들이 모인 곳에서 그런 말을 꺼내면 ‘문화재 복원의 개념조차 없는 사람’으로 몰리기 십상이라고 했다. 세종영릉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현재 ‘문화재의 보호와 진정성 회복’을 이유로 능침탐방로를 철거하고 있는데, 전국 각지에서 세종을 찾아온 분들의 항의가 만만치가 않다고 했다. 무인석 등 문화재의 훼손이 우려된다면 경로를 약간만 수정하면 될 터인데, 아예 탐방로를 없애버리는 게 말이 되느냐는 항의였다. 울산에서 오셨다는 한 선생님은 가운데가 텅 빈 풀밭을 오른편에 끼고 멀리 능침을 바라보며 걸었던 몇 해 전의 기억을 말씀하셨다. 삼가는 마음으로 능침 앞에 서서 아이들에게 세종 이야기를 들려주려 했는

    문화일보 | 2019-07-10 10:59
  • <박현모의 세종이 펼친 ‘진짜 정치’>취지는 살리되 시대 맞게 만들어 가야 한다… ‘열린 국가경영’

    <박현모의 세종이 펼친 ‘진짜 정치’>취지는 살리되 시대 맞게 만들어 가야 한다… ‘열린 국가경영’

    “우리가 중시한 것은 그 문화재의 역사적 가치와 성지(聖地)로서의 존엄성, 그리고 철저한 기록이었지요.” 1997년 9월에 붕괴된 이탈리아의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의 보존·복원업무를 담당한 세르지오 푸세티의 말이다. 지진으로 천장이 붕괴되면서 매몰된 5명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이기도 한 그에 따르면 성당 건물의 ‘역사적 가치’를 보존하면서도 ‘성지로서 존엄성’을 살려내는 일이 제일 어려웠다고 한다. 그 지역 가톨릭 교구장과 문화재 전문 감독관(soprintendente), 그리고 문화유산안전청(MIBAC) 담당관들로 구성된 복원위원회는 1998년부터 2002년까지 5년간 활동했다. 그런데 위원들 사이의 의견 대립, 즉 ‘문화유산은 원래의 모습대로 보존돼야 한다’는 역사적 가치 보존론과 성당은 사람들이 배우고 기도하며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어야 한다는 성지의미론 사이의 대립이 워낙 커서 때론 중앙정부의 ‘조정(intervention)’이 필요할 정도였다. 무엇보다 복원의 전 과정을 기록해 책자로 발간한 일도 보람 있는 일이었다고 했다. ‘보존론’과 ‘의미론’의 논쟁은 남의 나라 일이 아니다. 예컨대 광화문 현판은 1865년 고종

    문화일보 | 2019-07-03 11:07
  • <박현모의 세종이 펼친 ‘진짜 정치’>하늘의 이치 꿰뚫는 고전 독서력… 中황제도 설득할 수 있는 힘

    <박현모의 세종이 펼친 ‘진짜 정치’>하늘의 이치 꿰뚫는 고전 독서력… 中황제도 설득할 수 있는 힘

    “청와대 경호실에서 22층 건물을 17층으로 자르라고 합니다. … 저는 이 나라와 각하, 그리고 법의 권위를 위해서도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저희가 합법적으로 쌓은 사옥을 자르라면 건물을 자르는 대신 죽을 각오로 부당함에 맞서겠습니다.” 1979년 봄 광화문 교보빌딩이 완공될 즈음, 교보생명 설립자 신용호 회장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다. ‘경호’를 이유로 다 지어진 건물의 층고를 낮추라는 청와대 경호실의 고위 간부의 압력에 대해 신 회장은 “옛 선비들이 죽을 각오를 하고 임금에게 상소문을 올렸던 심정으로” 위의 편지를 썼다고 한다. 신 회장의 편지를 보면서 나는 엉뚱하게도 세종 때 편찬된 책 ‘삼강행실도’를 떠올렸다. 효자·충신·열녀 사례 105개를 엮은 이 책의 대다수가 윗사람의 잘못된 판단이나 결정을 간언(諫言)으로 바로잡은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삼강행실도’의 첫 번째가 효자 민손의 사례인데, 민손은 자기를 미워하고 차별 대우한 새어머니를 내쫓지 말아 달라고, 이 엄동설한에 쫓겨나면 새어머니와 배다른 동생들이 얼어 죽을 것이니 부디 아버지께서 생각을 바꿔 주시라고 간언했

    문화일보 | 2019-06-26 11:08
  • <박현모의 세종이 펼친 ‘진짜 정치’>새로운 조선에 맞는 새로운 인간형 만드는 게 변화의 목표였다

    <박현모의 세종이 펼친 ‘진짜 정치’>새로운 조선에 맞는 새로운 인간형 만드는 게 변화의 목표였다

    “전통이란 눈에 보이는 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꼴을 지탱하는 정신이다. 그 정신을 건져 올려 현대 건축에 살려내는 게 참된 의미의 전통 계승이다.” 콘크리트로 에워싼 간결한 공간에 빛과 그림자로 ‘비움의 아름다움’을 형상화한 건축기법이 혹시 일본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냐는 질문에 대한 안도 다다오(安藤忠雄)의 대답이다. ‘일본’을 표현하려는 의도도 없었고, 오히려 자신은 일본 전통의 목조건축과는 거리가 먼 콘크리트 건물을 짓고 있다고 말했다. 콘크리트를 고집하는 이유는 “그것이 내 창조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도전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시멘트, 물, 자갈, 철근만 있으면 어디서든 자유로운 꼴을 빚어낼 수 있는 게 콘크리트 건물인데 그것이 자기 생각, 즉 일본에서 나고 자라면서 몸에 밴 감성과 젊은 시절 세계 여행을 하면서 생겨난 안목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道)일 뿐이라고 했다. 다음 주 월요일(6. 24) 건국대에서 열리는 세계한국학대회 세종세션에서 발표될 논문들을 읽는 내내 떠오른 사람이 건축가 안도 다다오였다. 그는 교토(京都) 등지 고건축의 어느 부분을 되살려내려는 생각 ?

    문화일보 | 2019-06-19 10:43
  • <박현모의 세종이 펼친 ‘진짜 정치’>“단 한 뼘의 땅도 포기 못한다”… 백두산 전역을 우리 영토로

    <박현모의 세종이 펼친 ‘진짜 정치’>“단 한 뼘의 땅도 포기 못한다”… 백두산 전역을 우리 영토로

    “역사를 공부할 때 중심좌표 세우는 게 왜 필요한가요?” 이달 말에 있을 세계한국학대회 세종세션을 기획할 때 어느 분이 던진 질문이다. ‘한국학의 랜드마크, 세종학의 위상과 비전’이라는 대주제를 정하려는 우리에게 그분은 어느 시기든 당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땀과 눈물 그리고 피로 채워지지 않은 곳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이탈리아의 역사에 대해서 말씀드렸다. 제1, 2차 대전 때 이탈리아는 전쟁 도발국으로 가담했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연합국 쪽으로 전향하거나 패전국이 되는 불명예를 안았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이탈리아에서 배울 게 있다고 보는 것은 고대 로마의 역사 때문이다. 중국의 역사는 또 어떤가? 청나라 말기 아편전쟁 패배로부터 만주국에 이르기까지, 중국 역사는 국공내전 등 지리멸렬함으로 점철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중국의 역사 하면 당태종의 ‘정관의 치(治)’를 떠올리고, 강희·옹정·건륭제의 치세를 이야기한다. 이번에 발표될 강희제 논문에서 보듯이, 그리고 미국의 에이브러햄 링컨 논문에서 밝혀지듯이 탁월한 지도자가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과 성취는 ?

    문화일보 | 2019-06-12 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