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기획·고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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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치기
그것을 뭐라 부르든, 곡물을 가늘고 길게 뽑아 만든 음식을 먹을 때는 요령이 필요하다. 우리가 국수라고 부르는 것은 대개 긴 면발이 국물 속에 잠겨 있어 젓가락으로 건져내듯 해서 먹어야 한다. 국수의 길이를 사람의 명줄로 여기기도 하니 웬만하면 국수 가닥을 끊지 말고 먹어야 한다. 이렇게 먹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후루룩 소리가 날 수밖에 없다. 입을 최대한 벌려 면을 ‘흡입’하듯이 먹으면 더 큰 소리가 나는데 이 모든 방식을 우리는 면치기라 한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스파게티라 부르는 것은 국물이 거의 없어 접시에 담겨 식탁에 오른다
문화일보 | 2025-05-16 11:31 -
겉바속촉
욕하면서 닮아 가는 것은 우리가 쓰는 말에서도 통한다. 바른말을 사랑하는 이들이 가장 많이 지적하는 말이 줄임말인데 은연중에 그들도 ‘오염’돼서 쓴다. ‘집밥’에서 출발한 ‘혼밥’이 그렇고 이혼한 남녀를 가리키는 정말 이상한 구성인 ‘돌싱’도 그렇다. 여기에 어법상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겉바속촉’이 추가된다. 튀김이나 구이 음식을 먹을 때 겉은 아삭해서 씹을 때 바사삭 소리가 나야 하고 속은 촉촉하고 부드러워야 한다는 뜻이다. 불을 이용해 음식을 조리하는 첫 번째 목적은 익히는 것이다. 그런데 익히는 방법이 무척이나 다양해
문화일보 | 2025-05-09 11:41 -
낚시
‘요즘 낚시, 이것 없이 하는 것이 대세.’ 최근에 ‘이것’이 안 돼 있지만 ‘이것’을 많이 쓰는 기사의 제목을 흉내 내자면 이리 쓸 수 있겠다. 기사의 제목이라면 내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써야 하니 제목에 ‘이것’을 쓰는 것은 금물이다. 하지만 ‘기본’이 안 돼 있는 기자가 인터넷상에서 조회 수를 올리기 위해 제목에 ‘이것’을 쓰고 본문을 읽도록 유도하는 사례가 많다. 그렇다면 첫 문장의 ‘이것’은 무엇일까? 당연히 ‘낚시’일 텐데 그러면 ‘낚시 없는 낚시’라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된다. ‘낚시’는 본래 ‘물고기를 잡는
문화일보 | 2025-05-02 11:53 -
도넛, 도너츠, 그리고 도나쓰
밀가루 반죽을 기름에 튀겨 낸 뒤 설탕이나 시럽을 듬뿍 발라 먹는 이 음식, 그런데 이 땅에서는 이름이 셋이다. 바른 국어 생활을 하는 이들이라면 ‘도넛’을 먹는다. 그러나 미국계 기업이지만 미국 다음으로 많은 이 땅의 매장에서는 ‘도너츠’를 먹는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경험했거나 그 직후를 산 사람들은 아직도 시장통에서 오래된 기름에 진한 갈색으로 튀겨진 것을 하얀 설탕 범벅으로 가린 ‘도나쓰’를 먹는다. 이 음식의 이름은 밀가루 반죽을 가리키는 ‘dough’와 견과류를 뜻하는 ‘nuts’가 결합된 ‘doughnut’이다. ‘do
문화일보 | 2025-04-25 11:37 -
안주일체
‘일체’는 우리말에서 삼위일체를 이룬다. 장자가 말한 물아일체(物我一體)와 기독교에서의 삼위일체(三位一體), 그리고 포장마차나 허름한 선술집 벽의 안주일체(按酒一切)가 그것이다. 물론 한글로 쓰면 모두 ‘일체’가 포함되어 있지만 안주와 결합한 것은 한자가 다르니 이 셋은 삼위일체를 이룰 수 없다. 아니 때로는 술동무인 ‘일체’가 ‘일절’로 탈바꿈하기도 하니 더더욱 셋을 같은 자리에 놓을 수 없다. 일체(一體)는 ‘한 몸’이란 뜻이고, 일체(一切)는 ‘모두’란 뜻이니 전혀 다른 말이다. 장자와 성경에서의 일체는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
문화일보 | 2025-04-18 11:40 -
밥도둑과 밥경찰
앞에 가는 사람 도둑놈, 뒤에 가는 사람 순경. 어릴 적 달리기를 하다가 친구에게 뒤떨어지면 이런 말로 정신 승리를 하곤 했다. 도둑을 잡는 것이 순경이니 달리기는 못하지만 앞선 사람은 나쁜 사람, 뒤처진 사람은 좋은 사람이 되는 셈이다. 이처럼 도둑은 늘 나쁜 것으로 여겨지지만 딱 하나 예외가 있다. ‘밥도둑’이 그것인데 말 자체로는 밥을 훔쳐가는 도둑이란 뜻이지만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울 정도로 맛이 있어 마치 밥을 훔쳐가는 도둑 같다는 뜻이다. 도둑이 판을 치면 경찰이 나서야 하니 ‘밥경찰’이란 말도 쓰인다. 밥상에서는 밥도
문화일보 | 2025-04-11 11:44 -
단무지
바야흐로 단무지의 시대다. 중국집에 없어서는 안 될 노랗고 아삭거리는, 한때 일본말에서 받아들인 ‘다꾸앙’ 또는 ‘다꽝’으로 더 많이 불렸던 음식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단순 무식하면서도 ‘지랄’을 일삼는 이들을 꼬집는 말이다. 요즘은 ‘뇌전증’으로 표현하는 간질병을 가진 이들이 증세가 도졌을 때를 가리키는 말이니 웬만해서는 쓰지 않는 것이 좋은 말이다. 그러나 단순 무식한 이들의 발호가 너무도 심한 상황이니 이런 줄임말까지 떠돈다. 단무지의 본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음식은 일본에서 유래했다. 가늘고 긴 무를 쌀겨와 소금에 절여 만든 것이 이 땅에 전해진 뒤 새콤달콤한
문화일보 | 2025-04-04 11:56 -
폭삭 삭았수다
제주의 요망진 반항아와 팔불출 무쇠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드라마가 국내외의 전파가(電波價)를 올리고 있다. 유채밭에서 찍은 주인공의 화사한 얼굴을 보면 전혀 ‘삭지’ 않았으니 제목에 절대 ‘속으면’ 안 된다. ‘폭싹 속았수다’가 ‘매우 수고하셨습니다’란 뜻이라니 드라마를 둘러싼 모든 이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보면 된다. 그래도 제주말의 이 표현은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하다. 정확한 제주말로는 ‘폭삭 속앗수다’인데 이 말은 수고했다는 뜻이기도 하고 오랜만에 만난 사람과의 인사로도 쓰인다. 이런 쓰임을 모르는 외지 사람들에게는 ‘고생해서 얼굴이 폭삭 삭았다’는
문화일보 | 2025-03-28 11:42 -
초네따이와 장아찌
제주도의 시골에는 ‘초네따이’가 산다. 제주어를 낯설어하는 사람이 많지만 언어 감각을 발휘해 보면 ‘촌엣아이’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촌(村), 곧 시골에 사는 아이라는 말인데 이런 조어가 가능할까 싶지만 ‘눈엣가시’를 생각하면 안 될 것도 없다. 그런데 표준 발음대로 하자면 ‘초네다이’가 되어야 하니 단어의 구성을 알아도 좀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에 짝을 맞춘 ‘시엣아이’, 제주말로는 ‘시에따이’도 있으니 제주말의 특성이 잘 드러난다. 제주말에서 말이 합쳐질 때 앞 단어의 받침이 복사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아이’가 ‘똘(딸)’과 합쳐지면 ‘똘아이’가 아닌 ‘똘라이
문화일보 | 2025-03-21 11:37 -
식은 맥주
우리의 맥주 광고를 살펴보면 거의 예외 없이 맥주를 담은 병이나 잔에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다. 이는 맥주의 낮은 온도 때문에 공기 중의 수증기가 응결된 것이니 이를 보면 누구나 차고 시원한 맥주를 떠올리게 된다. 녹아든 이산화탄소의 톡 쏘는 맛은 물론 차가운 온도가 느끼게 해 주는 시원한 맥주를 즐기는 우리로서는 당연하게 보이는 장면이기도 하다. 여기 냉장고에서 나와 술꾼의 손길을 기다리다 지친 맥주가 있다. 시간이 지나며 응결된 물방울이 다 말라버렸고 맥주의 온도는 주변의 온도와 같아져 버렸다. 이런 상태의 맥주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우리는 무심결에 이러한 맥주를 식
문화일보 | 2025-03-14 11:31 -
실밥, 톱밥, 대팻밥
바느질을 하면 천의 바깥으로 드러나는 부분이 생기는데 이렇게 드러난 부분을 부르는 말은? 바느질한 것을 뜯으면 실이 잘게 잘리는데 이것을 부르는 말은? 정답은 모두 ‘실밥’인데 이 단어는 아무래도 ‘실’과 ‘밥’이 결합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 ‘밥’은 어떤 뜻이며 어디에서 온 것일까? 당연히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우리가 먹는 밥이다. 두 종류의 실밥 모두 짧고 가는 모습인 데다가 흰색 실이 가장 많으니 실밥을 두고 우리가 먹는 밥을 떠올리는 것은 당연하다. ‘톱밥’을 생각해 보면 이러한 연상은 더 강화된다. 톱질을 하면 자디잔 나무 부스러기가 나오는데 이 톱밥
문화일보 | 2025-03-07 11:39 -
식혜와 식해
국립 한글박물관에 전시된 해주 특산 백자 단지를 보면 ‘시케단지’라는 한글이 선명하게 보인다. 청화를 그리던 화공은 그림 실력뿐만 아니라 한글 실력도 자랑하고 싶었을까? 단지의 용도는 쓰는 사람 마음인데 굳이 힘찬 필체로 글씨도 남겨놓았다. 그런데 오늘날의 맞춤법에 맞게 쓴다면 ‘식혜(食醯)’일까 아니면 ‘식해(食해)’일까? 요즘 사람들의 발음에 따르면 ‘시케’는 이 둘 모두에 해당할 수 있으니 화공은 무심결에 백자의 그림과 함께 말소리의 변화에 대한 재미있는 화두를 던진 셈이다. 두 한자가 아주 비슷해 보이지만 전자는 엿기름으로 밥알을 발효시켜 만드니 식초와 유사하고 한자도
문화일보 | 2025-02-28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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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치기
그것을 뭐라 부르든, 곡물을 가늘고 길게 뽑아 만든 음식을 먹을 때는 요령이 필요하다. 우리가 국수라고 부르는 것은 대개 긴 면발이 국물 속에 잠겨 있어 젓가락으로 건져내듯 해서 먹어야 한다. 국수의 길이를 사람의 명줄로 여기기도 하니 웬만하면 국수 가닥을 끊지 말고 먹어야 한다. 이렇게 먹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후루룩 소리가 날 수밖에 없다. 입을 최대한 벌려 면을 ‘흡입’하듯이 먹으면 더 큰 소리가 나는데 이 모든 방식을 우리는 면치기라 한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스파게티라 부르는 것은 국물이 거의 없어 접시에 담겨 식탁에 오른다
문화일보 | 2025-05-16 11:31 -
겉바속촉
욕하면서 닮아 가는 것은 우리가 쓰는 말에서도 통한다. 바른말을 사랑하는 이들이 가장 많이 지적하는 말이 줄임말인데 은연중에 그들도 ‘오염’돼서 쓴다. ‘집밥’에서 출발한 ‘혼밥’이 그렇고 이혼한 남녀를 가리키는 정말 이상한 구성인 ‘돌싱’도 그렇다. 여기에 어법상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겉바속촉’이 추가된다. 튀김이나 구이 음식을 먹을 때 겉은 아삭해서 씹을 때 바사삭 소리가 나야 하고 속은 촉촉하고 부드러워야 한다는 뜻이다. 불을 이용해 음식을 조리하는 첫 번째 목적은 익히는 것이다. 그런데 익히는 방법이 무척이나 다양해
문화일보 | 2025-05-09 11:41 -
낚시
‘요즘 낚시, 이것 없이 하는 것이 대세.’ 최근에 ‘이것’이 안 돼 있지만 ‘이것’을 많이 쓰는 기사의 제목을 흉내 내자면 이리 쓸 수 있겠다. 기사의 제목이라면 내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써야 하니 제목에 ‘이것’을 쓰는 것은 금물이다. 하지만 ‘기본’이 안 돼 있는 기자가 인터넷상에서 조회 수를 올리기 위해 제목에 ‘이것’을 쓰고 본문을 읽도록 유도하는 사례가 많다. 그렇다면 첫 문장의 ‘이것’은 무엇일까? 당연히 ‘낚시’일 텐데 그러면 ‘낚시 없는 낚시’라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된다. ‘낚시’는 본래 ‘물고기를 잡는
문화일보 | 2025-05-02 11:53 -
도넛, 도너츠, 그리고 도나쓰
밀가루 반죽을 기름에 튀겨 낸 뒤 설탕이나 시럽을 듬뿍 발라 먹는 이 음식, 그런데 이 땅에서는 이름이 셋이다. 바른 국어 생활을 하는 이들이라면 ‘도넛’을 먹는다. 그러나 미국계 기업이지만 미국 다음으로 많은 이 땅의 매장에서는 ‘도너츠’를 먹는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경험했거나 그 직후를 산 사람들은 아직도 시장통에서 오래된 기름에 진한 갈색으로 튀겨진 것을 하얀 설탕 범벅으로 가린 ‘도나쓰’를 먹는다. 이 음식의 이름은 밀가루 반죽을 가리키는 ‘dough’와 견과류를 뜻하는 ‘nuts’가 결합된 ‘doughnut’이다. ‘do
문화일보 | 2025-04-25 11:37 -
안주일체
‘일체’는 우리말에서 삼위일체를 이룬다. 장자가 말한 물아일체(物我一體)와 기독교에서의 삼위일체(三位一體), 그리고 포장마차나 허름한 선술집 벽의 안주일체(按酒一切)가 그것이다. 물론 한글로 쓰면 모두 ‘일체’가 포함되어 있지만 안주와 결합한 것은 한자가 다르니 이 셋은 삼위일체를 이룰 수 없다. 아니 때로는 술동무인 ‘일체’가 ‘일절’로 탈바꿈하기도 하니 더더욱 셋을 같은 자리에 놓을 수 없다. 일체(一體)는 ‘한 몸’이란 뜻이고, 일체(一切)는 ‘모두’란 뜻이니 전혀 다른 말이다. 장자와 성경에서의 일체는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
문화일보 | 2025-04-18 1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