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기획·고정물

S010202337 유희경의 시:선(詩:選)
198 | 생성일 2021-06-16 11:21
  • 달리기[유희경의 시:선(詩:選)]

    달리기

    토마토가 붉어가는 속도로 너는 늙고 있다// 다변은 대답이 아니라는 걸 알 때쯤/ 멀리 온 것이다// 푸른 채 저절로 붉어지는 토마토// 누구나 시대의 식민지가 되고 싶지 않아/ 붉은 색은 저절로 왔겠니// 유머는 간결할수록 힘이 있는 거 알아 - 이규리, ‘농담’(시집 ‘우리는 왜 그토록 많은 연인이 필요했을까’) 퇴근해서 집에 오면 한밤이다. 운영하는 서점 문을 늦도록 열기 때문이다. 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 미련이라면, 피곤한 몸으로 생산적인 일을 더 해보려는 것 또한 미련함이다. 다 포기하고 눕거나 앉아서 잘 때까지

    문화일보 | 2025-06-18 11:35
  • 장미의 이름[유희경의 시:선(詩:選)]

    장미의 이름

    ‘꽃잎마다/ 심연에 도착했던 부분이 있다네/ 꽃잎마다/ 지상으로 심연을 이끌고 온 색깔이 있다네// 나의 어떤 부분은 고요.’ - 송재학 ‘꽃잎마다 너라는 잔상’(시집 ‘습이거나 스페인’) 여름 장미가 화사한 요즘이다. 덩굴 앞에는 어김없이 한두 사람이 서 있고 사진을 찍느라 바쁘다. “이제 꽃 사진을 찍어도 민망하지 않은 나이가 되었어.” 한 선배의 자조 섞인 농담이 떠올라 웃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수상하다는 듯 힐끔거린다. 걸음이 바빠진다. 어릴 적 장미란 겹겹 꽃잎 속 풍뎅이를 숨겨놓은 꽃. 줄기서 자라난 가시를

    문화일보 | 2025-06-11 11:40
  • 심심하다[유희경의 시:선(詩:選)]

    심심하다

    ‘심심하다는 말, 외롭다는 뜻이었군/ 외로움을 호소하진 못하고/ 심심해서 죽겠네/ 그런 거였군/ 심심해서 죽겠는 걸/ 사람으로 놀이로 달래다가/ 그도 여의치 않아/ 정말 심심해지니까/ 심심하지 않네/ 오늘은 뻐꾸기가 우는데/ 내 맘이 산도 되고 들도 되고/ 쾌청한가 하면 울적하여/ 저마다 울림이 있네.’ - 손택수 ‘심심하다는 말’(시집 ‘눈물이 움직인다’) 한 사과문의 ‘심심(甚深深)한 사과’라는 표현으로 떠들썩했던 일이 있었다. 정확히는, 그 표현이 아니라 이를 오해해 비난한 댓글이 다수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심심하다’를 ‘지

    문화일보 | 2025-06-04 11:36
  • 함께 살기[유희경의 시:선(詩:選)]

    함께 살기

    ‘내 집 오는 골목에는 쌀과 콩이 새벽마다 흩어져 있다/ 정오까지 새들이 머무를 만큼/ 많이// 「누가 자꾸 새에게 먹이를 주는 거냐/ 그러지 마라」// 경고문 주변에/ 새똥이 가득하다// 비둘기와/ 나// 무덤을 만들지 않는 종과/ 무덤을 업고 다니는 종.’ - 김복희 ‘종의 차이’(시집 ‘보조 영혼’) 서점 앞 널찍한 보도에는 비둘기가 제법 많다. 너무 익숙한지라 보도블록에 그려진 무늬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따금, 장난꾸러기 몇이 와락 달려들면 푸드덕 날아가고 그게 싫어 비명을 지르는 사람도 있고 그제야 나는 비둘기도 새라는 사

    문화일보 | 2025-05-28 11:44
  • 복권을 샀다[유희경의 시:선(詩:選)]

    복권을 샀다

    ‘영원히 살고 싶은 계절을 고르라면/ 여름과 겨울 중 어떤 게 좋을까/ 돌아오지 않을 휴양지로 산과 바다는?/ 삶의 굴레에서 인간의 다음 차례로/ 개 혹은 고양이로 태어나야 한다면// 갈림길의 저편에서 미심쩍은 행색의 행려자가/ 한 손에는 언뜻 공평해 보이는 저울을/ 한 손에는 겁 주기용 칼을 들고 다가와/ 반드시 어느 한쪽을 고르시오/ 공갈을 놓는다면’ - 조온윤 ‘균형 감각’(시집 ‘자꾸만 꿈만 꾸자’) 식사를 하러 가는 길에 복권판매점이 눈에 띄었다. 막 걸린 것이 분명한 간판에선 광이 난다. 투명할 정도로 깨끗이 닦인 창문

    문화일보 | 2025-05-21 11:36
  • 집밥과 외식[유희경의 시:선(詩:選)]

    집밥과 외식

    ‘특별한 이상이 발견되지 않는 병이 도질 때마다/ 밥이 약이다, 가만히 차려 내온 고봉밥이/ 한 생이 공들여 지은/ 집과 밥,/ 찬란하고 융숭한 유산인 걸 몰라서// 그놈의 밥, 사육당하는 거 같잖아! 밥상 엎고 집 나온 후 가장 자주 듣는 말// 밥 빌어먹고 살겠니?’ - 서귀옥 ‘집밥’(시집 ‘우주를 따돌릴 것처럼 혼잣말’) 식당이 지천인데 먹을 게 없다. 먹고 싶은 게 없다. 점심시간이 되면 겁이 다 날 지경이다. 오늘 점심엔 무얼 먹나. 아니, 어떻게 때우나. 일단 나가자. 이 메뉴는 어제 먹은 것이고, 이 식당은 너무 자주

    문화일보 | 2025-05-14 11:52
  • 미술가 故 강서경을 기리며[유희경의 시:선(詩:選)]

    미술가 故 강서경을 기리며

    ‘우리는 서로 다른 방향을 보고 있지만/ 꿈인가 싶게 서로를 안다./ 슬픔은 사라지지 않지만 겨울의 일일 뿐이다./ 곳골은 여름을 살고 우리는 여름 안에 있다./ 그림자가 포개어진다. 지금이 여름 아니어도/ 포개어진 그림자가 몸을 섞어 커다란 새의 모양./ 좁은 초원에 곳고리 산다. 보지 못했지만 우리는 안다.’ - 유희경 ‘좁은 초원’(강서경 展 ‘버들, 북, 꾀꼬리’에서) 부고를 받았다. 죽음은 늘 믿기 어렵다. 멀게만 느껴질 뿐 짐작도 되지 않는다. 그러니 별안간 쏟아지는 눈물은 설명되지 않는다. 내내 울다가 장례식장으로 향했

    문화일보 | 2025-05-07 11:42
  • 사랑의 천재[유희경의 시:선(詩:選)]

    사랑의 천재

    ‘그는 말없이 창밖의 낙조를 바라보았다/ 하늘이 태양을 닫고 있었다/ 다 식은 커피잔을 쥐면 금방 김이 올랐다/ 불이 붙은 채로 사랑할 수 있었습니까// 그는 자그맣게 숨을 쉬고 있었다/ 최소한으로 살겠다는 듯이’ - 최현우 ‘서른’(시집 ‘우리 없이 빛난 아침’) 시내 유명한 냉메밀 가게 앞에서 어머니를 만나기로 했다. 점심시간을 피했는데도 줄이 길었다. 대기번호를 받고서 마중을 나갔다. 바람이 좀 불었지만, 더없이 화창한 봄날 대낮. 횡단보도 건너편에 어머니가 서 계셨다. 손이 절로 움직여 사진을 찍었다. 파인더에 눈을 대고서,

    문화일보 | 2025-04-30 11:39
  • 상자들[유희경의 시:선(詩:選)]

    상자들

    ‘방을 둘러보면 여전히 상자가 수북하다// 이삿짐이나/ 유품 같다// 빈 상자가 늘고/ 열 만한 것이 사라져 가면// 나는 이 방을 통째로 들어/ 리본으로 묶을 궁리를 해 본다’ - 김보나 ‘상자 놀이’(시집 ‘나의 모험 만화’) 매주 목요일은 내가 사는 아파트의 생활폐기물 분리 배출일이다. 딱히 절약하는 삶은 아니지만, 남달리 소비하는 편도 아닌데, 매번 버릴 게 많다

    문화일보 | 2025-04-23 11:39
  • 아름다운 한때[유희경의 시:선(詩:選)]

    아름다운 한때

    ‘나의 슬픔은 나무 밑에 있고/ 나의 미안은 호숫가에 있고/ 나의 잘못은 비탈길에 있다// 나는 나무 밑에서 미안해하고/ 나는 호숫가에서 뉘우치며/ 나는 비탈에서 슬퍼한다// 이르게 찾아오는 것은/ 한결같이 늦은 일이 된다’ - 박준 ‘지각’(‘마중도 배웅도 없이’) 이곳저곳 피어나는 각양각색 꽃. 그중 으뜸은 벚꽃이다. 매년 찍는 이 이미지가 질리지 않는다. 보다 진

    문화일보 | 2025-04-16 11:52
  • 소생[유희경의 시:선(詩:選)]

    소생

    ‘폭설을 뚫고 자라난 존재는 사월의 속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어떤 기억은 발음에 익숙한 쪽으로 굽어 있다// 침묵에는 누락된 눈빛이/ 포옹에는 누락된 시간이// 나를 통과한 산수유는 모두 부러졌다// 약속이 있었다/ 여러 사람이 울었다 우는 동안 시절이 바뀌었다’ - 이훤 ‘약속이 있었다’(시산문집 ‘청년이 시를 믿게 하였다’) 꽃은 피는 게 아니라 나타난다. 잠시 한눈을 팔다 돌아보면 거기 꽃이 있다. 집 앞 놀이터의 산수유가 그렇다. 어제만 해도 없었는데, 아니 없던 것 같은데 오늘 아침엔 노랗게 봄꽃. 이윽고 진달

    문화일보 | 2025-04-09 11:47
  • 밤[유희경의 시:선(詩:選)]

    ‘나라는 나라를 주웠다/ 넓었지만 이상하게도/ 자꾸 눈물이 났다// 너라는 나라에 닿고서/ 문이 없는 집/ 들어가보고 싶었지// 그때부터 줄곧/ 곁눈질로/ 먼 별을 밝히는 마음// 천천히 피어나라// 애써 보지 않아도/ 힘써 듣지 않아도// 어느덧 우리를 안고 있던/ 오월의 밤이 있었지?’ - 박술 ‘밤’(시집 ‘오토파일럿’) 내가 운영하는 서점은 늦은 아홉 시까지 영업한다. 퇴근하는 사람들을 맞기 위한 노력이다. 집에 돌아오면 열한 시, 더러 자정 가까울 때도 있다. 덕분에 나는 밤을 잃어버렸다. 이 직업의 가장 큰 불

    문화일보 | 2025-04-02 11:33
  • 달리기[유희경의 시:선(詩:選)]

    달리기

    토마토가 붉어가는 속도로 너는 늙고 있다// 다변은 대답이 아니라는 걸 알 때쯤/ 멀리 온 것이다// 푸른 채 저절로 붉어지는 토마토// 누구나 시대의 식민지가 되고 싶지 않아/ 붉은 색은 저절로 왔겠니// 유머는 간결할수록 힘이 있는 거 알아 - 이규리, ‘농담’(시집 ‘우리는 왜 그토록 많은 연인이 필요했을까’) 퇴근해서 집에 오면 한밤이다. 운영하는 서점 문을 늦도록 열기 때문이다. 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 미련이라면, 피곤한 몸으로 생산적인 일을 더 해보려는 것 또한 미련함이다. 다 포기하고 눕거나 앉아서 잘 때까지

    문화일보 | 2025-06-18 11:35
  • 장미의 이름[유희경의 시:선(詩:選)]

    장미의 이름

    ‘꽃잎마다/ 심연에 도착했던 부분이 있다네/ 꽃잎마다/ 지상으로 심연을 이끌고 온 색깔이 있다네// 나의 어떤 부분은 고요.’ - 송재학 ‘꽃잎마다 너라는 잔상’(시집 ‘습이거나 스페인’) 여름 장미가 화사한 요즘이다. 덩굴 앞에는 어김없이 한두 사람이 서 있고 사진을 찍느라 바쁘다. “이제 꽃 사진을 찍어도 민망하지 않은 나이가 되었어.” 한 선배의 자조 섞인 농담이 떠올라 웃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수상하다는 듯 힐끔거린다. 걸음이 바빠진다. 어릴 적 장미란 겹겹 꽃잎 속 풍뎅이를 숨겨놓은 꽃. 줄기서 자라난 가시를

    문화일보 | 2025-06-11 11:40
  • 심심하다[유희경의 시:선(詩:選)]

    심심하다

    ‘심심하다는 말, 외롭다는 뜻이었군/ 외로움을 호소하진 못하고/ 심심해서 죽겠네/ 그런 거였군/ 심심해서 죽겠는 걸/ 사람으로 놀이로 달래다가/ 그도 여의치 않아/ 정말 심심해지니까/ 심심하지 않네/ 오늘은 뻐꾸기가 우는데/ 내 맘이 산도 되고 들도 되고/ 쾌청한가 하면 울적하여/ 저마다 울림이 있네.’ - 손택수 ‘심심하다는 말’(시집 ‘눈물이 움직인다’) 한 사과문의 ‘심심(甚深深)한 사과’라는 표현으로 떠들썩했던 일이 있었다. 정확히는, 그 표현이 아니라 이를 오해해 비난한 댓글이 다수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심심하다’를 ‘지

    문화일보 | 2025-06-04 11:36
  • 함께 살기[유희경의 시:선(詩:選)]

    함께 살기

    ‘내 집 오는 골목에는 쌀과 콩이 새벽마다 흩어져 있다/ 정오까지 새들이 머무를 만큼/ 많이// 「누가 자꾸 새에게 먹이를 주는 거냐/ 그러지 마라」// 경고문 주변에/ 새똥이 가득하다// 비둘기와/ 나// 무덤을 만들지 않는 종과/ 무덤을 업고 다니는 종.’ - 김복희 ‘종의 차이’(시집 ‘보조 영혼’) 서점 앞 널찍한 보도에는 비둘기가 제법 많다. 너무 익숙한지라 보도블록에 그려진 무늬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따금, 장난꾸러기 몇이 와락 달려들면 푸드덕 날아가고 그게 싫어 비명을 지르는 사람도 있고 그제야 나는 비둘기도 새라는 사

    문화일보 | 2025-05-28 1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