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기획·고정물

S010202337 유희경의 시:선(詩:選)
245 | 생성일 2021-06-16 11:21
  • 아름다운 돌림노래[유희경의 시:선(詩:選)]

    아름다운 돌림노래

    너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노래의 맨 뒷부분에선/ 이상하게도// 다른 사람이 부른 후렴구가 반복되고/ 그것이 참 아름답습니다.// 오후의 비가 내려서/ 너의 어깨는 젖지 않고/ 나의 두 발등은 젖은 채로// 나의 우산을 생각합니다 - 하재연 ‘여름 이야기’(시집 ‘인간이라는 환상처럼’) 매년 오월이 되면 내가 운영하는 서점은 ‘작약주간’이라 부르는 이벤트를 개최한다. 내용은 간단하다. 독자가 작약 한 송이를 선물하면, 우리 서점에선 한 권 시집으로 화답하는 것이다. 호응이 좋아서, 작약주간이 끝날 즈음 서점은 작약 구름으로 아름다워진다

    문화일보 | 2026-05-27 11:25
  • 5월에 대하여[유희경의 시:선(詩:選)]

    5월에 대하여

    5월은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려고 왔을까. 5월이 거느린 작은 탄생. 작은 죽음. 부드러운 흙을 만지면 느낄 수 있다. 죽고 나서 또 다른 몸으로 우리에게 오는 것들. 봄이라는 상자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 남지은 ‘있는 힘껏’(시산문집 ‘어린이의 곁이면 되었다’) 스승의날이 지나고 나자 마음이 놓인다. 아이고, 부처님오신날이 남았네. 내려놓으려던 마음을 허겁지겁 챙긴다. 어린이날 지나 어버이날 지나 스승의날 지나 초파일. 각각의 기념일을 챙겨야 하는 입장도 아니고, 그럴 마음도 없으면서 5월이 되면 마음이 분주해진다. 어째

    문화일보 | 2026-05-20 11:27
  • 버스를 기다리며[유희경의 시:선(詩:選)]

    버스를 기다리며

    버스를 기다리면 버스는 오지 않아 나는 단 한 대의 버스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되돌아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원점이. 너무 멀리 있기 때문에. 버스를 기다리는 이 시간은 영원은 아니지만 길어 보여. 그러나 아이들에게는 아닐 수 있다. - 구윤재 ‘ETA’(시집 ‘미래 아이 뜀틀’) 높고 푸른 하늘의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이런 날씨 속에선 누구든 무엇이든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마저도. 출근이 늦었는데도. 마치 소풍이라도 가는 듯한 마음으로 나는 올 때가 되면 오겠지. 마냥 너그럽고 여유 있다. 요즘은

    문화일보 | 2026-05-13 11:26
  • 잠은 소중하다[유희경의 시:선(詩:選)]

    잠은 소중하다

    티어가르텐/ 얼굴을 내밀어 밤공기를 마신다/ 밤은 말한다// 밤공기 속에는 내가 없고/ 그리고 위치를 바꾼 포성과/ 나오려다 삼켜진 죽은 자들의 말들/ 끝을 알 수 없는 밤의 서늘한 회랑에서/ 돋아났다 사라지는/ 밤의 얼굴들 - 문혜진 ‘밤은 말한다’(시집 ‘무증상 환자’) 잠은 소중하다. 나는 머리만 대면 자는 사람. 쿨쿨 자고 아침에 벌떡 일어날 줄 아는 사람. 이게 자랑인 줄 몰랐지. 알게 되었으므로 나는 불행하다. 벌써 2주째 잠을 설치고 있다. 불면증은 아니다. 요약하자면, 시차 적응. 출장으로 미국에 다녀왔다. 뉴올리언스

    문화일보 | 2026-05-06 11:27
  • 가장 귀한, 일상[유희경의 시:선(詩:選)]

    가장 귀한, 일상

    잎사귀는 공기에 내어 맡긴다/ 풀밭은// 뿌리내린 것 조금 더 뻗어 나가는 것 멈춘 것 떨어지는 것 드러난 것 숨은 것 베어진 것 짓밟힌 것 솟아오르는 것 단순하고 흔한 것 돌처럼 강물처럼 빛의 세계 모든 것처럼 풀밭의 일요일 - 송승환 ‘오월의 풀밭’(시집 ‘파’) 뉴욕에 와 있다. 첫 방문인지라 보고 듣는 모든 것이 신기하다. 고층 빌딩 숲, 뉴요커들의 잰걸음, 어마어마한 교통체증. 휘황하고 복잡한 이곳은 아직 초봄이다. 뉴올리언스를 거쳐오느라 얇은 옷가지 위주로 챙겼는지라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다. 동료 시인들과 함께 이곳의

    문화일보 | 2026-04-29 11:00
  • 봄비 오는 날 시집 읽기[유희경의 시:선(詩:選)]

    봄비 오는 날 시집 읽기

    비가 오네요/ 비는 봄비, 날이 오래 궂어요/ 물까치들도 밥 먹는 시간입니다/ 시끄러워요/ 밥을 먹고, 설거지 먼저 할까/ 커피를 먼저 마실까/ 하다가 설거지하고 나서 커피를 마시기로 했어요 뒷맛이 개운할 것 같아서요 - 김용택 ‘파동 후를 보러 갈까요’(시집 ‘그날의 초록빛’) 꽃 씻겨낸 비 내리고 초록만 울창한 계절은 여름에 가까울 것이다. 우산꽂이를 문 가까이 내려놓으며 이 짧은 봄을 원망하는 건지, 그래서 불만인 건지 그저 애틋한 건지, 설마 이제 알 만큼 안다고 우쭐대는 마음은 아닌지 종잡기가 어렵다. 서점을 시작한 지 얼

    문화일보 | 2026-04-22 11:31
  • 동생의 결혼식[유희경의 시:선(詩:選)]

    동생의 결혼식

    이곳으로 출생할 때/ 누구나 발을 훔쳐 온다/ 태어나기 전까지 신던 낡은 제 발을 벗어버리고/ 새 신발을 훔치듯 ‘옆 사람’이 벗어둔 발을 몰래 신고 나온다// 그러므로 훔쳐 온 발은 인생 신발 속에 잘 숨기고 다닌다// 그리고 ‘옆 사람’을 자신도 모르게 찾게 된다 - 김중일 ‘나란히 걷는 일’(시집 ‘차원 이동 가능’) 전날, 작정하고 일찍 잠들었으나, 새벽 다섯 시 기상은 쉽지 않은 일이다. 사월이어도 새벽은 쌀쌀하고 이불 밖으로 졸린 몸을 일으켜 세우는 일에는 적잖은 각오가 필요하다. 하지만 오늘은 가족의 결혼식이 있는 날.

    문화일보 | 2026-04-15 11:23
  • 꽃 사진[유희경의 시:선(詩:選)]

    꽃 사진

    친구를 만나러 간다/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벌레들이 옮겨 가기에 친구를 만나러 간다/ 벌레보다 먼저 나무가 움직이기에 친구를 만나러 간다// 나무는 움직일 때도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나무를 따라 걷는다/ 나무를 비추는 불빛을 따라 걷는다 - 이수명 ‘친구를 만나러 간다’(시집 ‘정오의 총알’) 봄꽃이 우당탕 피어났다. 알기로 할미꽃 먼저, 다음은 개나리, 목련이 피고 벚꽃은 며칠 뒤. 이와 같은 순서로 찾아오지만, 올해는 서로 봄맞이하겠다고 앞다투어 피어나 뒤섞여 있다. 기후위기 탓이라고도 하던데, 당장은 보기 참 좋다. 골목

    문화일보 | 2026-04-08 10:58
  • 퇴근길 바이브[유희경의 시:선(詩:選)]

    퇴근길 바이브

    나는 그의 삶을 모른다/ 지금의 행색과 표정과 걸음걸이만을 볼 뿐이다/ 그가 누구든 그에게도 집이 있을 것이고/ 가족이 있을 것이고 가족이 아니면/ 또 무엇이 있어서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 그를 보았다 - 김언 ‘퇴근하는 사람’(시 산문집 ‘없을 때까지 있는 단어’) 밤이 깊어지면, 공기는 깊숙이 내려앉아 조용해지고 나는 운영하는 서점 내 자리에 오래도록 있고 싶다. 잔뜩 웅크렸던 어깨에서 모든 긴장을 내려놓은 채, 시인도 서점지기도 아닌 ‘유희경’인 나 자신을 되찾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두 눈을 감고 있으면 심장이 뛰는 감각

    문화일보 | 2026-04-01 11:35
  • 잊기 기억하기[유희경의 시:선(詩:選)]

    잊기 기억하기

    잊지 않는다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잊는다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지 않는다면 잊을 수 있을 것이다/ 말한다면 잊을 수 있을 것이다/ 말하지 않는다면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말한다면 잊을 수 없을 것이다 - 김선오 ‘무제’(시집 ‘말 꿈 몸’) 자꾸 깜빡한다. 약속을, 사람 이름을, 사물의 명칭을 잊고 만다. 깜빡해서 말을 더듬는다. 나는 이를 ‘이그저의 시기’라고 생각한다. 어떤 대화에서든 반드시 한 번쯤 “이거 뭐였지?” “그거 있잖아” “저기 그거 있잖아” 하고 말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나이 탓을 한다. 솔직히,

    문화일보 | 2026-03-25 11:36
  • 혼자 있는 마음[유희경의 시:선(詩:選)]

    혼자 있는 마음

    혼자 있을 수 없는 마음에게 물었다/ 작고 어려져 줄 수 있는지// 혼자 있기 싫은 마음은 말했다/ 나 지금 먹고 치우고/ 스스로 샤워하고 온몸에 힘까지 빼고 누웠는데/ 나보고 뭔가 더 하라니? - 김복희 ‘두더지 땅굴 파듯’(시집 ‘생 마음’) 나의 직업은 서점지기이고 주된 업무는 기다리기. 2층에 있는 서점에서, 입구이자 통로인 나선계단을 밟아 올라오는 소리를 기다린다. 내내 기다리다 보면 혼자라는 상태를 절감하게 된다. 말 걸어올 이도, 말 걸어 볼 이도 없이, 이리 지낸 지 벌써 십 년이 되었다. 때론 혼자인 게 무섭다. 내

    문화일보 | 2026-03-18 11:42
  • 목련 꽃눈을 보면서[유희경의 시:선(詩:選)]

    목련 꽃눈을 보면서

    잎보다 꽃이 먼저 피는 나무도 좋고/ 꽃보다 잎이 먼저 나는 풀도 좋지만// 절정으로 활짝 열린 푸른 오색의 잎과 꽃들보다/ 미처 다 물오르지 않은 몽글어진 망울로서의/ 연두와 희붐한 빛깔로 이뤄진 가능성들을/ 그저 바라보고 있는 때를 더 좋아하게 된다. - 채길우 ‘무표정’(시집 ‘아버지를 업고’) 3월이니 봄이 아닐 수 없다. 시샘 가득한 추위도 견딜 만하고, 덕분에 창문을 열어두기도 한다. 창턱 너머 목련 가지에 보들보들한 꽃눈이 맺혔다. 붓끝을 닮아서 신이(辛夷)라고도 하고 목필(木筆)이라고도 불리는 저것은 당장 무어라도 적

    문화일보 | 2026-03-11 11: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