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기획·고정물
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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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필 3명 먼저 보낸 문종, 종기로 요절하다… 조선 뒤흔든 불운의 연속
# 왕비 없는 왕 세자 향(문종)의 세자빈 순빈이 쫓겨나 아버지 봉려의 손에 죽은 지 두 달쯤 되었을 때, 신하들은 세종에게 이런 말을 올렸다. “세자빈의 자리는 오랫동안 비워 둘 수는 없으니, 마땅히 숙덕(淑德)이 있는 규수를 잘 골라 뽑아서 한시 빨리 배필로 정해야 될 것입니다.” 하지만 흉년인 데다, 벌써 두 번의 가례를 실패한 탓에 세종은 신하들의 요청에 쉽게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조정 대신들이 동궁의 후궁들 중에 골라 세자빈을 택하자고 했다. 세종은 그것도 마땅하지 않다며 거절하다가, 고심 끝에 결국 대신들의 의견을 받아
문화일보 | 2026-07-03 09:25 -
무심했던 세자… 사랑받지 못한 부인들은 ‘미신’ · ‘동성애’ 빠져
# 도저히 정이 가지 않는 첫 번째 아내 문종 이향은 짧은 재위 기간과 달리 의외로 여자관계가 복잡했다. 왕비 현덕왕후 권씨 외에도 10명의 후궁을 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복은 별로 없었다. 그가 처음으로 맞은 여인은 세자빈으로 간택된 휘빈 김씨였다. 그가 휘빈과 결혼한 때는 1427년 4월 9일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14세였고, 휘빈 역시 비슷한 나이였으리라. 간택에 의해 세자빈으로 뽑힌 만큼 휘빈의 집안은 뼈대 있는 가문이었다. 휘빈의 아버지는 안동 김씨 오문인데, 김구덕의 아들이다. 김구덕은 지금의 서울시장 격인 한성부윤
문화일보 | 2026-05-22 09:16 -
천연두 등으로 자녀 6명 가슴에 묻고… 자신은 당뇨·요통·중풍 앓아
# 가슴에 묻은 자녀들 세종은 18남 7녀의 자녀를 얻었는데, 이들 중에서 왕비 심씨가 8남 2녀를 낳았고, 영빈 강씨가 1남, 신빈 김씨가 6남 2녀, 혜빈 양씨가 3남, 숙빈 이씨가 1녀, 상침 송씨가 1녀, 사기 차씨가 1녀를 낳았다. 이들 중에서 왕비 소생이자 장녀였던 정소공주가 일찍 죽었고, 광평대군과 평원대군이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리고 신빈 김씨 소생 옹주 2명이 어린 나이에 죽었고, 사기 차씨 소생의 옹주 1명도 일찍 죽었다. 이렇듯 세종은 6명의 자녀를 먼저 보냈는데, 이로 인해 매우 고통스러워했다. 흔히 먼저 죽
문화일보 | 2026-04-17 09:23 -
능력만 뛰어나면… ‘천한 노비’도 높이 쓰고 ‘골칫덩이 신하’도 곁에 뒀다
# 인자한 성품, 실용적인 인재관 세종의 인격에 대해 당대의 신하들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인륜에 밝았고 모든 사물에 자상하니, 남쪽과 북녘이 복종하여 나라 안이 편안하여, 백성이 살아가기를 즐겨한 지 무릇 30여 년이다. 거룩한 덕이 높고 높으매, 사람들이 이름을 짓지 못하여 당시에 해동요순(海東堯舜)이라 불렀다.’ 요순은 곧 성군의 대명사인데, ‘해동요순’이라는 표현은 왕에겐 최고의 찬사가 아닐 수 없었다. 사실, 태종이 상왕으로 있던 시절을 제외하곤 세종시대엔 반역 사건이 하나도 없었고, 대역 사건으로 참형을 당하는 일도 없
문화일보 | 2026-03-13 09:24 -
모범생 충녕, 여색 빠진 양녕 못마땅… 매형 첩 건드리자 “옳습니까”
# 사사건건 부딪치는 두 형제 태종 16년(1416년) 1월 19일의 일이다. 세자 양녕이 화려하게 차려입고 막 동궁을 나서고 있었다. 스물세 살의 혈기왕성한 청년이던 양녕은 그 무렵 여색에 깊이 빠져 있었다. 세 살 아래인 아우 충녕은 형의 그런 행동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동궁을 나서던 양녕이 주변 시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내 차림이 어떤가?” 그러자 어느새 다가온 충녕이 정색을 하고 양녕에게 충고했다. “먼저 마음을 바로잡은 뒤에 용모를 닦으시기 바랍니다.” 충녕의 말에 함께 있던 신하 하나가 거들었다. “대군의
문화일보 | 2026-02-06 09:34 -
왕가내 권력 다툼·불화 속 12살에 결혼한‘소년 세종’… 유일한 친구는 책이었다
# 꼬마신랑이 된 범생이 왕자 1408년(태종 8년) 2월 16일 궁중에서 어린 소년 하나가 결혼식을 올렸다. 소년은 1397년생이니 나이는 12살, 지금으로 보면 겨우 초등학교 5학년 나이였다. 그야말로 꼬마신랑이었다. 그 어린 소년이 두 살 많은 14세 소녀에게 장가를 든 것이다. 이 소년의 이름은 도였고, 군호는 충녕으로 훗날의 세종이었다. 신부가 된 소녀는 당시 우부대언(우부승지) 심온의 딸로 곧 소헌왕후 심씨였다. 소년은 위로 세 명의 누나와 두 명의 형이 있었다. 그리고 아래로는 남동생 하나와 여동생 하나가 있었다. 그들
문화일보 | 2026-01-09 09:03 -
‘계모의 묘’도 없애는 뒤끝 대마왕… 복종 안하면 적으로 여겨 처형
# 끈질긴 보복, 뒤끝 대마왕 1408년 5월에 태조 이성계가 죽자, 태종은 그동안 숨기고 있던 계모 강씨에 대한 증오심을 본격적으로 드러냈다. 태종은 1409년 2월 23일에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을 도성 밖으로 옮기도록 한 뒤, 이런 명령을 내렸다. “참찬은 태평관 감조 제조이니, 정릉의 정자각을 헐어서 누각 3간을 짓고, 관의 옛청사를 가지고 동헌·서헌을 창건하면, 목석의 공력을 덜고 일도 쉽게 이루어질 것이다. 황엄(명나라 사신)이 일찍이 말하기를, ‘정자 터를 높이 쌓고, 가운데에 누각을 짓고, 동쪽·서쪽에 헌(軒)을
문화일보 | 2025-11-21 09:30 -
이방원, 6년간 야심 숨기다 기회 오자 政敵 살육… 음흉·잔인 ‘냉혈한’
# 때를 기다리는 음흉한 인내력의 소유자 조선이 개국되자, 계모 강씨와 이방원의 동지적 관계는 끝났다. 그들의 관계를 악화시킨 것은 세자 책봉 문제였다. 조선 개국 직후인 1392년 8월, 태조 이성계는 강씨의 막내아들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다. 당시 개국 공신인 배극렴 등은 이방원을 세자로 삼을 것을 요청했지만 태조는 왕비 강씨의 주장에 밀려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던 것이다. 이후, 방원은 강씨를 정적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자칫 강씨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드러냈다간 무사하지 못할 것이란 사실을 알았기 때문
문화일보 | 2025-10-10 09:27 -
이성계와 달리 ‘허약 체질’ 방원… 과거 급제로 무신 가문 한 풀어줘
# 귀한 사주, 남다른 관상, 허약한 체질 태종 이방원은 1367년(공민왕 16년) 5월 16일에 함경도 함흥 귀주동에서 이성계의 첫 부인 한씨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방원을 낳은 후, 어머니 한씨가 점쟁이 문성윤에게 방원의 사주에 대해 물었더니 문성윤이 이렇게 말했다. “이 사주는 귀하기가 말할 수 없으니, 조심하고 점쟁이에게 경솔히 물어보지 마소서.” 말인즉, 방원 사주 속에는 나라를 배신하거나 나라를 세울 운명이 들어있다는 뜻이었다. 그 때문에 자칫 사주를 함부로 보여 왕이 될 사주라고 소문이라도 나면 아이가 무사하지 못
문화일보 | 2025-08-01 09:12 -
61세 상왕때 20세 첩이 환관과 간통… 측은히 여겨 ‘살려줘라’ 선처
# 환관과 사통한 첩을 살려준 정종 정종의 아들 중에는 왕세자가 되려다 죽임을 당한 불노보다 더 불행한 삶을 산 아들도 있었다. 지운이라는 인물이었다. 정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뒤에 인덕궁에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한 여인을 품었다. 그녀는 인덕궁 소속의 여종 기매였고, 그녀가 낳은 아들이 바로 지운이었다. 그런데 기매는 지운을 낳은 뒤에 궁궐을 발칵 뒤집을 만한 섹스 스캔들에 휘말렸다. 이 사건에 대해 실록은 태종 17년(1417년) 8월 8일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환자 정사징을 베었다. 정사징은 고려 공양왕 때부터
문화일보 | 2025-07-04 09:02 -
2년2개월 짧게 재위한 ‘허수아비 왕’… 후궁 10명·자식 25명 달해
# 여성 편력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던 허수아비 왕 정종(定宗)은 태조의 차남이며, 신의왕후 한씨 소생으로 1357년(공민왕 6년) 7월 1일에 함흥 귀주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방과(芳果)였다가 후에 경()으로 바꿨으며, 자는 광원(光遠)이다. 그는 고려조에 벼슬은 했으나 원래 정치에 뜻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개국 이후에도 권력을 탐하지 않았고, 조정의 일에도 관심이 없었다.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세자 방석을 살해했다는 소식을 접한 뒤에도 전혀 왕위를 넘보지 않았고, 세자의 자리는 당연히 이방원에게 돌아가
문화일보 | 2025-05-23 09:02 -
맨손으로 소싸움 말리고 활솜씨 빼어나…근력·담력·마력의 ‘조선 國祖’
# 타고난 근력, 용맹스러운 담력 부하들이 이성계를 믿고 따른 것은 단순히 그의 포용력에 힘입은 것만은 아니었다. 이성계의 포용력 뒤에는 이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또 다른 능력이 있었다. 그것은 이성계의 타고난 힘과 용맹이었다. 이성계는 힘이 장사였고, 담력도 매우 뛰어난 사람이었다. ‘동각잡기’는 다음 이야기를 통해 이를 확인해 준다. 함흥에서 큰 소가 서로 싸우는데, 여러 사람이 소싸움을 말리려고 혹은 옷을 벗어 던지고, 혹은 불을 붙여서 던졌지만, 말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태조가 두 손으로 두 소를 나누어 붙드니, 소가 싸우
문화일보 | 2025-04-28 0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