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기획·고정물

S010202456 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24 | 생성일 2021-09-03 10:30
  • 61세 상왕때 20세 첩이 환관과 간통… 측은히 여겨 ‘살려줘라’ 선처[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61세 상왕때 20세 첩이 환관과 간통… 측은히 여겨 ‘살려줘라’ 선처

    # 환관과 사통한 첩을 살려준 정종 정종의 아들 중에는 왕세자가 되려다 죽임을 당한 불노보다 더 불행한 삶을 산 아들도 있었다. 지운이라는 인물이었다. 정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뒤에 인덕궁에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한 여인을 품었다. 그녀는 인덕궁 소속의 여종 기매였고, 그녀가 낳은 아들이 바로 지운이었다. 그런데 기매는 지운을 낳은 뒤에 궁궐을 발칵 뒤집을 만한 섹스 스캔들에 휘말렸다. 이 사건에 대해 실록은 태종 17년(1417년) 8월 8일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환자 정사징을 베었다. 정사징은 고려 공양왕 때부터

    문화일보 | 2025-07-04 09:02
  • 2년2개월 짧게 재위한 ‘허수아비 왕’… 후궁 10명·자식 25명 달해[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2년2개월 짧게 재위한 ‘허수아비 왕’… 후궁 10명·자식 25명 달해

    # 여성 편력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던 허수아비 왕 정종(定宗)은 태조의 차남이며, 신의왕후 한씨 소생으로 1357년(공민왕 6년) 7월 1일에 함흥 귀주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방과(芳果)였다가 후에 경()으로 바꿨으며, 자는 광원(光遠)이다. 그는 고려조에 벼슬은 했으나 원래 정치에 뜻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개국 이후에도 권력을 탐하지 않았고, 조정의 일에도 관심이 없었다.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세자 방석을 살해했다는 소식을 접한 뒤에도 전혀 왕위를 넘보지 않았고, 세자의 자리는 당연히 이방원에게 돌아가

    문화일보 | 2025-05-23 09:02
  • 맨손으로 소싸움 말리고 활솜씨 빼어나…근력·담력·마력의 ‘조선 國祖’ [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맨손으로 소싸움 말리고 활솜씨 빼어나…근력·담력·마력의 ‘조선 國祖’

    # 타고난 근력, 용맹스러운 담력 부하들이 이성계를 믿고 따른 것은 단순히 그의 포용력에 힘입은 것만은 아니었다. 이성계의 포용력 뒤에는 이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또 다른 능력이 있었다. 그것은 이성계의 타고난 힘과 용맹이었다. 이성계는 힘이 장사였고, 담력도 매우 뛰어난 사람이었다. ‘동각잡기’는 다음 이야기를 통해 이를 확인해 준다. 함흥에서 큰 소가 서로 싸우는데, 여러 사람이 소싸움을 말리려고 혹은 옷을 벗어 던지고, 혹은 불을 붙여서 던졌지만, 말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태조가 두 손으로 두 소를 나누어 붙드니, 소가 싸우

    문화일보 | 2025-04-28 09:12
  • 반역 꾀한 사촌·즉위 반대 세력도 포용… 온화하고 너그러웠던 이성계[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반역 꾀한 사촌·즉위 반대 세력도 포용… 온화하고 너그러웠던 이성계

    ■ 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 (35) 왕의 인성과 사생활 : 태조(中) 풍채 좋고 넓은 귓불 지녀 관상학적으로는 겸손·경청 실제로도 말 많지않고 신중 적 만들기보단 화합 추구해 원래 장손인 사촌형 이천계 이성계 몰아내려다가 실패 그럼에도 그의 자손 보살펴 반대파엔 벼슬 주고 신하로 “부하 모두 태조에 예속 원해” ‘동각잡기’에 포용리더십 기록 # 이성계의 외모-넉넉한 풍채, 너그러운 인상, 특별한 귀 이성계의 외모는 어땠을까? 다행히 태조 어진(御眞)이 남아 있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왕들의 어진은 임진왜란 때 대부분 소실됐기 때문에 남아 있는 것이 몇 점 되지 않는다. 하지만 태조 이성계의 어진은 전주시 경기전의 어진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돼 있는데, 이 어진은 태조 생존 당시에 제작된 것을 모사한 것이다. 태조 어진은 태종 대와 고종 대에 각각 한 번씩 모사됐는데, 경기전에 보관되어 있는 것은 고종 대의 화가들인 조중묵, 백은배, 박기준 등이 태종 시절에 제작된 모사본을 1872년에 다시 모사한 것이다. 조선의 초상화는 있는 그대로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는

    문화일보 | 2025-03-14 09:12
  • 노비출신 서모·이복형제와 자란 이성계… 재주 숨기고 항상 겸손[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노비출신 서모·이복형제와 자란 이성계… 재주 숨기고 항상 겸손

    ■ 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 (34) 왕의 인성과 사생활 : 태조 (上) 생모 일찍 죽고 친누나 출가 배다른 형·동생 사이 꼈지만 친자식처럼 아낀 서모 덕에 갈등없이 우애깊은 유년시절 서모, 시기하는 이 생길까봐 “능력 드러내지 말라” 가르쳐 “누구의 위에 서려 하지 않아” 이정형 ‘동각잡기’에 기록도 # 이복형제들 틈바구니에서 보낸 어린 시절 태조 이성계는 1335년 음력 10월 11일에 아버지 이자춘과 어머니 최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자춘은 함흥의 유력한 가문이었고, 어머니는 영흥의 유력한 가문이었다. 따라

    문화일보 | 2025-02-14 09:26
  • 옷·신발 등 장인 600여명 소속… 임금 불호령땐 ‘옥살이’ 겪기도[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옷·신발 등 장인 600여명 소속… 임금 불호령땐 ‘옥살이’ 겪기도

    ■ 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 (33) 왕실 의복·재물 관장 ‘상의원’ 경국대전에 68종 있었다 기록 왕마다 취향 달라 긴장의 연속 태종, 복장·음식 등 까탈 심해 가는베 소재 버선에 ‘노발대발’ 세종도 “옷 마음에 안든다”며 총애하던 백운보 감옥에 보내 이후 다른 실수엔 ‘곤장 80대’ # 왕실의 옷과 보석을 담당하는 곳 상의원은 왕실에서 필요로 하는 각종 의복을 관장하고, 재물과 보화를 관리하고 제조하며 공급하던 곳이다. 상의원은 일상적인 관례에 따라 매달 초하루와 보름, 생일, 명절, 절기에, 대전·대왕대비전·중궁전·세자궁·빈궁·현빈궁 등 각전과 각궁에 정해진 물품을 진상하고, 가례·책례·존숭·능행 등 왕실 의례가 있을 때 또는 왕의 명령이 있을 때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였다. 상의원은 고려시대엔 상의국, 장복서 등으로 불리다가 조선 초에 이르러 상의원으로 고정되었다. 이후 조선시대 내내 같은 명칭으로 불리다가 고종대인 1895년에 상의사로 개칭되었다가 다시 1905년에 상방사로 이름을 바꿨다. 상의원의 위치는 경복궁에서는 영추문으로 들어가면 사도시가 먼저 보이고 다시 관상?

    문화일보 | 2025-01-17 08:58
  • 왕궁 음식 책임자 ‘봉급 0’ … 궁 밖서 출퇴근하는 요리사들은 천민[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왕궁 음식 책임자 ‘봉급 0’ … 궁 밖서 출퇴근하는 요리사들은 천민

    ■ 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 (32) 궁궐 음식 담당하는 ‘사옹원’ 행정직 외 실질 총괄자 4명 녹봉은 못 받고 신분만 관료 밥짓는 반공·술빚는 주색 등 각 분야별 주방장 명칭 달라 수라상 담당 천민 ‘대령숙수’ 평민 대우받고 자녀에 세습 #궁궐의 음식물을 담당하는 곳 사옹원(司饔院)은 왕의 식사에 소용되는 음식물의 공급과 왕궁에서 소용되는 음식에 관한 일을 맡은 관청이다. 사옹원의 ‘옹(饔)’은 음식을 잘 익힌다는 뜻으로 새로 나온 음식을 먼저 조상 신위들께 올리는 일도 담당했다. 이곳의 관리로는 정 1인, 첨정

    문화일보 | 2024-12-23 09:15
  • 왕실 재산 관리하며 권한 막강… 고리대금·토지임대에 백성들 피해도[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왕실 재산 관리하며 권한 막강… 고리대금·토지임대에 백성들 피해도

    ■ 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 (31) 이조 소속 관청 ‘내수사’ 딸린 전답들은 왕실 소속이라 면세특권 받으며 재산 불려가 궁녀·내시도 왕의 소유로 여겨 선발 관여하고 투옥까지 담당 관원은 왕의 총애 받으며 횡포 소속 노비까지 권세 누리기도 # 알고 보면 최고 권력 기관 내수사(內需司)는 궁궐에서 소용되는 물품을 관리하는 기관으로 이조에 소속되어 있는 관청이다. 왕실의 쌀, 베, 잡화, 노비 등 실질적인 왕의 재산을 관리하는 곳으로서, 이곳 관원의 대부분은 환관들이었다. 조선 개국 초에만 하더라도 내수사라는 기관은 없었다. 당시엔 고려 왕실로부터 물려받은 왕실 재산과 이성계가 원래 가지고 있던 사유재산을 관리하는 곳을 본궁(本宮)이라고 칭했는데, 이것이 내수사의 전신이다. 본궁이란 곧 이성계의 본가를 칭하는데, 다른 한편으론 왕실 재산을 의미하기도 했고, 왕실재산을 관리하는 곳을 지칭하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본궁은 공식적인 국가기관은 아니었다. 왕실 재산을 관리하는 공식적인 기관이 생긴 것은 세종대에 이르러서였다. 세종은 재위 5년(1423년)에 내수소(內需所)라는 기관을 만들어

    문화일보 | 2024-10-18 09:04
  • 성문 지키는 병사들 군장점검… 트집 잡아 돈 빼앗는 ‘사냥’ 변질[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성문 지키는 병사들 군장점검… 트집 잡아 돈 빼앗는 ‘사냥’ 변질

    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 (30) 군졸들의 호랑이 ‘도총부’ 중앙군 총괄 역할… 요즘의 합참 비변사 설치 뒤 유명무실 전락 군인들 준비물 점검… 벌금 부과 많게는 300냥… 백성들이 갹출 제대로 월급 주어지지 않은 탓 지방관리까지 금전갈취 일상화 # 군졸들의 호랑이로 군림한 도총부 관원들 조선시대 오위(五衛)를 총괄한 최고 군령기관으로 요즘의 합동참모본부에 해당한다. 고려시대에는 삼군총제부로 불리다가 조선 초에는 의흥삼군부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후 의흥삼군부는 태종 1년(1401년)에 승추부로 다시 개칭되었는데, 그로부터 2년 뒤인 1403년에 삼군에 각각 도총부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1405년에 승추부가 병조에 통합됨에 따라 삼군도총부는 병조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병조가 너무 비대해졌는데, 병조의 군사 업무를 다시 분산시키기 위해 삼군진무소가 설치되었다. 그러다 세조 3년(1457년)에 중앙군 조직이 오위로 개편되면서 삼군진무소는 오위진무소가 되었고, 1466년에 관제개혁이 이뤄지면서 오위도총부로 개칭되었다. 오위도총부는 중앙군을 총괄하는 역할을 했는데, 중종 때 비변사?

    문화일보 | 2024-09-20 09:12
  • 국왕 신변 보호·왕궁 호위… 천민·외국인도 무예 탁월하면 선발[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국왕 신변 보호·왕궁 호위… 천민·외국인도 무예 탁월하면 선발

    ■ 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 (29) 왕의 친위부대 ‘금군청’ 내금위·겸사복·우림위 세조직 내금위는 양반자제로만 구성 군인 모두 종9품~정3품 품계 7년 복무 마친 뒤 연장도 가능 출신 군관 우대 좋고 출세 빨라 영·정조 지나며 명칭 등 변화 1894년 갑오개혁때 완전 폐지 #내금위·겸사복·우림위로 이뤄진 왕의 군대 금군청은 왕의 친위부대인 금군(禁軍)을 일컫는다. 금군은 조선 중기까지는 그저 금군으로 불리며 내금위, 겸사복, 우림위 등 3위 체제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각각 3명의 장수가 통솔하는 구조였다. 그러다 효종 대에 이르러 내삼청으로 통합 일원화하고 하나의 정식 군영으로 발족했고, 이후 현종 7년(1666년)에 금군청으로 명칭을 변경하면서 소속 병력도 700명으로 규정했다. 금군의 주요 직책은 종2품의 별장을 위시하여 그 아래 정3품의 장수 7명이 포진한 형태였다. 7명의 장수에는 겸사복장 2명, 내금위장 3명, 우림위장 2명이 있었다. 이들 7명의 장수는 7번으로 나누어진 금군의 번장들인 셈이다. 금군은 총 700명으로 내금위가 300명, 겸사복이 200명, 우림위가 200명이다. 따라서 내금위는

    문화일보 | 2024-08-09 09:13
  • 명문가 후손들이 독점한 ‘무관 출세길’… 왕이라도 천거 관여 못해[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명문가 후손들이 독점한 ‘무관 출세길’… 왕이라도 천거 관여 못해

    ■ 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 (28) 무관 선호도 1위 ‘선전관청’ (2) 후보군 미리 발탁하는 제도 둬 무예 익힌 양반 한량들이 차지 선전관 선배가 직접 후보 뽑아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자리 “사사로이 임용” 문제 불거져 현종때 김좌명 탄핵 위기도 숙종땐 ‘종실 서출’ 제외 소동 천거 막은 박섬 결국 파직돼 # 무관 고위직으로 가는 출세의 지름길 선전관은 고위직 무관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출세의 요람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조선 후기에 이르면 선전관은 명문가 출신들만 차지하는 자리로 변

    문화일보 | 2024-06-28 09:04
  • 왕실 앞 밤새우며 ‘철통 호위’ … 임금의 신뢰·총애 받은 ‘꿈의 직장’[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왕실 앞 밤새우며 ‘철통 호위’ … 임금의 신뢰·총애 받은 ‘꿈의 직장’

    ■ 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 (27) 무관 선호도 1위 ‘선전관청’ 초기엔 정식기관 지정 안 돼 베일에 싸인 채 왕 신변 보호 수장 정 3품, 부하는 종6·9품 70~80명… 고종 19년에 폐지 선전관청 수장이었던 변경우 “백인걸 후손 쫓아내야” 상언에 정조 ‘임금 업신여긴다’ 판단 되레 변경우 내쳐 서열정리도 # 왕의 목숨을 지키는 사람들 조선 시대 문관들이 가장 선호한 직장이 홍문관이었다면 무관들이 가장 선호한 직장은 선전관청(宣傳官廳)이었다. 관리들의 직장 선호도는 왕과의 거리에 비례했다. 홍문관이 왕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던 문관들의 관청이었다면 선전관청은 왕과 가장 가까이하는 무관들의 관청이었던 것이다. 선전관청의 임무는 국왕의 명령을 전달하고 국왕의 신변을 지키는 것이었다. 선전관청의 선전관들은 심지어 국왕이 잠든 사이에 침실을 호위하는 역할까지 했다. 국왕은 그들에게 목숨을 맡겨두고 잠드는 셈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국왕이 가장 신임하는 인물들로 구성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조선은 개국 초에만 하더라도 선전관청을 정식 기관으로 두지 않았다. 성종 때 완성된 ‘경?

    문화일보 | 2024-05-10 09:11
  • 61세 상왕때 20세 첩이 환관과 간통… 측은히 여겨 ‘살려줘라’ 선처[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61세 상왕때 20세 첩이 환관과 간통… 측은히 여겨 ‘살려줘라’ 선처

    # 환관과 사통한 첩을 살려준 정종 정종의 아들 중에는 왕세자가 되려다 죽임을 당한 불노보다 더 불행한 삶을 산 아들도 있었다. 지운이라는 인물이었다. 정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뒤에 인덕궁에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한 여인을 품었다. 그녀는 인덕궁 소속의 여종 기매였고, 그녀가 낳은 아들이 바로 지운이었다. 그런데 기매는 지운을 낳은 뒤에 궁궐을 발칵 뒤집을 만한 섹스 스캔들에 휘말렸다. 이 사건에 대해 실록은 태종 17년(1417년) 8월 8일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환자 정사징을 베었다. 정사징은 고려 공양왕 때부터

    문화일보 | 2025-07-04 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