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기획·고정물

S010202530 이기봉의 풍수이야기
22 | 생성일 2025-01-06 11:41
  • <22> 경주 시내 신라의 무덤과 행주형 (行舟形)[이기봉의 풍수이야기]

    <22> 경주 시내 신라의 무덤과 행주형 (行舟形)

    경주 읍치의 풍수 점수는 0점이기 때문에 다양한 비보풍수를 만드는 데 걸림돌이 거의 없다. 게다가 천년 신라의 수도였으니 이야기의 소재도 많고, 그에 대한 비보풍수의 옳고 그름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방법도 없다. 그러니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는 이야기 구조만 탄탄하면 새로운 설로 인정받기가 쉽다. 요즘도 인터넷에서 검색되는 신문이나 여행기 곳곳에서 경주의 새로운 비보풍수 이야기가 자주 발견되는데, 대표적인 사례는 이렇다. 통일신라의 국운이 기울어 가던 후삼국 시대, 신라의 임금과 고위직 대신들은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자리다툼

    문화일보 | 2025-06-23 11:29
  • <21> 경주 시내 신라의 무덤과 비봉형(飛鳳形) 비보풍수[이기봉의 풍수이야기]

    <21> 경주 시내 신라의 무덤과 비봉형(飛鳳形) 비보풍수

    경주 시내의 거대한 신라 고분군에 대한 비보풍수 이야기의 두 번째 버전이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만부(李萬敷·1664∼1732)가 경주를 여행하고 쓴 ‘동도잡록(東都雜錄)’에 이렇게 전한다. “경주읍성의 남문 밖에는 흙 둔덕이 수십여 개 있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경주(月城)의 형세가 봉황이 날아가는 비봉형(飛鳳形)이기 때문에 이것(흙 둔덕)을 만들어 봉황의 알을 상징하게 하여 지기(地氣)를 누르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한다.” 경주읍성의 남문 밖에 있는 흙 둔덕 수십여 개는 모두 신라의 거대한 고분이다. 그런데 신라의 고분으로 보지 않

    문화일보 | 2025-06-16 11:49
  • <20> 경주 시내 신라의 무덤과 반역 압승 (壓勝)[이기봉의 풍수이야기]

    <20> 경주 시내 신라의 무덤과 반역 압승 (壓勝)

    삼면이 하천으로 둘러싸인 평지에 들어선 경주읍성처럼 주산-좌청룡-우백호-안산 어느 하나도 갖추지 못한 풍수 점수 0점인 지역에서는 네 요소 중 일부를 조산(造山)이나 비보숲으로 만들어 보충하더라도 한계가 있다. 그래서 이들 요소가 전혀 등장하지 않거나 아무런 상관이 없음에도 들으면 마치 풍수의 의미 구조가 듬뿍 담겨 있는 이야기처럼 빠져드는 별의별 비보풍수를 만날 수 있다. 그중 하나인 ‘동경잡기’(1699)에 수록된 경주부윤 권이진(1668∼1734)의 ‘동경잡기간오(東京雜記刊誤)’에 이렇게 전한다. ‘봉황대 근처에 조산이 30여

    문화일보 | 2025-06-09 11:47
  • <19> 풍수 점수 0점의 경주읍성과 풍수 인식의 시작[이기봉의 풍수이야기]

    <19> 풍수 점수 0점의 경주읍성과 풍수 인식의 시작

    고려 말에 축조된 경주읍성은 형산강(서)-남천(남)-북천(북) 세 하천으로 둘러싸인 완전 평지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아 풍수 점수를 매기면 0점이다. 하지만 세종 때부터 시작돼 조선 후기에는 풍수가 고을의 중심지와 관아의 권위 표현에 절대적인 기준이 되자 어떻게든 풍수의 명당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나타났다. 그렇다고 풍수의 명당 형국을 찾아 읍성을 옮기지는 못하고 대신 지기(地氣)의 흐름인 지맥을 새롭게 인식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경주의 읍지인 ‘동경잡기(東京雜記)’(1669) 산천 항목의 명활산 부분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명활산

    문화일보 | 2025-06-02 11:38
  • <18> 거제, 더 좋은 풍수의 명당을 찾아서[이기봉의 풍수이야기]

    <18> 거제, 더 좋은 풍수의 명당을 찾아서

    ‘문종실록’ 1451년(문종 1) 5월 6일 기록에 거제 백성들의 탄원서가 나온다. ‘우리 고을은 왜구 때문에 150년 이상 거창현에서 더부살이를 하다가 1422년이 되어서야 겨우 섬으로 돌아와 수월리에 목책을 세워 거제현의 새 중심지를 건설했습니다. 한데 제대로 정비할 틈도 없이 1426년에 사등리로 고을 중심지를 옮기게 되어 관아를 짓는 데도 매우 힘들었고, 읍성도 그로부터 22년이 지난 1448년에야 겨우 완성하였습니다. 그런데 또 도체찰사 정분이 새 읍성 터를 살펴보고는 고정리로 고을 중심지를 옮기라고 합니다. 우리 고을의

    문화일보 | 2025-05-26 11:42
  • <17> 풍수읍성이 거부되다[이기봉의 풍수이야기]

    <17> 풍수읍성이 거부되다

    ‘문종실록’ 1451년(문종 1) 11월 5일에 기록된 전라도 낙안군 향리들의 보고 내용은 이렇다. ‘낙안읍성 안에 우물과 샘이 없으니 고을의 중심지를 옮기고 싶습니다.’ 세종이 승하한 지 1년 9개월이 조금 더 지난 뒤의 일이다. 문종은 바로 결정을 내리지 않고 공조판서인 정인지에게 의견을 물었고, 정인지는 단호하게 이런 의견을 개진했다. “낙안읍성은 옛날에 세종 임금님의 명을 받은 읍성 터 선정의 최고 전문가 최윤덕·정흠지·박곤이 살펴보고 심사숙고하여 정한 곳입니다. 이제 와서 낙안군의 향리 수십 명이 탄원서를 올렸다고 하여 갑

    문화일보 | 2025-05-19 11:33
  • <16> 낙안읍성, 고을 풍수의 시작[이기봉의 풍수이야기]

    <16> 낙안읍성, 고을 풍수의 시작

    ‘세종실록’ 1424년(세종 6) 9월 4일에 기록된 전라도 관찰사의 보고는 이렇다. ‘전라도 낙안군의 읍성은 흙으로 쌓은 것인데, 낮고 작아서 만약 왜구가 쳐들어온다면 지키기가 어려우니 옛터를 조금 넓히고 돌을 섞어 성을 쌓게 해주십시오.’ 흙으로 만든 낙안의 옛 읍성은 보성군 벌교읍의 고읍리에 있었다. 같은 해 10월 1일에 낙안에 완성됐는데, 고읍리가 아니라 순천시 낙안면의 동내리와 서내리에 있는 낙안읍성이다. 전라도 관찰사는 옛 읍성을 넓혀 쌓게 해달라고 요청했는데, 중앙정부가 새로 터를 잡아서 옮겨 쌓게 한 것이다. 낙안읍

    문화일보 | 2025-05-12 11:45
  • <15> 태종 때 건설한 무장읍성, 풍수 점수는 0점이었다[이기봉의 풍수이야기]

    <15> 태종 때 건설한 무장읍성, 풍수 점수는 0점이었다

    태종 이방원(재위 1400∼1418)은 중앙집권국가를 완성하기 위해 지방통치제도를 적극적으로 개편했다. 첫째, 그때까지도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고을의 상당수를 혁파하고 지방관이 파견된 고을의 영역으로 편입시켰다. 둘째, 지방관의 가장 낮은 등급을 종7품의 감무(監務)에서 종6품의 현감(縣監)으로 올려 고을 향리들에 대한 장악력을 높여줬다. 셋째, 두 개의 작은 고을을 하나로 합해 지방통치의 행정적 효율을 높였다. 하지만 세 번째 정책은 향리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얼마 되지 않아 대부분 실패하고 아주 일부만 성공했다. 전라도의 무장현

    문화일보 | 2025-04-28 11:33
  • <14> 고려의 지방도시 경주읍성·상주읍성과 풍수[이기봉의 풍수이야기]

    <14> 고려의 지방도시 경주읍성·상주읍성과 풍수

    고려에서는 남경, 서경의 대화궁, 강화도성 등 새로운 수도를 건설할 때마다 아무리 급하고 어려운 상황에 처했더라도 모두 풍수의 명당 논리에 따라 이뤄졌다. 공민왕과 우왕의 고려 말,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천도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됐고, 이때도 풍수의 명당 논리를 기본 전제로 하였다. 이궁 등의 새로운 궁궐과 그에 준하는 임금 관련 건축 공간의 선택과 건설에도 당연히 풍수의 명당 논리를 따랐다. 이 정도면 고려는 풍수의 나라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고 지방도시도 다 그랬을 것 같다. 경상도의 명칭은 경주의 ‘경’자와 상주의 ‘상’자를 따

    문화일보 | 2025-04-21 11:38
  • <13> 조선의 수도 서울의 좌조우사와 전조후시[이기봉의 풍수이야기]

    <13> 조선의 수도 서울의 좌조우사와 전조후시

    조선의 수도 서울 도시계획의 근간은 하늘-산-궁궐의 3단계 풍경을 극대화하기 위한 궁궐의 위치와 간선 도로망을 결정한 풍수의 명당 논리다. 풍수사상이 중국에서 기원했지만 이런 도시는 중국의 역대 수도에 존재한 적이 없고 중국 고대의 이상적 수도계획을 담은 ‘주례’의 ‘고공기’에도 없으니, 중국으로부터 배웠거나 모방했다고 볼 수 없다. 게다가 다른 국가나 문명권에서도 발견되지 않으니,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창조된 것이다. 풍수의 명당 논리에 따라 도시계획의 근간을 만든 후 ‘고공기’의 도시계획 일부를 받아들인 것이, 종묘는 왼쪽(동)

    문화일보 | 2025-04-14 11:42
  • <12> 장풍국의 땅, 서울은 방어력이 높았는가?[이기봉의 풍수이야기]

    <12> 장풍국의 땅, 서울은 방어력이 높았는가?

    풍수 관련 책이나 영상에서는 산과 산줄기로 둘러싸인 장풍국(藏風國)의 땅은 방어에 유리하며, 장풍국의 땅에 자리 잡은 조선의 수도 서울은 천혜의 요새로서 방어력이 아주 높은 것처럼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란 두 번의 대규모 전쟁 경험은 서울의 방어력이 높다는 선험적 인식을 철저하게 깨부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렇게 방어력이 높은 곳이라면 임금은 다른 곳으로 피란을 가더라도 상당수의 군사가 남아 방어전을 펼치며 적군에 최대한 피해를 줘 어떻게든 전쟁을 유리하게 만들려고 시도했어야 하는데, 누구나 알고 있듯이 그런 적이 없다. 이런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아

    문화일보 | 2025-04-07 11:44
  • <11> 서울의 장풍득수(藏風得水)[이기봉의 풍수이야기]

    <11> 서울의 장풍득수(藏風得水)

    풍수(風水)는 바람을 막고 물을 얻는다는 장풍득수(藏風得水)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그리고 생기(生氣)는 바람을 만나면 흩어지고 물을 만나면 멈추기 때문에 바람을 막고 물을 얻는 곳이 풍수의 명당이라고 한다. 뭔가 특별한 힘이 느껴지고 무척이나 신비롭게 들릴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서울의 장풍득수에 적용하면 필자에겐 별로 어렵지 않은 원리를 특별하고 신비롭게 포장한 말일 뿐이다. 수도 건축물의 권위를 가장 빨리 인식하는 감각인 시각적 관점에서 ‘주산(主山)-좌청룡-우백호-안산(案山)’의 산과 산줄기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서울의 주산인 북악산은 하늘-산-궁궐의 3단계 풍경에서

    문화일보 | 2025-03-31 11:28
  • <21> 경주 시내 신라의 무덤과 비봉형(飛鳳形) 비보풍수[이기봉의 풍수이야기]

    <21> 경주 시내 신라의 무덤과 비봉형(飛鳳形) 비보풍수

    경주 시내의 거대한 신라 고분군에 대한 비보풍수 이야기의 두 번째 버전이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만부(李萬敷·1664∼1732)가 경주를 여행하고 쓴 ‘동도잡록(東都雜錄)’에 이렇게 전한다. “경주읍성의 남문 밖에는 흙 둔덕이 수십여 개 있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경주(月城)의 형세가 봉황이 날아가는 비봉형(飛鳳形)이기 때문에 이것(흙 둔덕)을 만들어 봉황의 알을 상징하게 하여 지기(地氣)를 누르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한다.” 경주읍성의 남문 밖에 있는 흙 둔덕 수십여 개는 모두 신라의 거대한 고분이다. 그런데 신라의 고분으로 보지 않

    문화일보 | 2025-06-16 11:49
  • <22> 경주 시내 신라의 무덤과 행주형 (行舟形)[이기봉의 풍수이야기]

    <22> 경주 시내 신라의 무덤과 행주형 (行舟形)

    경주 읍치의 풍수 점수는 0점이기 때문에 다양한 비보풍수를 만드는 데 걸림돌이 거의 없다. 게다가 천년 신라의 수도였으니 이야기의 소재도 많고, 그에 대한 비보풍수의 옳고 그름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방법도 없다. 그러니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는 이야기 구조만 탄탄하면 새로운 설로 인정받기가 쉽다. 요즘도 인터넷에서 검색되는 신문이나 여행기 곳곳에서 경주의 새로운 비보풍수 이야기가 자주 발견되는데, 대표적인 사례는 이렇다. 통일신라의 국운이 기울어 가던 후삼국 시대, 신라의 임금과 고위직 대신들은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자리다툼

    문화일보 | 2025-06-23 11:29
  • <20> 경주 시내 신라의 무덤과 반역 압승 (壓勝)[이기봉의 풍수이야기]

    <20> 경주 시내 신라의 무덤과 반역 압승 (壓勝)

    삼면이 하천으로 둘러싸인 평지에 들어선 경주읍성처럼 주산-좌청룡-우백호-안산 어느 하나도 갖추지 못한 풍수 점수 0점인 지역에서는 네 요소 중 일부를 조산(造山)이나 비보숲으로 만들어 보충하더라도 한계가 있다. 그래서 이들 요소가 전혀 등장하지 않거나 아무런 상관이 없음에도 들으면 마치 풍수의 의미 구조가 듬뿍 담겨 있는 이야기처럼 빠져드는 별의별 비보풍수를 만날 수 있다. 그중 하나인 ‘동경잡기’(1699)에 수록된 경주부윤 권이진(1668∼1734)의 ‘동경잡기간오(東京雜記刊誤)’에 이렇게 전한다. ‘봉황대 근처에 조산이 30여

    문화일보 | 2025-06-09 11:47
  • <19> 풍수 점수 0점의 경주읍성과 풍수 인식의 시작[이기봉의 풍수이야기]

    <19> 풍수 점수 0점의 경주읍성과 풍수 인식의 시작

    고려 말에 축조된 경주읍성은 형산강(서)-남천(남)-북천(북) 세 하천으로 둘러싸인 완전 평지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아 풍수 점수를 매기면 0점이다. 하지만 세종 때부터 시작돼 조선 후기에는 풍수가 고을의 중심지와 관아의 권위 표현에 절대적인 기준이 되자 어떻게든 풍수의 명당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나타났다. 그렇다고 풍수의 명당 형국을 찾아 읍성을 옮기지는 못하고 대신 지기(地氣)의 흐름인 지맥을 새롭게 인식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경주의 읍지인 ‘동경잡기(東京雜記)’(1669) 산천 항목의 명활산 부분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명활산

    문화일보 | 2025-06-02 11:38
  • <18> 거제, 더 좋은 풍수의 명당을 찾아서[이기봉의 풍수이야기]

    <18> 거제, 더 좋은 풍수의 명당을 찾아서

    ‘문종실록’ 1451년(문종 1) 5월 6일 기록에 거제 백성들의 탄원서가 나온다. ‘우리 고을은 왜구 때문에 150년 이상 거창현에서 더부살이를 하다가 1422년이 되어서야 겨우 섬으로 돌아와 수월리에 목책을 세워 거제현의 새 중심지를 건설했습니다. 한데 제대로 정비할 틈도 없이 1426년에 사등리로 고을 중심지를 옮기게 되어 관아를 짓는 데도 매우 힘들었고, 읍성도 그로부터 22년이 지난 1448년에야 겨우 완성하였습니다. 그런데 또 도체찰사 정분이 새 읍성 터를 살펴보고는 고정리로 고을 중심지를 옮기라고 합니다. 우리 고을의

    문화일보 | 2025-05-26 1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