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기획·고정물
이기봉의 풍수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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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신라의 사찰과 양택풍수
풍수가 중국에서 전래돼 정착한 것인가? 자생적으로 발생해 중국의 풍수와 결합된 것인가? 이 질문에 분명한 답을 줄 수 있는 문헌 기록은 전해지지 않아 유적을 통해 추적해 볼 수밖에 없다. 무덤의 경우 풍수의 흔적은 백제에서는 사비시대(538∼660)의 부여 고분군부터, 신라에서는 540년 법흥왕릉부터 찾을 수 있다. 600년대 후반과 700년대의 교종 오교(五敎) 중 풍수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사찰은 계율종의 통도사와 화엄종의 부석사이고, 전형적인 풍수의 명당 형국을 띠고 있는 사찰은 계율종의 경복사와 법상종의 금산사다. 800년
문화일보 | 2025-12-29 10:57 -
<47> 감은사터, 양택풍수의 흔적이 보이다
13.4m인 경주 감은사지삼층석탑은 높이 81m 또는 67m의 황룡사구층목탑을 비롯해 시내의 평지 사찰에 있던 거대한 탑보다 높이가 훨씬 낮고 작다. 그럼에도 그 사실에 주목하지 못하게 만든 이유가 두 가지 있다. 첫째, 경주 시내의 거대한 목탑들이 터만 남고 모두 사라져 직접 비교하며 느껴 볼 수 없다. 둘째, 감은사지삼층석탑을 가까이서 보면 높고 육중한 느낌을 받도록 교묘하게 만들어, 이곳을 방문한 대다수의 사람이 그렇게 관찰했다. 감은사지삼층석탑이 높고 크지 않음을 아는 방법은 의외로 쉽다. 서남쪽 100m 지점의 감은로에 서
문화일보 | 2025-12-22 10:55 -
<46> 풍수와 산도(山圖), 그리고 대동여지도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풍수의 명당자리를 골라 무덤을 만드는 것은 6세기 중반 이후 시작됐다. 하지만 그것이 과열 양상을 보여 개인 또는 가문 사이에 격렬한 싸움을 벌인 시기는 훨씬 늦은 조선 후기다. 무덤의 명당자리를 놓고 다투며 지방관에게 최종 판결을 요청하는 송사(訟事)가 비일비재했고, ‘산소 자리(山)를 놓고 벌이는 송사(訟)’라는 의미로 산송(山訟)이라고 불렀다. 산송이 너무 많아 지방관의 업무 수행에 지장을 초래한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산송의 격화는 죽은 조상과 살아있는 후손의 기운이 서로 응한다는 동기감응설(
문화일보 | 2025-12-15 11:00 -
<45> 법흥왕릉과 진흥왕릉, 신라 최초의 음택풍수 흔적을 만나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1)에는 신라 왕릉이 10개밖에 기록돼 있지 않다. 고려와 조선 초를 지나며 그 위치를 잃어버린 것이 많았다. 10개 중에 법흥왕릉·진흥왕릉도 포함돼 있는데, 태종무열왕릉과 함께 서악리에 있다고 나온다. 경주시 효현동과 서악동에 법흥왕릉·진흥왕릉이라 전해지는 무덤이 있지만, 조선 후기에 비정된 무덤이다. 고고학계에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위치 기록과 무덤의 규모를 고려해 태종무열왕릉 뒤쪽으로 4개의 초초대형 무덤이 일렬로 늘어선 서악동고분군에 있는 것으로 보고 있고, 필자도 동의한다. 무덤의 규모라는 차원
문화일보 | 2025-12-08 10:53 -
<44> 음택풍수의 출발, 무엇으로 살펴볼 것인가
땅속을 돌아다니는 생기(生氣)는 바람을 만나면 흩어지고 물을 만나면 멈추기 때문에 바람을 막고 물을 얻는 곳이 풍수의 명당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명당을 찾아 무덤을 만들고, 거기에서 솟아나는 생기의 힘을 얻어 자손들의 삶에 부귀영화 같은 뭔가 좋은 일이 생길 수 있게 하려는 것이 음택풍수(陰宅風水)의 목적이다. 조상 무덤의 명당 여부와 그 자손들에게 발생한 길흉화복의 인과관계에 대한 설명은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믿음의 문제다. 믿는 사람에게는 그럴듯한 설명으로 들리지만,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원래부터 받아들일 마음이 없으니
문화일보 | 2025-12-01 11:03 -
<43> 중국 황제릉의 음택풍수
2023년 9월, 오랜만에 필자를 놀라게 만든 연구 성과의 책을 만났다. ‘중국황제릉, 은나라에서 청나라까지의 30년 여정’(장경희)으로, 저자가 현재까지 알려진 중국의 모든 황제릉을 30년간 직접 답사하고 자료를 수집 분석해 펴낸 책이다. 중국의 황제릉 중 필자가 직접 가본 곳은 시안(西安) 근처의 진시황릉, 인촨(銀川) 근처의 서하왕릉, 베이징(北京) 근처의 명십삼릉과 청동릉, 초기 수도 선양(瀋陽)에 있는 청 태조의 복릉과 태종의 소릉뿐이다. 방송이나 유튜브에서 중국 황제릉 관련 영상을 열심히 찾았지만, 관심 가진 사람이 적어
문화일보 | 2025-11-24 11:30 -
<42> 구리시의 동구릉, 풍수의 명당 조선왕릉의 구조와 풍경
2009년 조선 왕릉 40기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왕릉이란 왕과 왕비(대한제국의 황제와 황후 포함)의 무덤으로, 모두 풍수의 명당 논리에 따라 터를 잡아 조성했다. 한곳에 모여 있지 않고 서울을 중심으로 흩어져 있는데, 그중 가장 많은 왕릉이 모여 있는 곳은 구리시의 동구릉(東九陵)이다.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문종(5대)과 왕비의 현릉, 선조(14대)와 두 왕비의 목릉, 인조(16대)와 왕비의 휘릉, 현종(18대)과 왕비의 숭릉, 경종(20대)과 왕비의 혜릉, 영조(21대)와 왕비(계비)의 원릉, 추존왕 문조(효명세자
문화일보 | 2025-11-17 11:37 -
<41> 평지의 거대한 신라 고분군과 풍수
지금은 화장(火葬)이 대세지만, 20여 년 전만 해도 매장이 일반적이었다. 개화기부터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온 근대화와 서구화, 1960년대부터 일어난 급속한 경제성장과 도시화 그리고 민주화도 오랫동안 매장 풍습을 바꾸지 못했다. 그만큼 매장이 강력한 문화유전자로 정착해 있었다는 의미인데, 그냥 풍습이라고만 표현하면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든다. 풍수의 명당 논리에 따라 산속에 매장하는 풍습이 유행하면서 조상의 무덤을 산소(山所)라고 불러 왔다고 하는 게 더 적합할 듯하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역사 속에 존재했던 무덤은 다 산소라고 부를
문화일보 | 2025-11-10 11:30 -
<40> 고려 풍수의 특징, 국도풍수
한때 국도풍수(國都風水)라는 말이 유행했다. 고려에서 국도, 즉 수도를 선정할 때 풍수의 논리가 중요한 역할을 했던 역사를 연구하면서 나온 개념이다. 후고구려의 개성 도성이 풍수의 논리로 만들어지고, 고려가 이를 계승하면서 국도풍수의 전통이 시작되었다. 고려의 남경 건설, 강화 천도, 다양한 천도 논의, 조선의 한양 천도 등에서 풍수가 중요한 배경 논리로 등장했으니 국도풍수가 문화유전자로 정착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국도풍수의 유행은 지방 고을의 읍치 선정에서도 풍수가 고려 시대 또는 더 앞선 시기부터 적용됐을 것이라는 암묵적인 동의
문화일보 | 2025-11-03 11:37 -
<39> 대몽전쟁기 강화 천도와 네 번째의 풍수도시
고려사는 1231년 8월 29일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이 압록강가의 함신진(咸新鎭·의주)을 포위하고 평안북도의 철주(鐵州·철산)를 함락시켜 도륙했다고 몽골의 1차 침략을 전하고 있다. 고려군은 성곽 방어전과 대규모 전면전을 병행했지만, 개성도성이 포위되자 몽골의 가혹한 요구 조건을 들어주기로 하면서 항복하고, 1232년 1월 11일에 철군하는 몽골군을 위로해 전송하면서 1차 전쟁이 끝났다. 하지만 고려 정부는 몽골과의 전쟁이 다시 시작될 것이라고 여겼고, 몽골군이 돌아간 지 한 달 조금 넘은 2월 20일에 천도를 논의했다. 이후
문화일보 | 2025-10-27 10:56 -
<38> 묘청의 서경천도운동과 세 번째의 풍수도시
‘고려사’는 1135년(인종 13년) 1월 4일 ‘묘청·유참 등이 서경을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켰다’고 전한다. 고려 정부는 1월 7일 김부식을 원수로 삼아 토벌하게 했고, 21일 반란군이 묘청·유참을 참수해 투항을 요청해 왔지만 정부군이 받아주지 않았다. 이에 조광 등을 중심으로 장기 항전에 돌입했고, 1년이 지난 1136년 2월 19일에서야 서경을 함락해 반란을 진압했다. 성공하지 못한 반란이기 때문에 ‘묘청의 난’이라 부르는데, 서경 세력이 풍수지리설에 의거해 임금 인종에게 서경천도운동을 벌이다가 실패하자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문화일보 | 2025-10-20 10:55 -
<37> 고려의 남경 건설과 두 번째의 풍수 도시
918년 6월 15일, 역성혁명을 성공시킨 왕건은 고구려를 계승하겠다는 이념을 표방해 국호를 고려로 정했다. 그리고 고려의 건국이 하늘(天)이 내려준(授) 천명(天命)으로 이뤄진 것임을 만천하에 선포하기 위해 연호를 천수(天授)로 했다. 919년 1월에는 궁예의 국가에서 왕건의 국가로 바뀌었음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의미에서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닮은 철원에서 풍수 도시 개성으로의 천도를 단행했다. 936년 8월 6일, 왕건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신검의 후백제군과 천하의 패권을 놓고 벌인 일리천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후삼국을 통일했다.
문화일보 | 2025-10-13 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