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카페>궁극적 행복은 가벼움… ‘삶의 찌꺼기’ 마음서 비워라

  • 문화일보
  • 입력 2015-09-30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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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일러스트 = 안은진 기자 eun0322@


김정탁의 장자 이야기 - ⑤ 하고자 함이 없는 ‘無爲’

유(儒)·불(佛)·도(道)는 중국은 물론이고,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전통 사상이다. 이 중에서 불가는 인도에서 전해졌기에 엄격한 의미에서 보면 수입 사상이지 전통 사상은 아니다. 그러니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오리지널한 전통 사상은 유가와 도가뿐이다. 그런데 선(禪)불교는 인도의 대승불교와 중국의 노장사상이 결합해서 생겨난 중국불교이다. 따라서 선불교는 인도불교에 비해 도가적 성격이 짙다. 또 남송(南宋) 이후 오랫동안 중국 사상계를 평정한 주자학과 양명학은 원시유가에 뿌리를 둔 철학이다. 그래서 주자학과 양명학은 유가 계열이지만 그 중 양명학은 불가 내지 도가적 성격이 짙다. 정리해 보면 중국사상의 커다란 두 축은 공자·맹자로 대표되는 유가(儒家)와 노자·장자로 대표되는 도가(道家)이다.

유가와 도가의 근본적 차이는 무엇일까? 여러 차원에서 그 차이를 설명할 수 있지만 유위(有爲)·무위(無爲)의 틀이 설명력이 가장 높다고 본다. 유위란 ‘하고자 함이 있음’을 뜻한다. 공자의 키워드인 인(仁), 또 이를 확장한 맹자의 인의예지(仁義禮智)는 ‘하고자 함이 있는’ 개념들이다. 이 개념들은 어떤 의지를 반영하거나, 특정한 목적을 지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조직엔 기획부서가 있는데 기획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모든 일은 유위에 따른 것이다. 조직이 현대사회의 한 특징인 점을 감안하면 회사, 군대, 정부와 같은 조직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거의가 유위에 입각해 있다. 이런 때문인지 사람들은 무위에 입각해선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무위를 아예 일을 하지 않는 개념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다.

무위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하되 단지 하고자 함이 없을 뿐’이다. 무위를 따르면 일을 무리하게 추진하지 않고, 자연의 순리대로 처리한다. 자연의 순리란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오는 것이다. 이런 사계의 움직임과 변화는 누가 기획하고, 관리하는 게 아니다. 근대에 들어 과학이 발달하면서 인간은 이성을 통해 우주자연의 이치를 파악하려고 애썼다. 그렇지만 엄청나게 큰 우주와 미묘한 자연의 이치를 이성으로 이해하고, 통제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에 도가는 무위에 따른 우주자연의 원리를 강조하고, 이를 천도(天道)로 규정한다. 그리고 천도에 따라 사람의 도리인 인도(人道), 사회운영의 원리인 치도(治道)를 전개한다. 그러기에 도가가 말하는 인도와 치도는 철저히 무위에 입각해 있다. 이것이 바로 유가와 다른 점이다.

‘배우고 때때로 그 배움을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는 ‘논어’의 잘 알려진 첫 구절이다. 이처럼 공자는 배움과, 또 그 배움을 생각하고 실천에 옮기는 일을 왜 전면에 내세운 걸까?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여기엔 공자 나름의 치밀한 의도와 전략이 숨어있다. 그렇다면 공자의 숨은 의도와 전략은 무엇일까? 그것은 오로지 배움과 그 배움을 익히는 것만이 미완의 존재에서 완성의 존재, 즉 성인(成人)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려고 하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공자는 춘추시대 사상가 중에 유일하게 교육을 강조하고 나선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공자의 이런 의도와 전략은 오랜 생명력을 지녀 왔다. 또 그것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까지도 삶의 적지 않은 시간을 교육으로 보내고 있는 게 아닌가?

장자는 공자와 다른 생각을 갖는다. 장자에 따르면 배움에 방점을 둔 공자사상은 너무나 인위(人爲)적이다. 인위는 유위의 한 형태이지만 인간이 유위를 행하면 저절로 인위가 된다. 사실 자연을 구성하는 생명체 중에 유위를 저지르는 존재는 오로지 인간뿐이다. 그런데 인간은 인위마저 부족해서 자신의 의도대로 바꾸려는 작위(作爲)도 서슴지 않는다.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들도 따지고 보면 작위에 따른 배움을 구현했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자신의 처방만이 이 난세를 구제할 수 있다는 주장을 저마다 펴지 않았는가? 물론 운 좋게 군주에 의해 자신의 주장이 채택되면 그 순간부터 본인은 물론이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도 부와 명성을 동시에 쌓는다. 조선시대 주자학이 고유의 학문적 성격을 잃고 권력 헤게모니를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면서 박제화된 것도 이와 흡사하다.

이런 현실 앞에서 장자는 춘추전국시대 어떤 사상가들보다 깊게 고민했다. 배움이란 게 원래 그런 게 아니었을 텐데 왜 이렇게 먹고사는 수단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는가 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게 마음을 비우는 작업이었다. 아무리 배움이 훌륭해도 마음을 비우지 않으면 모든 게 헛것이라는 판단이 들어서이다. 나아가 마음을 비우기 위해선 ‘내가 나를 초상치러야 한다(吾喪我)’고 파악했다. 여기서 ‘오(吾)’는 태어날 때 지녔던 ‘본래면목의 나’이고, ‘아(我)’는 살면서 ‘만들어진 나’이다. 그러니까 ‘내가 나를 초상치른다는 것’은 본래면목의 진정한 오(吾)가 만들어진 거짓된 아(我)를 마음에서 제거한다는 의미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서양철학과 심리학은 만들어진 아(我), 즉 에고(ego)내지 셀프(self)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해 왔다는 점이다.

우리들은 살면서 만들어진 아로 인해 본래면목의 오를 잊기 쉽다. 그런데 배움은 자칫 본래면목의 오를 죽이고, 만들어진 아를 여기에 채워 넣기 십상이다. 더구나 인위에 따른 배움은 더욱 그러하다. 좀 배웠다고 우쭐대는 사람이 바로 그런 존재가 아닌가? 마찬가지로 돈이 있다고 자랑하는 사람, 권력이 있다고 뽐내는 사람도 본래면목의 오를 대신해서 만들어진 아로 자신의 입장을 바꾼 사람들이다. 이렇게 보면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들도 만들어진 아만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러니 나만 옳고, 내 생각만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이것이 유위에 따른 전형적 사고방식이자 행동이다. 어떻게 자신만이 옳을 수 있는가? 오로지 작위적으로 판단했기에 이런 소신을 펼 수 있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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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아(吾喪我). 우리들 마음에 얼마나 와 닿는 메타포인가? 내가 나를 죽인다는 뜻인데 이렇게 직설적으로 표현했다면 만들어진 아를 없애야 한다는 생각이 마음에서 크게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불가에선 이를 무아(無我), 몰아(沒我) 등으로, 유가에선 무기(無己) 등으로 표현한 바 있지만 오상아 개념에 비해 그 미학성이 현저히 떨어진다. 그런데 장자는 왜 이런 식의 수사를 동원한 것일까? 아마도 ‘머리와 머리 간(brain-to-brain)의 커뮤니케이션’보다는 ‘가슴과 가슴 간(heart-to-heart)의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싶어서 그랬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장자의 관심은 이론과 사상과 같은 ‘관념’이 아니라 ‘실천’이었다. 사실 소통이론과 소통사상을 아무리 잘 펼치더라도 정작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없다면 그야말로 소용없는 일이 아닌가? 이 때문에 장자를 진정한 의미에서 소통의 사상가라고 말할 수 있다.

소통의 사상가로서의 진면목은 ‘장자’ 도입부인 ‘대붕의 비상(飛上)’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장자는 여기서 무위에 입각한 소통을 가능한 한 구현하고자 애썼다. 이 점이 배움(學)과 익힘(習)이라는 유위의 개념에 따라 ‘논어’ 도입부를 장식한 공자와 비교된다.



북쪽바다(北冥)에 곤(鯤)이란 물고기가 산다.

크기가 몇 천리 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크다.

그런데 곤이 변해 붕(鵬)이란 새가 된다.

길이도 몇 천리 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길다.

힘차게 날아오르면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다.

바다 기운이 움직이면

남쪽 바다(南冥)로 날아간다.

남쪽 바다가 곧 하늘의 연못(天池)이다.



얼핏 보면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내용이다. 물고기가 어떻게 하늘을 나는 새가 될 수 있을까? 게다가 그 크기는 몇 천리가 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큰데 그 무게로 어떻게 날 수가 있을까? 그런데 여기엔 장자의 치밀한 의도가 숨어있다. 그것은 만들어진 아를 버리면 내 몸은 너무나 가벼워진다는 사실이다. 삶의 궁극적인 행복은 이런 가벼움에 있다. 그러니 물고기도 그 크기로 인해 아무리 무겁더라도 오상아의 상태에 이르면 큰 새로 변해서 하늘을 훨훨 날 수 있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살면서 만들어낸 온갖 찌꺼기들을 마음에서 덜어내면 마음의 홀가분함은 그 어디에도 비할 바가 아니다. 이것이 바로 무위에 따른 삶을 살 때 비로소 느낄 수 있는 홀가분함이다.

이런 홀가분함을 지닐 때 우리는 정말로 큰 꿈을 이룰 수 있다. 그 꿈은 돈, 명예, 권력 같은 세속적 성공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가장 완전한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즉 성인이 되는 것이다. 이런 완성된 인간이 되었을 때 비로소 도남(圖南), 즉 큰 꿈을 펼칠 수 있다. 그 꿈은 북쪽 깊은 바다(北冥)에서 출발하여 하늘의 호수(天池)인 남쪽 깊은 바다(南冥)에 이르는 것이다. 북쪽 깊은 바다는 물고기 곤이 살았던 곳이다. 이 바다는 낮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없다. 날아서 높은 곳에 이르러야만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이것이 물고기 곤이 새 붕이 된 이유이기도 하다. 이제 물고기는 새가 되어 높이 난 뒤에 하늘의 호수로 이를 수 있다는 뜻인데 여기서 하늘의 호수는 불가의 해탈한 경지에 해당하고, 기독교의 천당(天堂)인 셈이다.

이제 무위에 따른 장자의 마지막 전략을 살펴보자. 공자는 완성된 인간으로 가는 길로서 배움과 그 익힘을 들었다. 장자가 볼 때 그것은 너무나 유위적이다. 그렇다면 완성된 인간으로 가는 무위에 따른 길은 무엇일까? 장자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회전해서 올라간다(搏扶搖羊角)’고 말하면서 그것을 바람(風)으로 상정했다. 그렇다면 바람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그것은 가장 자연스러운 존재를 상징한다. 바람은 어디에서 생겨나는지, 또 어디로 사라지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더욱 더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바람은 인간세상에서는 무엇을 상징할까? 공자가 말하는 식의 교육은 분명 아닐 것이다. 혹시 자연의 이치를 유심히 관찰하면서 거기서 무언가를 터득하는 게 바람이 아닐까? 그렇다면 자연의 이치인 천도에서 인간이 가야 할 길, 즉 인도를 찾는 사람만이 대붕이 될 수 있다는 깊은 뜻을 건질 수 있다.(문화일보 9월 2일자 24면 4회 참조)

성균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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