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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귀환 D-4, 무기력 한국[뉴스와 시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사업가 시절이던 1990년 플레이보이지와 인터뷰를 했다. 그는 대통령이 되면 “미국으로 들어오는 모든 벤츠 차량과 일본 제품에 세금을 부과할 것”이라고 했고, “미국이 이른바 동맹국이라 불리는 일본이나 서독, 사우디아라비아, 한국 등과 같은 나라들의 호구가 되고 있다”고 했다. 고율의 관세 부과, 그리고 동맹에도 가차없는 방위비(비용) 분담 압박은 이미 35년 전부터 트럼프 머릿속에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중국의 톈안먼(天安門) 사태와 소련의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대한 평가다. 그는 인터뷰 9개월 전 일어난 톈안먼 사태에 대해 “그들은 악랄하고 끔찍했지만 강력한 힘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지금 미국은 나약한 나라로 인식되고 있다”고 했다. 냉전 종식과 소련 체제 해체에 나선 고르바초프에 대해서는 “그는 엄청난 약점을 보였다. 소련을 파괴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트럼프는 자신의 정치적 잠재력에 대해 “나는 무엇을 팔아야 할지,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고 했다. 트럼프는 2016년, 그리고 2024년 대선 승리로 자신의 통찰력을 증명했다. 그의 집권 1기, 그리고 지난 대선 때 언행은 그의 정치적 식견이 1990년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줬다.영국의 저널리스트 기디언 래크먼은 ‘더 스트롱맨’ 책에서 트럼프에 대해 ‘집권 4년간 본능적으로 민선 대통령보다 권위주의적 스트롱맨에 가까웠다’고 썼다. 그리고 스트롱맨의 통치 방식으로 네 가지를 제시했다. 개인숭배 조장, 법치주의 무시, 엘리트가 아닌 진짜 국민을 대변한다고 주장(포퓰리즘), 공포 및 민족주의 정치가 그것이다. 트럼프에 대한 민주당의 공격, 기성 언론의 비판, 정치학자들의 우려를 범주화하고 미국식으로 변주하면 모두 저 카테고리에 들어간다. 그렇게 미국은, 그리고 세계는 4일 후 더 정제되고 독해진 스트롱맨의 귀환을 지켜보게 됐다.스트롱맨의 귀환은 우연히 이뤄진 게 아니다.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스트롱맨의 등장을 막기에 역부족인 민주주의 제도의 본질적 한계, 스트롱맨의 언행에 계속 에너지를 불어넣고 있는 민초들의 ‘팍팍한 삶’, 지속적으로 일반 국민의 보편 정서와 괴리되고 있는 정치인들의 행보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여기에 초강대국이자 국제질서의 중심인 미국의 위상을 스스로 내려놓는 판단이 더해졌다. ‘세계의 경찰’이 되지 않겠다는 말은 전 세계를 통제하기에 역부족이라는 고백이고, 주변 국가들에 시비 거는 상황은 체면을 차릴 형편이 아니라는 방증이다. 트럼프 2기는 미국 정치의 돌연변이가 아니다. 다른 스트롱맨의 등장처럼 미국의 정치·경제·사회상이 빚어낸 현상이자 자유민주적 국제질서의 위기와 민주주의 격변기의 반영이다. 지금 당장은 캐나다와 멕시코, 그린란드에 정신이 팔려 있지만 아마 머지않은 시기, 트럼프의 시야에 다시 한국이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대응에 많은 게 걸려 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한미동맹, 우리 기업들의 노력과 투자, 한반도 평화와 북핵 해법…. ‘첫 단추’가 중요하다. 스트롱맨의 보편성, 트럼프의 특수성 모두 고려해야 한다.
- 민병기 기자
- 2025-01-16 11:50
2025년 ‘내란죄’ 마녀사냥[뉴스와 시각] 역사적으로 마녀사냥의 절정기는 근대(16∼17세기) 시기였다. 중세가 아닌 이성과 과학이 중시되던 시기에 악마와 내통했다는 이유로 5만 명이 넘는 사람이 고문당하고 화형에 처해졌다. 이 시기 마녀사냥을 자행한 장본인은 이단 척결에 나선 교회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세속 권력이었다. 당시 마녀사냥은 국가와 지방정부 등이 법적 절차에 따라 진행한 공식 재판이었다. 역사적으로 이성과 계몽, 과학이 발전한 시기에 비근대적인 종교 광풍(狂風)이 분 것이다. 이를 두고 유럽사 연구의 권위자인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는 저서인 ‘마녀’에서 “세속 권력은 통치의 정당성을 확립하고 신민들을 복종시키기 위해 교회가 가진 권위를 필요로 했다”고 설명했다. 권력과 기득권을 가진 세력이 반대편을 몰아내기 위한 수단으로 마녀사냥을 악용했다는 것이다. 마녀사냥은 주로 재난 등 사회 혼란과 위기가 발생했을 때 등장했다. 마녀의 의미는 바뀌었지만, 특정 집단을 희생양 삼는 광기는 20세기에 들어서도 이어졌다. 독일 나치는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600만 명의 유대인을 살해하는 홀로코스트를 저질렀다. 반대파를 제압하기 위해 1000만 명을 숙청한 소련의 스탈린도 대표적인 마녀사냥 사례다. 마녀사냥은 1950년대 미국에서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매카시즘 열풍으로도 나타났다.문명과 야만이 뒤섞인 이 같은 마녀사냥은 선진국 반열에 올라선 2025년 대한민국에도 불어닥쳤다. 혼란과 재난은 난데없이 비상계엄을 발동한 윤석열 대통령이 불러왔지만, 이후 벌어지는 마녀사냥은 더불어민주당이 주도하고 있다. 여기에서 악마는 윤 대통령, 마녀는 윤 대통령 탄핵을 추진하는 민주당에 반대하는 모든 국민이다. 민주당은 윤 대통령에 대한 탄핵과 체포영장 집행에 협조하지 않은 모든 사람을 내란 공범으로 몰아세울 기세다. 민주당은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이 윤 대통령 체포영장 집행을 방관하고 있다며 직무유기 혐의로 고발했다. 한덕수 국무총리에 이어 최 권한대행도 탄핵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에 ‘방구석 키보드 워리어’로 활약하는 네티즌들은 계엄과 탄핵에 대해 의견을 내놓지 않은 연예인들에 대한 무차별 공격을 벌이고 있다. 이 같은 움직임에는 국정 안정을 위해 머리를 맞대야 할 좌파 지식인들도 합세했다. 민주당은 나아가 일반 국민도 카카오톡을 통해 내란 선전 관련 뉴스를 퍼 나르거나 댓글을 달면 내란선전죄로 고발하겠다고 으름장까지 놓은 상태다. 탄핵 정국을 맞은 지 한 달이 됐지만, 마녀사냥 광풍이 불어닥친 대한민국 사회는 탄핵 이전보다 더욱더 극명하게 둘로 쪼개졌다.움베르토 에코의 장편소설 ‘장미의 이름’에서 주인공인 윌리엄 수도사는 맹목적 믿음으로 똘똘 뭉쳐 마녀사냥을 자행하는 수도사들을 바라보며 “신앙과 광신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말한다. 이번 사태가 맹목적 정치 신념이 자칫 광기가 아닐지 되새겨보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 국가 미래와 민생경제는 아랑곳없이 권력 장악을 위해 여론몰이에 나서는 행태는 마녀사냥과 다를 바 없다. 이는 정치권은 물론 대중도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
- 황혜진 기자
- 2025-01-15 11:40
걱정되는 탄핵정국 종착점[뉴스와 시각] 가황(歌皇) 나훈아가 10일 고별 무대에서 “느그(정치인) 하는 꼬라지들이 정말 국가, 국민을 위한 짓거리인가. 왼쪽이 오른쪽을 보고 잘못했다고 생난리를 치고 있다”며 “지금 우리 머리 위에 폭탄이 떨어져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는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라며 여야 정치권에 쓴소리를 했다. 날벼락 같은 계엄 사태를 겪고도 국민은 뒷전이고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권력쟁탈전’에 몰두하는 여야 정치권에 대한 경고 메시지다. 이를 두고 ‘내란 세력 비호 양비론’ 운운하는 건 민심과 동떨어진 근시안적 태도다.민주주의 제도·역사 분야 권위자인 래리 다이아몬드 스탠퍼드대 교수는 신년인터뷰에서 한국 계엄 사태의 정치적 혼란을 ‘민주주의 뇌졸중’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한국 민주주의가 사망선고를 당할 뻔한 계엄 뇌졸중이 회복 단계로, 이 위기를 넘긴다고 근본적 위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면서 건강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근본적 체질 개선을 주문했다. 극단적 진영 대결·정치 양극화 속 윤석열 대통령의 독불장군식 비타협적 통치 방식에 맞서 탄핵을 조자룡 헌 칼 쓰듯 한 거야(巨野)의 의회 독재가 정면 충돌, 민주주의 가드레일이 파괴되면서 ‘계엄 뇌졸중’으로 한국 민주주의가 휘청거렸다. 탄핵 사태 직후 2배 가까이 벌어진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지지율이 비슷해지고, 윤 대통령 지지율이 계엄 사태 이전으로 회복된 여론조사 결과와 더불어,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대선 주자 지지율과 ‘절대 찍고 싶지 않은 차기 대선 주자’ 모두 압도적 1위를 차지한 것은, 탄핵소추안 통과 한 달이 지나도록 파열음과 갈등이 점점 더 증폭되는 현상을 반영한다.민주당은 이 대표 수사 검사들을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나 피고인의 일방적 주장 등으로 탄핵소추한 것을 비롯해 29건의 탄핵소추를 강행했다. 탄핵을 이처럼 남발한 정당은 동서고금 유일무이하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탄핵안 가결도 모자라 최상목 대행마저 고발하고 걸핏하면 탄핵하겠다고 겁박의 정치를 이어가는 원내 제1당에서 수권 정당 면모를 눈곱만큼도 찾기 힘들다.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institutional forbearance)’, 두 가지 규범이 민주주의 수호에 가장 핵심 역할을 한다고 했다. “상호 관용이 사라지면서 정치인들은 자제의 규범까지 저버리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승리하려는 유혹에 굴복한다. 결국, 민주주의 시스템을 전면 부정하는 반체제 집단이 등장한다”고 경고했다. 자유민주주의 위협 세력을 박멸하겠다며 군대까지 동원한 윤 대통령의 반헌법적 계엄, 검찰 독재를 박살 내겠다며 투쟁 만능의 의회 독재로 치달은 거야. 이들은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야당과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 등 여당 일부 저항으로 민주주의는 기사회생했으나 상대 정당을 건전한 경쟁자가 아니라 북한 김정은 집단보다 더 해로운 적으로 본 듯, 죽기 살기로 싸움박질만 하고 있다. 김정은이 이 상황을 팔짱 끼고 지켜보고 있다. 민주주의 위기를 근본적으로 극복할 ‘관용’과 ‘자제’의 새 리더십이 필요하다.
- 정충신 선임 기자
- 2025-01-14 11:34
본질 호도하는 ‘무안’ 삭제[뉴스와 시각] 2주 전 179명의 고귀한 생명을 앗아간 ‘무안국제공항 제주항공 참사’를 놓고 벌어진 뜬금없는 사고 명칭 논란은 유사한 참사를 막기 위해서라도 생각해볼 지점이 있다. 논란이 벌어진 타이밍은 조류 서식지로 포위돼 있는 공항의 지리적 문제점, 국제공항으로서는 부족한 활주로 길이, 인명 피해를 키운 콘크리트 구조물 등 공항 자체의 심각한 결함이 부각하던 때였다. 돌연 더불어민주당과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사고 이름에서 ‘무안’을 빼자는 여론이 형성된 것이다. 호남에 대한 지역감정을 유발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다수 언론은 ‘무안공항’을 삭제하고 ‘제주항공 참사’로 표기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무안’이 ‘제주’를 이긴 셈이다. 비난 역시 공항보다는 민간 항공사로 쏠리기 시작했다.하지만 이는 두 가지 점에서 잘못된 흐름이다. 첫째, 일반적으로 교통사고와 대형 참사는 사고 지점 명을 더 많이 사용해왔다.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2017년 충북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참사, 2023년 오송 지하차도 참사 등이 대표적이다. 미국에서도 2009년 US에어웨이 항공기가 뉴욕 허드슨강에 불시착한 사건을 ‘허드슨의 기적’(Miracle on the Hudson)이라고 부른다. 최근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에서 벌어진 테슬라 트럭의 테러도 ‘뉴올리언스 공격’(The New Orleans attack)으로 칭하고 있다. 둘째, 자칫 사고 원인과 배경을 호도할 가능성이 크다. 향후 블랙박스 분석을 통해 사고 원인이 얼마나 명확히 드러날지 장담할 순 없지만, 이번 참사는 무안공항 주변의 수많은 조류에 의한 충돌이 시발점이 됐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동체 착륙도 성공적이었다. 베테랑 기장도 참사 직전까지 최선을 다한 흔적이 있다. 만약 활주로가 더 길었다면, 콘크리트 둔덕이 없었다면 사상자는 최소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즉, 어떻게 조류 서식지 옆에 국제공항을 만들 생각을 했는지, 조류 충돌 방지를 위해 무안공항 측은 어떤 노력을 했는지, 과거 건설과 운영 과정에서 정치적 이해관계와 카르텔·특혜는 없었는지, 전남도와 무안군은 관리 감독 책임을 다했는지 등을 수사를 통해 밝혀야 하는데도 ‘무안’을 삭제함으로써 본질을 피해가려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살 만하다.무안공항은 누가 보더라도 ‘정치공항’이다. 김대중 정부의 실세였던 한화갑 전 국회의원이 주도해 1999년 착공, 2007년 개항했다. 정확한 수요 예측과 예비타당성조사는 무시됐다. 건설 과정에서도 호남 기업에 대한 특혜 시비가 반복됐던 곳이다. 완공 이후엔 항공편이 없어 ‘고추 말리는 공항’이라고 조롱을 받았다. 호남을 비하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현재 전국엔 제2, 제3의 무안공항들이 줄을 서고 있다. 새만금국제공항, 가덕도신공항, 흑산공항, 경기국제공항 등도 안전성이 의심되고 있지만, 지역의 숙원으로 포장돼 졸속 추진되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우리는 전 국민을 충격과 슬픔 속으로 몰아넣은 이번 참사에서 쓰라린 교훈을 찾아야 한다. 무안공항의 구조적·태생적 문제점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반성하지 않는다면 또 다른 사고는 시간문제일 뿐이다. 지금이야말로 성역 없는 수사가 뒤따라야 할 때다.
- 김만용 기자
- 2025-01-13 11:36
‘진짜 안전’ 사회로 가는 길[뉴스와 시각] “우리는 안전하다는 착각 속에서 살고 있을 뿐이에요.”화성 아리셀 화재 사고와 서울시청역 참사 수습이 마무리돼 가던 지난해 여름. 유족들 트라우마를 치료하던 전문가는 어렵사리 만난 자리에서 ‘가짜 안전’이란 단어를 꺼냈다. 대다수 사람은 자신이 조심하니깐 안전하고, 비극은 다른 사람의 일이라고 선을 긋는다. 이 같은 생각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세월호와 핼러윈 참사 등 숱한 재난 현장을 다녔던 그가 유족과 피해자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몰랐다”였다고 한다. 재난은 부자나 유명인사, 권력자라고 해서 피해가지 않는다. 장소를 가리지도 않는다. 나만 잘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사고도 아니다. 무안공항 제주항공 참사도 마찬가지였다. ‘재난은 랜덤’이란 냉정한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다시 큰 트라우마를 안게 됐다. 비행기란 일상적 공간에서 벌어진 참사는 슬픔의 진폭을 키웠다. 재난의 그림자는 짙다. 장례 절차는 끝났지만, 유족과 국민이 겪어내야 할 트라우마는 이제 시작됐다. 재난은 우리 사회 밑바닥을 확인하게끔 한다. 참사 현장에선 여러 가치관이 충돌한다. 정치화된 재난은 갈등과 반목을 낳았다. 이번 참사에서도 비난과 혐오 발언은 등장했다. 희생자를 위한 애도를 강요할 수 없듯이 참혹한 죽음을 조롱거리로 삼아서도 안 될 일이다. 재난 앞에서 모든 이들이 가진 조건값은 평등하다. 재난은 선진국에서도 일어난다. 한 나라의 역량은 참사 후 대응에서 드러난다. 재난 대응이 매번 완벽할 순 없다. 하지만 적어도 재난을 겪은 이들을 보살피고, 실책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진상을 규명하고, 안전 시스템을 바꾸는 노력을 할 때 사회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는 희생자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이기도 하다. 원인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는 참사는 모두에게 트라우마로 남는다. 트라우마 회복은 참사를 수용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한다. 가족을 하루아침에 잃은 사실도 받아들이기 고통스러운데 사고 원인마저 납득되지 않을 경우 유족들에겐 지옥 같은 현실만 남게 된다. 진상 조사 과정이 투명하게 공개돼 유족들이 수긍하면 이를 지켜보는 국민의 트라우마가 치유되는 데도 도움될 수 있다. 우리가 누리는 안전은 수많은 사람의 피로 일궈졌다. 재난은 무책임과 무관심을 먹고 자란다. 재난이 일어나는 걸 막을 순 없지만, 재난을 어떻게 수습할지는 우리에게 달렸다. 때로는 불편한 감정이 우리를 더 나은 곳으로 이끌어주기도 한다. 분노는 사회의 부조리를 고치는 동력이 될 수 있다. 불안은 우리를 보호해준다. 불안하기에 손을 씻고 마스크를 쓰면서 코로나19 확산을 막아냈다. 당시에도 국민이 연대하는 힘이 공동체를 지켰다. 재난과 트라우마로부터 자유로운 이는 없다. 개인의 힘만으로 극복할 수 있는 영역도 아니다. 재난이 터지면 가장 약자는 유족과 피해자다. 온 세상이 무너진 이들을 보듬는 건 우리가 서로를 지키는 일일지도 모른다. 트라우마를 이기는 힘은 결국 사회적 지지와 연대에서 나와서다. 약자를 지지하고 돕는 사회는 트라우마에 강하다. 공동체도 성숙해진다. 이때 우리는 ‘진짜’ 안전할 수 있다.
- 권도경 기자
- 2025-01-10 11:48
계엄 뭉개는 與의 뻔한 미래[뉴스와 시각] 12·3 계엄사태 이후 수세에 몰렸던 국민의힘의 기세가 최근 올랐다. 지난 6일 오전 여당 의원 44명은 서울 용산구 한남동 대통령 관저 앞에 모였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의 윤석열 대통령 체포영장 집행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김기현 전 대표는 “불법적인 수사 주체, 또 형사소송법의 명시된 조항에 위반된 압수수색 영장은 당연 무효로서 이를 저지할 권리가 모든 국민에게 있다”며 원천 무효인 사기 탄핵소추를 막겠다고 주장했다.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으로 구성된 국회 탄핵소추위원단이 윤 대통령 탄핵 사유에서 내란죄를 철회하기로 한 것을 두고도 여당은 맹공을 퍼붓고 있다. 권영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민주당은 이재명 대표의 (공직선거법 사건) 2심 판결 전에 조기 대선을 치르겠다는 목표하에 정부·여당에 일방적인 내란 프레임을 씌우고, 법치 파괴 행위를 불사하며 속도전을 내고 있다”고 말했다.공수처와 민주당 등이 여당에 빌미를 준 것은 분명하다. 공수처가 내란죄를 수사할 권한이 있는지는 초기부터 논란이 돼 왔다. 서울중앙지법이 아니라 서울서부지법에 체포영장을 청구한 점, 법원이 형사소송법 제110조와 제111조 적용을 예외로 하며 영장을 발부한 것은 윤 대통령 측의 반발을 크게 샀다. 내란죄를 탄핵 사유에서 빼는 것에는 여권 내 탄핵 찬성파에서도 비판이 나온다. 헌법재판소 심리에 걸리는 시간을 줄여 조기 대선을 조금이라도 더 당기겠다는 꼼수라는 것이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사법 리스크’를 의식하다가 절차상 하자를 만들 수 있다. 여기에 지난 주말 공개된 일부 자동응답방식(ARS) 여론조사에서 유리한 수치가 나오자 여권은 크게 고무된 분위기다.하지만 국민의힘이 애써 외면하는 중요한 변화가 있다. 계엄 이전과 이후는 완전히 다른 정치적 시간이라는 점이다. 계엄은 헌정을 중단하려는 시도였고 윤 대통령은 합의된 규칙 내에서 움직이는 ‘행위자’이기를 거부했다. 내란인지 아닌지와 관계없이 윤 대통령의 계엄 선포는 불법이었다. 계엄의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다는 것은 전문가뿐 아니라 대다수 시민이 공유하는 사실이다. 계엄 당시 발표된 포고령은 명백히 헌법을 위반해 시민의 권리를 침해했다. 공화국이라는 울타리 내에서 정치세력이 경쟁을 펼치는 것과 ‘틀’을 내 뜻대로 만들겠다는 것은 명확히 다르다. 권 비대위원장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장 중차대한 ‘법치 파괴 행위’다.그런데도 한동훈 전 대표를 제외하고 국민의힘 지도부가 제대로 사과한 적은 없다. 권 비대위원장이 취임사에서 “비상계엄과 대통령 탄핵으로 불안과 걱정을 끼쳐드린 점, 국정을 책임지는 집권 여당의 비대위원장으로서 국민 여러분께 깊이 사과드린다”라고 단 한 줄 말한 정도가 전부다. 여당 다수가 계엄을 대통령이 선택할 수 있는 정치적 수단, 단순한 ‘정쟁’ 차원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 정도로 치부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문제는 계엄에 찬성하는 일부 극단 세력을 제외하고 얼마나 많은 시민이 여권의 인식에 공감하는지에 있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한들 ‘현명한’ 주인이 믿지 않으면 허망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 조성진 기자
- 2025-01-09 11:42
무어와 카터…빛나는 ‘이후’[뉴스와 시각] 배우 데미 무어가 6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제82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영화 ‘서브스턴스’로 생애 첫 여우주연상을 받은 후 인상 깊은 소감을 남겼다. 환갑을 넘긴 그는 “약 30년 전에 한 프로듀서가 나를 ‘팝콘 여배우’라고 불렀던 적이 있다… 나는 그 말을 믿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게 나를 갉아먹어 몇 년 전에는 정말 이게 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면서 “우리가 충분히 똑똑하지도, 예쁘지도, 성공적이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때가 있다. 결코 충분할 수가 없다. 하지만 잣대를 내려놓으면 자신의 가치를 알 수 있다”고 울먹였다. ‘팝콘 여배우’란 스타로서 흥행은 했지만, 연기로는 인정받지 못한 배우를 깎아내린 표현이다.중년층 이상에겐 할리우드 톱스타로 각인돼 있는 무어의 소감치곤 매우 뜻밖이다. 최고의 히트작 ‘사랑과 영혼’(1990)을 통해 절정의 인기를 누렸지만 연기상과는 거리가 멀었다니 미처 몰랐다. 오히려 전신성형설, 연하남 열애설 등 각종 스캔들로 더 유명했던 터라 진심 어린 소감은 매우 큰 울림을 줬다.지난달 말 별세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도 새롭게 조명됐다. 39대 대통령(1977∼1981)을 지낸 카터는 재임 시절엔 인기가 없었다. 경기 침체에도 물가가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을 잡지 못했다는 비판에 시달렸고, 도덕적 인권을 앞세운 외교정책도 잘 안 먹혔다. 결국 로널드 레이건에게 뒤지며 재선에도 실패했다.그러나 퇴임 후에 오히려 빛났다. 카터센터를 바탕으로 평화 증진과 인권 신장, 질병 퇴치에 앞장섰다. 재임 시절보다 더 박수받으며 ‘가장 위대한 미 전직 대통령’으로 불렸고, 중동 평화 노력, 미북 협상 중재 등의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둘의 이야기에 주목한 것은 한물갔다고 여겨질 즈음, 다시 목표를 세우고 담대한 도전에 나섰기 때문이다. 둘은 주변의 편견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엔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커리어의 주인공이지만, 남모르는 시련을 딛고 마침내 자신의 꿈을 이뤘다. 굳세고 당당하게 나와 주변을 변화시켰다.2025년 새해 초다. 새해의 희망과 목표를 가다듬어야 할 시기에 온통 답답하고 우울한 정치 상황뿐이다. 계엄과 탄핵 정국이 지난해를 돌아보고, 새해를 맞이해야 하는 연말연시 분위기를 완전히 날려버렸다. 연말 특수가 사라진 것은 물론이고, 연초에 서로 덕담을 나눌 여유조차 없어졌다. 민생과 미래는 곤두박질쳤고, 정치 과잉으로 모두 흥분하고 분노한 상태다. 혐오와 끝장 대결 속에 가장 기본적이고 소중한 일상이 무너졌다.김대중 전 대통령 이후 우리에겐 카터처럼 ‘이후’가 더 아름다운 리더가 보이지 않는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대의를 위해 대선 출마를 스스로 포기한 조 바이든 대통령 같은 용기와 결단의 소유자도 없다. ‘가장 위대한’은커녕 ‘평범한’도 언감생심이다. 그나마 무어는 있어 다행이다. 윤여정이 칠순이 넘어 영화 ‘미나리’로 2021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한국 배우 최초로 여우조연상을 받으며 K-무비의 힘을 보여준 바 있다. 이어 황동혁 감독, 한강 작가 등도 눈부셨다. 이제 한국의 진정한 카터만 남았다.
- 김인구 기자
- 2025-01-08 11:33
경제 위기 부를 공권력 충돌[뉴스와 시각] 바야흐로 ‘영상의 시대’다. 요즘 중요한 일은 일부러 텔레비전을 찾아서 시청하지 않아도 대부분 유튜브 등의 플랫폼을 통해 생중계된다. 지난해 12월 3일 밤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자 미국 CNN과 영국 BBC 등 해외 텔레비전 방송국은 밤새도록 한국의 정치 상황을 실시간으로 생중계했다. 지난 3일 공조수사본부(공조본)가 윤 대통령 체포 영장 집행을 시도하면서 대통령 경호처와 5시간 30분가량 정면으로 대치하는 과정도 국내 언론뿐만 아니라 해외 언론에 실시간으로 보도됐다.이번 체포 영장 집행 시도의 가장 큰 특징은 한국의 공권력(공조본)이 또 다른 공권력(대통령 경호처)과 충돌하면서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상황까지 갔다는 점이다. 전 세계에서 한 나라 안에서 공권력과 공권력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상황을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정치학계에는 ‘민주주의는 원래 시끄러운 것’이라는 얘기가 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나라가 지나치게 조용할 경우 민주주의가 아니고 독재나 전체주의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민주주의 체제에서 각자의 주장을 표출하는 과정에서 소리가 나는 것과 한 나라 안에서 공권력과 공권력이 정면으로 맞부딪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상황이다. 한 나라 안에서 공권력과 공권력이 충돌한다는 것은 그 나라가 법도 없고, 원칙도 없다고 대내외에 공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역사적인 가정(假定)만큼 허무한 것이 없다고는 하지만, 가정을 한 번 해보자. 지난 3일 윤 대통령 체포 영장 집행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누군가 실수로 공포탄이라도 한 발 발사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아마 그 순간 국내 주가는 폭락하고, 환율은 폭등(원화가치 하락)하면서 금융 시장이 ‘거대한 패닉(공황)’에 빠졌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 한 달만 이어진다면 우리나라 국가신용등급은 몇 단계나 강등될 가능성이 크다. 국제신용평가회사들은 오랫동안 국가신용등급을 내리지 않다가도 한 번 내리겠다고 마음먹으면 한꺼번에 몇 단계씩 하향 조정하는 사례가 많다. 오죽하면 국제경제계에서 국제신용평가회사를 ‘하이에나’에 비유할까. 그런 사례를 찾기 위해 멀리 다른 나라를 둘러볼 필요도 없다. 지금으로부터 30년도 지나지 않은 1997년, 우리나라 국가신용등급이 단기간에 어떻게 바뀌었는지 살펴보면 모든 것이 드러난다. 당시 우리나라 국가신용등급(무디스 기준)은 2개월도 채 되지 않는 기간에 무려 6단계나 하락하면서 ‘투기 등급’(Ba1)으로 강등됐다.경제계에서 가장 싫어하는 말이 불확실성이다. 국가가 존속하는 과정에서 비상계엄 선포든, 그보다 더한 일이든 발생할 수 있다. 문제는 어떤 상황이든 법과 원칙에 따라 처리될 수 있다는 복원력의 유무(有無)다. 복원력이 없으면 앞날을 예상할 수 없고, 이런 상황을 시장은 불확실성이라고 부른다. 현 상황에서는 앞으로 대한민국이 어디로 나아갈지 누구도 예단하기가 쉽지 않다. 여·야 정당과 행정부를 포함한 전 국민이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한국의 향후 일정표에 조속히 합의하지 않으면 경제 위기가 재연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 조해동 기자
- 2025-01-07 11:41
1인4역 최상목과 여야 책무[뉴스와 시각] 지난 3일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하루 일정은 우리나라가 맞고 있는 위기를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최 권한대행은 이날 오전 7시 정부서울청사에서 ‘거시경제 금융현안 간담회’를 주재하며 “금융·외환시장 대응에 만전을 기해달라”고 당부하고, 한 시간 뒤인 8시 개최한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 회의에선 ‘12·29 무안공항 제주항공 참사’ 유가족 생계비 부담 완화 방안 마련을 지시했다. 이어 여의도로 달려간 최 권한대행은 국회의장·여야 지도부와 김수한 전 국회의장 영결식에 참석한 뒤 중소기업 신년인사회, 주한 미국 대사 면담, 경제계 신년인사회를 차례대로 소화했다. ‘본업’인 경제 수장으로서의 업무뿐 아니라 정치·사회까지 나랏일 전반을 최 권한대행 혼자 전부 떠맡고 있는 셈이다. 최 권한대행이 아무리 우수한 관료고 행정부 인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지금처럼 대통령, 국무총리부터 국방부 장관, 행정안전부 장관, 경찰청장이 공석인 비정상적 체제로는 길게 버티기 어려울 것임을 모두가 알고 있다. 당장 헌법재판관은 임명하고 쌍특검은 거부하는 ‘고육지책’을 낸 뒤 여야 모두에서 비판받았고, 3일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을 집행하려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와 대통령 경호처가 장시간 대치를 이어가자 “영장 집행 협조를 지시하라”는 요구가 최 권한대행에게 쏟아졌다. 매 순간이 선택의 기로고 살얼음판이다. 먹고사는 문제와 직결되는 나라 경제가 휘청이고 있지만, 제주항공 사고 수습에 정치적 결단까지 내려야 하는 최 권한대행이 경제문제에 100% 역량을 쏟길 기대할 수는 없는 실정이다. 이런 가운데 정부가 2일 전망한 올해 우리 경제 상황은 몹시 암울하다. 실질 국내총생산(GDP) 기준 성장률이 1.8%로 잠재성장률(2.0%)을 밑돌며 ‘저성장’ 단계에 진입했고, 지난해 마지막까지 버텨줬던 수출 증가율도 8.2%에서 1.5%로 뚝 떨어질 전망이다. 고용이면 고용, 건설이면 건설, 금융·외환시장까지 빨간불이 켜지지 않은 지표가 없고 이달 미국 신정부 출범 후 어떤 파고가 들이닥칠지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 특히, 정부의 성장률 전망치는 국내 정치 위기가 잘 관리된다는 전제에 따른 것이다. 비상계엄·탄핵 사태가 장기화할 경우 가계·기업·외국인 투자 심리를 위축시켜 역성장을 가속화시킬 것으로 우려된다. 정부가 민생경제 회복과 대외신인도 유지에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했지만, 단 몇 개월 뒤 정부가 바뀌고 정책 자체가 180도 뒤집힐 수 있는 마당에 관료사회가 적극적으로 정책을 집행할지도 미지수다. 일각에선 조기 대선·조직개편을 염두에 둔 공직자들이 어떤 자리가 유리할지 벌써부터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다행히 대통령 권한대행, 국회의장, 여야가 참여하는 국정협의체가 조만간 가동되고 이를 위한 실무 조직도 구성된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정치와 관련해 여야가 여전히 극한 대치 중이긴 하지만, 위기에 놓인 경제를 살리기 위해선 머리를 맞대야 한다. 반도체 등 민생 관련 법안부터 경기 부양을 위한 추가경정예산 편성까지 실타래처럼 꼬인 매듭을 조속히 풀어 나가길 바란다.
- 박수진 기자
- 2025-01-06 11:43
태생적 한계 극복한 ‘오겜2’[뉴스와 시각] 지난달 26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오징어 게임 시즌2’(감독 황동혁·오겜2)에 대한 호불호가 엇갈린다. 오겜2에서는 게임이 끝날 때마다, 게임 지속 여부를 묻는 ○× 투표를 진행한다. 만약 누군가 “‘오겜2’ 볼까요?”라고 묻는다면, 이 규칙에 빗대 주저 없이 ‘○’다. ‘오겜2’는 한국시간으로 26일 오후 5시 공개됐다. 이 직후 미국 뉴욕타임스와 포브스, 영국 가디언, 프랑스 르피가로 등이 기다렸다는 듯이 리뷰를 쏟아냈다. 넷플릭스라는 플랫폼에 담겼다손 치더라도, 주요 외신들이 엠바고(보도시점 제한)까지 준수하며 앞다투어 리뷰를 낸 K-콘텐츠는 ‘오겜2’가 최초다. 역대 넷플릭스에서 가장 성공한 콘텐츠로 불리는 이 시리즈의 위상을 새삼 알 수 있는 대목이다.이런 ‘국뽕’에 기대 ‘오겜2’를 너그럽게 바라보자고 권하는 건 아니다. 형만 한 아우가 없다 하고, 청출어람이 어렵듯이 오겜2는 태생적으로 호평보다 비평의 영역에 가까운 콘텐츠라 할 수 있다. ‘유년 시절 즐기던 전통놀이를 하다가 패배하면 진짜 죽는다’는 이 시리즈의 큰 줄거리 자체가 대단한 스포일러인데, 이미 대부분의 인구가 이를 안다. 또한 ‘다음에는 어떤 게임이 나올까?’ 궁금해하면서도, 게임 진행과 죽음이 거듭되는 반복적 패턴 때문에 지루하다는 타박이 나온다. 즉, 아무리 잘 만들어도 시즌1이 선사한 충격과 공포, 그리고 신선함을 넘기는 어렵다는 의미다.그래서 황 감독은 등장인물을 강화했다. 주인공을 맡은 이정재, 이병헌 외에 임시완, 강하늘, 양동근, 박성훈, 이진욱 등 타 드라마나 영화 한 편의 주인공을 너끈히 맡을 배우들을 게임 참가자로 배치하고 각각의 사연을 부여했다. 그랬더니 또 다른 불만이 나온다. “출연료 싼 순서대로 죽는다”는 것이다. 이름값 높은 배우들은 질기게 살려둘 터이니 게임 결과가 예상 가능하다고 꼬집는다. 어느 정도 근거가 있고 수긍이 갈 만한 비판이다. 하지만 기억을 되살려보자. 3년여 전, 오겜1이 공개됐을 때는 호평 일색이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잔인하다”는 평부터, 여성 캐릭터에 더 폭력적이고 불필요한 노출 장면을 넣었다며 ‘여혐’을 문제 삼는 기사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글로벌 시장에서 유례없는 성과를 내자 반응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오겜2를 평가하는 잣대는 더 날카롭고 매섭다. 한껏 고양된 기대로 가득 찬 여론·언론과 마주한 오겜2는 93개국에서 1위 자리를 석권했으나 다양한 비판 속 강력한 성장통에 시달리고 있다. 금메달을 목에 걸어도 본전이라는 한국 양궁의 마음이랄까.반면, 뼈아픈 일침도 있다. 시즌2, 3로 나눠 만든 것에 대해 가디언은 “수익을 늘리려 이야기를 반으로 쪼개는 건 할리우드의 나쁜 습관이다. 시즌2는 극도로 이야기를 질질 끈다”고 꼬집었다. 시즌2, 3를 합쳐 시즌1처럼 9부작 규모 완결된 이야기를 내놨다면 반응은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절반만 배달된 ‘반반 치킨’의 뚜껑은 이미 열렸다. 시즌3는 오는 6월 공개된다. “시즌3는 더 나아져야 한다”는 가디언의 조언은 시즌2를 본 모두의 바람과 맞닿아 있다. 황 감독의 편집실이 더 바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 안진용 기자
- 2025-01-03 11:48
무속으로 번진 ‘낙인 정치’[뉴스와 시각] 12·3 비상계엄 사태의 막후 설계자로 알려진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이 ‘버거 보살’과 같은 패러디물 소재로 회자하고 있다. 노 씨는 2018년 성추행 사건으로 전역 후 점집을 운영해 온 역술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과의 인연을 통해 비상계엄 결정에 영향을 끼쳤다는 정황들은 더 황당하다. 정치인들이 객관적인 데이터, 조직 내 의사결정 과정을 따르지 않고 무속에 의지해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지리산 도사’로 불린 명태균 씨가 윤석열 대통령 부부 책사 역할을 하며 대선에 깊이 관여해 온 사실도 놀라운 일이다. 대통령실 용산 이전에 법사와 풍수 전문가들이 동원됐다는 말도 돌고 있다. 예로부터 정세가 혼란하면 도사나 법사가 판을 쳤다. 그러나 경계해야 할 것은 무속에 대한 정치인들의 과도한 의존이지 무속 그 자체라고 할 수 없다. 무속은 오랜 역사를 통해 우리 생활에 뿌리내려온 전통 신앙이다. 한국리서치가 2022년 2월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5년 새 점(사주·타로·관상·신점 등)을 본 경험이 있는 이들이 전체 응답자의 41%에 달했다. 점을 보는 이유도 거창하지 않았다. 인생사의 불확실성을 줄이려거나 그저 재미로 보는 사람이 많았다. 가족의 승진이나 입시, 병마와 관련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무속에 의지하는 사람들도 있다. 정치인들도 다르지 않다. 하루아침에 눈썹 문신을 하고 나타난다거나, 멀쩡한 조상 묘를 이전하는 일은 무속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공적인 영역으로 넘어오지 않은 개인 일을 정치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나무라기는 어렵다. 그런데도 무속은 천박하고 위험한 것이라는 일반화는 정치권에 이미 횡행하고 있다. ‘종북몰이’에 버금가는 새로운 낙인 방식이다. 과거 ‘주사파’ 딱지에 학을 떼던 야권 인사들은 똑같은 방식으로 ‘무속’이나 ‘친일’ 딱지를 붙이고 있다. 정치권에서 ‘무속’ 낙인은 합리적 판단을 할 수 없는 무능한 인물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박지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한 고위 공직자 배우자를 향해 “무속에 너무 많이 심취해 있다”고 했는데, ‘무속’ 딱지를 붙여 인신공격 및 명예훼손을 하려는 의도가 빤히 드러나는 처사다. 딱지를 붙이고 낙인을 찍는 행위는 매우 편리하지만, 폭력적인 방법이다. 이것저것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낙인 찍는 것만으로도 특정 세력을 배제하는 효과를 낳는다. 중세 마녀사냥, 반공 몰이와 매카시즘, 한국의 종북 딱지가 그랬다. 최순실 사태 이후 ‘무당 정치’라는 말이 횡행하자 애꿎은 무속인들이 욕을 먹기도 했다. 건진법사, 천공 모두 정통 불교와는 거리가 먼 이들이다.사회를 후퇴하게 하는 것은 무당이 아니라 무속, 종북, 친일을 향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낙인 그 자체다. 건강한 정치를 영위하려면 우리는 계속해서 귀찮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정치인에게 허용되는 무속은 어디까지인가. 종북 비판을 할 수 있는 반국가행위는 어떤 수위인가. 일본과 교류를 강화하는 오늘날 진짜 친일 행위는 무엇이고, 친일 몰이는 어떤 것인가. 다양한 맥락과 의미, 의도를 찾는 과정에서 우리 정치는 한 뼘 더 성장할 수 있다.
- 김윤희 기자
- 2025-01-02 11:42
‘불확실성 덩어리’된 한국[뉴스와 시각] 세밑을 앞두고 한국이 껴안은 불확실성의 무게중심이 급변했다. 지난 11월까지만 해도 한국이 내년에 안게 될 최대의 불확실성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백악관 복귀로 예상됐다. 한국의 수출이 얼마나 줄고, 경제 성장률은 몇%나 깎이고, 방위비 분담액은 또 얼마나 늘어난다는 등 2025년 전망을 가린 두꺼운 안개는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달 초 윤석열 대통령이 전환의 버튼을 눌렀다. 국회가 곧바로 비상계엄 해제를 의결했지만, 그에 따른 탄핵 여파는 지속 중이다.3권분립에서 말하는 입법, 행정, 사법의 구분 속에 대표적으로 행정부처 공무원들의 분위기가 그렇다. 비상계엄 사태 이전부터 야당의 탄핵 정치로 행정 각 부처는 이미 불안한 상태였다. 게다가 국정 수반 역할을 맡은 인사들에 대한 탄핵마저 이어지면 각 부처가 추진해 온 경제정책·사업은 절정에 이른 정치적 혼란 속에 지연되기 십상이다. ‘맡은 바 임무를 다하자’는 행정부 윗선의 각오는 한결같지만, 중요 정책을 담당하는 공직자들의 출근길 발걸음 무게는 한결같지 않다. 세종 관가 등 행정부 공무원 사이에서는 의기소침해진 분위기도 새어 나오고 있다. 일부 부처의 담당자에게 ‘그 정책은 어떻게 됩니까’라고 물으면 각종 설명 끝에 대개 답변의 마무리는 ‘점점점(…)’ 말줄임표로 수렴된다. 정책 지속성을 담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효과를 내고 있는 정책의 지속성은 대외 신인도의 한 축이다. 그러나 정책 지속 불확실성은 여기에 직격탄을 날린다. 물론 자유민주주의 정착, 산업화와 시장경제 확산 등으로 관치주의는 많이 퇴색됐고 기업 등 민간 경쟁력이 국가 경쟁력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첨단 분야 연구개발(R&D)이나 위기 산업 지원 정책, 취약계층 복지정책, 재해·재난 대응 등에 있어서는 관(官), 행정부의 정책 결정이나 대응 체계가 지니는 역할은 여전히 작지 않다. 오히려 주요국의 보호주의와 각 산업 분야 내 경쟁 심화로 인해 ‘단일 최대 경제 주체’인 행정부와 그 정책의 역할은 더 커지고 있는 추세가 엿보인다. 특히나 한국이나 미국과 같은 대통령중심제 국가에서는 행정부 정책의 중요도가 더 크다. 국제공조·협력이 필요한 분야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외줄타기 같은 권한대행, 대행의 대행, 근래 상황이 이렇다. 그런데도 야권에서는 각 부처 장관이 주축이 된 행정부 국무위원 탄핵 압박이 계속되고 있다. 거듭된 탄핵안 가결 속에 탄핵 결정의 종착점인 헌법재판소에서는 병목 현상과 심판 정족수 논란까지 벌어진 상태다. 제헌국회부터 ‘87년 체제’ 개헌까지의 헌법 입안 당사자들이 이런 상황을 상상이나 했을까.장기간의 국정 혼란에 따른 불확실성이 초래되면 결국 피해는 민(民)이 본다. 정치권의 ‘벼랑 끝’ 승부가 국민과 기업 등 경제 주체들의 일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셈이다. 상황이 그렇게까지 악화해 여든 야든 민심을 잃으면 내 탓, 네 탓을 따지는 건 이미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문제로 전락한다. 한국 자체가 불확실성 덩어리 신세가 되기 때문이다.
- 박준희 기자
- 2024-12-31 11:13
참담한 尹·李의 ‘법 기술’[뉴스와 시각] 12·3 비상계엄 선포로 내란 우두머리(수괴)·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등 혐의를 받는 윤석열 대통령은 공조수사본부(공조본)의 3차 출석요구일인 29일에도 끝내 ‘노쇼’(불출석)를 택했다. 앞서 검찰의 2차례 출석요구까지 더하면 내리 5차례나 수사기관 출석요구에 무대응으로 일관한 셈이다. 현행 형사소송법 제200조는 ‘검사 또는 사법경찰관은 수사에 필요한 때 피의자 출석을 요구해 진술을 들을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같은 조 제2항은 ‘정당한 이유 없이 출석요구에 응하지 않을 때는 체포영장을 청구·발부받아 피의자를 체포할 수 있다’고 못 박았다. 이에 따라 공조본이 30일 헌정사상 최초로 현직 대통령인 윤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을 청구했지만 영장 집행은 쉽지 않을 전망이다. 윤 대통령은 헌법재판소가 보낸 탄핵심판 서류 역시 1주일 넘게 받지 않아 헌재는 서류송달로 간주하는 고육지책을 택했다. 윤 대통령의 ‘묻지 마 버티기’는 앞서 7일 밝힌 “계엄선포와 관련해 법적·정치적 책임을 회피하지 않겠다”는 발언을 말 그대로 식언으로 만들었다. 더 나아가 검찰총장 출신으로 기회 있을 때마다 ‘법의 지배’를 강조해 온 자신을 스스로 먹칠하고 있다는 평가다.법에 저촉되지 않는 선에서 법망의 허점을 적극적으로 공략하는 법조인 출신 정치인은 윤 대통령뿐만이 아니다. 신속 탄핵심판을 연일 강조하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공직선거법 위반 항소심 소송기록접수통지서를 3차례나 받지 않다 지난 18일에야 수령했다. 서울고법은 이 대표가 항소심 변호인을 계속 선임하지 않자 23일 국선변호인을 선정해 통지하기도 했다. 변호사 출신인 이 대표는 쌍방울그룹 불법 대북송금 사건에서는 관할 수원지법에 법관 기피신청서를 제출하는 방법으로 재판을 중단시켰다. 항고, 재항고를 거쳐 대법원 판단까지 받으면 2∼3개월가량 재판이 멈춘다. 내년 2월 법관 정기인사까지 고려하면 재판 결과가 언제 나올지 재단하기 힘들다. 자녀 입시비리·청와대 감찰 무마 등 혐의로 기소된 지 5년 만인 지난 16일에야 구치소에 수감된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 역시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출신이다. 법률 지식·권력·기술을 이용해 처벌을 피하고 사적 이익을 취하는 사람은 아무리 법에 해박해도 법률가가 아닌 ‘법꾸라지’ 또는 ‘법 기술자’라고 부른다. 윤 대통령이나 이 대표 등이 보여주는 행보는 당장은 현실의 수사나 재판에서 처벌을 피하면서도 시간 끌기에 성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 당시 헌재가 파면 사유 중 하나로 ‘헌법수호 의지가 분명하지 않다’며 수사 불응을 지적한 점은 새겨볼 만하다. 무엇보다 지도자로서의 책임·도덕·정의를 가늠하는 민심의 재판에서는 그들이 마땅한 법적·정치적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국민이 다수다. 윤 대통령은 여전히 대한민국 대통령이고, 이 대표는 다음 대권에 가장 근접했다는 평가를 받는 정치인이다. 두 사람의 다음 행보는 ‘침대 재판’의 주인공이 아니라 수사기관·재판정에 출석해 당당히 입장을 밝히고 사법절차를 존중하는 모습이기를 기대한다. 국민은 지연되지 않은 정의의 실현을 바란다.
- 김남석 기자
- 2024-12-30 11:41
尹 ‘리걸 마인드’의 민낯[뉴스와 시각] 보수·우파가 그래도 윤석열 대통령을 지지한 것은, 그의 ‘리걸 마인드’(legal mind·법률적 사고방식)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매 순간 유불리를 저울질하는 여의도식 정치공학에서 벗어나,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한 국정 운영을 할 것이라 기대한 것이다. 법적 소양을 바탕으로 쟁점에 대한 균형 있는 판단을 하고, 법리를 바탕으로 자신과 주변의 사소한 문제에도 엄격하며, 체화된 자유·법치주의 신념을 바탕으로 사익이 아닌 공동의 이익을 위해 투신하는 모습을 원했을 것이다.그러나 12·3 비상계엄 사태를 겪으며 보수주의자의 이 같은 기대는 처참히 무너졌다. 윤 대통령은 반민주·반헌법적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나는 잘못이 없다”는 입장을 보인다. 실제 윤 대통령은 5차례 걸친 대국민담화에서 ‘놀라고 불안했을 국민’에게만 사과했을 뿐, 계엄 선포 자체에 대해서는 단 한 차례도 사과하지 않았다. 그가 정당하다고 믿는 계엄 논리는 이렇다. ①계엄은 대통령 고유 통치 권한으로, ‘헌법의 틀’ 안에서 이뤄졌다. ②국헌문란 목적이 없는 2시간짜리 ‘경고용 계엄’이다. ③야당은 이를 내란이라 칭하며 광란의 칼춤을 춘다. ④구국의 결단을 한 나는 끝까지 싸울 것이고, 머지않아 직무에 복귀할 것이다. 이는 국민의 인식과 심각하게 괴리돼 있다. 국민은 눈으로 목격한 현상, 즉 총 든 군인이 야밤에 국회에 진입한 것만으로도 반민주·반헌법적이라 판단한다. 계엄 포고령에 ‘포고령 위반자를 처단한다’ 해놓고, 해제 후 2시간짜리 ‘경고용 계엄’이라 둘러대는 것은 국정 최고 지도자에 대한 한때의 기대를 접게 하는 대목이다. 윤 대통령의 계엄 이후 행보도 윤석열식 리걸 마인드 실체를 의심하게 한다. 윤 대통령은 검찰총장 재직 당시 국민으로부터 수사 정당성을 얻기 위해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한 엄정하고 공정한 수사를 거듭 강조했다. 그러나 정작 살아 있는 권력이 된 지금, 그는 ‘법 기술자’ 행태를 보이고 있다. “법적·정치적 책임을 피하지 않겠다”고 해놓고서는, 거듭된 수사기관 소환 통보를 대놓고 무시한다. 이는 현직 대통령에 대한 강제수사가 쉽지 않은 점, 체포영장 청구 시 48시간 내 구속영장 청구가 뒤따라야 해 수사팀이 시간에 쫓기는 점을 알기에 내린 결정일 것이다.더욱 우려되는 지점은, 윤 대통령이 그릇된 방법으로 탄핵 정국을 돌파하려 한다는 점이다. 윤 대통령은 12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길에 모두 하나가 돼 주시길 호소드린다. 국민 여러분과 함께 싸우겠다”고 했다. 여론재판 성격이 강한 헌재 탄핵 심리에 대비해 우파 지지자를 강하게 결집하려는 의도인 것이다.누군가는 “대통령이 오죽하면 계엄을 선포했겠느냐”고 한다. 일부 이해가 가는 측면도 있지만, 그렇다고 외교·안보·경제를 쑥대밭으로 만든 반민주·반헌법적 계엄 자체를 정당화할 수 없다. 윤 대통령은 헌재 탄핵 변론을 준비하기에 앞서 국민 앞에 서야 한다. 이 자리에서 국민을 존중하지 않은 점, 가족 등 주변 문제에 엄격하지 못한 점 등에 대해 사과부터 하는 게 도리다. 그게 평생 리걸 마인드를 배운 윤 대통령의 마지막 책무다.
- 손기은 기자
- 2024-12-27 11:44
헌법 정신 뭉개는 하류 정치[뉴스와 시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을 만나고 돌아온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은 대화 내용을 함구했다. 재계와 트럼프 당선인과의 연결 고리 역할에 대해서도 ‘내가 무슨 자격으로’라며 선을 그었다. 트럼프 주니어와의 친분을 고려하면 대통령 취임식에도 초청받았을 게 확실해 보이지만, 이조차도 말을 아끼고 있다.우리나라 기업들은 고객 말고도 눈치를 봐야 하는 데가 여럿이다. 정부, 정치인 등이 대표적이다. 계엄사태와 탄핵 정국에 접어들면서 더 심해졌다. 기업들이 납작 엎드려 있다. 민간 기업인데도 공직 사회 분위기가 난다. 이는 그만큼 국내 기업 경영엔 정부와 정치권의 영향력이 큰 탓이다. 신년 계획을 마무리했던 기업들은 탄핵 정국을 겪으면서 사실상 계획을 새로 짜야 하는 상황이 됐다. 자칫 어느 한쪽에 찍히기라도 하면 경영활동에 타격이 크기 때문이다. 탄핵 정국의 불확실성이 특히나 한국 기업엔 더 심각한 상황이란 의미다. 기업들이 신제품 개발과 영업활동에만 적극적으로 매달려도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기 어려운 상황에서 국내 기업들은 내부 정치까지 눈치 봐야 하는 셈이다.정치권은 이를 포퓰리즘으로 세 확대에 악용한다. 지지층 결집은 좋은 말로는 팬덤이라지만, 거의 선동에 가깝다. 자신과 다른 의견을 내지 않아도 연결고리만 지어지면 무조건 비방하고 불매운동을 벌이게 유도한다. 제품 품질과는 무관하다.수많은 부작용을 우리는 많이 경험해왔다. 2019년 한국 경제에 대형 악재로 작용했던 한일 무역분쟁은 문재인 정부가 들춰냈던 과거사 정리가 시작이었다. 당시 일본의 수출제재로 국내 많은 기업이 큰 피해를 봤다. 일본 제품을 수입해 판매하는 한국의 영세 기업들은 물론, 일본 음식점을 운영하던 수많은 자영업자도 ‘노재팬’ 불매운동에 눈물을 머금고 문을 닫아야 했다. 제품의 문제가 아닌 과거사 때문이었다. 이처럼 그간 정부나 정치권의 눈 밖에 나면서 위축됐던 산업과 피해를 본 기업은 수없이 많다.이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거대 야당은 상법 개정을 통해 기업의 경영을 아예 법원에 맡겨버리겠다는 생각이다. 국회증언감정법을 통해 민간 기업을 국회 발아래 두겠다는 의도도 내보였다.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라는 대한민국 경제 기본 원칙을 훼손하는 행위들이다.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119조다. 헌법 제126조엔 국방상 또는 국민경제상 긴절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경영을 통제 또는 관리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정치는 4류, 관료와 행정조직은 3류, 기업은 2류’라고 한 이건희 삼성그룹 선대회장의 베이징 발언은 내년에 30년이 된다. 그동안 대한민국 기업들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면서 전 세계가 주목하는 1류 기업이 됐지만, 정치와 관료·행정조직은 여전히 바뀐 게 없어 보인다. 대한민국은 기업 하기 어려운 나라. 아직도 흔한 말이다. 탄핵 정국에 기업들이 흔들리고 있다. 과거 유명 CF의 카피 ‘우리 그냥 사랑하게 해주세요’처럼 기업들은 그냥 경영하게 해야 한다. 정치권의 규제와 간섭만 없으면 알아서들 잘한다.
- 이용권 기자
- 2024-12-26 11:42
마음건강 돌봄 정책과 한계[뉴스와 시각] 서울시는 지난 17일 서울시교육청과 손잡고 야간·주말에만 운영 중인 청소년상담복지센터를 오는 2026년까지 상시 상담 체계로 전환하는 등 ‘청소년 마음건강 통합지원’에 나선다고 밝혔다. 동네 가까이에서 상담을 받을 수 있는 ‘마음상담소’는 현재 9개 자치구에 총 11개 설치돼 있는데, 2026년까지 모든 자치구로 확대할 계획이다. 학교에도 ‘원스톱 상담시스템’을 구축, 정신건강 전문가가 방문해 학생의 마음 건강을 세세히 돌봐준다.청소년 마음건강 통합지원이 눈길을 끄는 것은 단발성 청소년 정책이 아니라 지난 10월 오세훈 서울시장이 발표한 ‘외로움 없는 서울’ 프로젝트의 후속 조치로 이뤄지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고립·은둔 종합대책을 전체 부서 단위에서 추진하고 있다. 5년간 무려 4513억 원을 투입해 재고립·재은둔까지 막을 수 있는 지원체계를 구축하는 게 서울시의 목표다.서울시는 언제든 도움을 요청하고 상담할 수 있도록 온·오프라인 플랫폼인 ‘똑똑 24 플랫폼’을 도입하고, 하루 24시간, 1년 365일 운영되는 외로움 전담 콜센터 ‘외로움 안녕 120’도 내년 4월부터 가동한다. 고립예방센터와 연계해 사후 관리까지 할 계획이다. 외로움을 느끼는 시민 누구나 방문할 수 있는 ‘서울마음편의점’도 내년에 4곳을 시범 운영할 계획이다. 지원을 거부하는 시민에게는 ‘15분 외출처방’을 통해 집 밖으로 나올 수 있게 유도한다. 외로움 없는 서울 프로젝트에는 민간 기업들도 동참하고 있다. 교보문고, 당근마켓, 대상, BGF리테일, hy(옛 한국야쿠르트), 우아한형제들, GS리테일, 풀무원식품, 한국빨래방협회 등이 이달 초 한꺼번에 서울시와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교보문고, 당근마켓 등은 지역별·주제별 다양한 모임을 구성해 활성화하고 챌린지 등 행사를 기획해 추진하기로 했다. 대상과 풀무원식품은 서울마음편의점이 원활히 운영될 수 있게 식료품 등을 지원한다. 또, hy는 사회적 고립가구를 대상으로 건강음료 배달서비스를 확대하고, 우아한형제들은 자사의 ‘배달의민족’ 앱을 활용해 ‘고립위험도 자가 진단 페이지’를 구축하기로 했다.지방자치단체가 주민의 신체적 건강뿐 아니라 정신적 건강까지 세심하게 챙기겠다는 자세는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외로움 없는 서울 정책으로 서울시민의 마음 건강을 온전히 돌볼 수 있을지에는 물음표가 붙는 게 사실이다. 오 시장은 “행복도 조사를 할 때마다 한국은 상당히 하위권”이라며 “그 이유의 상당 부분이 지나친 경쟁이나 여기서 오는 스트레스라고 얘기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외로움이 행복감 저하의 가장 근저에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평생 벗어날 수 없는 과도한 경쟁,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분위기가 외로움보다 마음 건강을 더 크게 해칠 것이다.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나 학교폭력에 시달리다 교우관계가 망가져 버린 청소년, 연이은 취업 실패에 스스로 사회적 고립을 택한 젊은이, 돌봐줄 가족이 없어 원치 않는 독거노인이 된 고령자를 위해서는 고립된 후 외로움을 달래주는 정책보다 한국 사회의 각종 병폐에 대한 해결책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 김성훈 기자
- 2024-12-24 11:46
尹의 탈압박 실패와 자책골[뉴스와 시각] 현대 축구에서 자책골이 많이 나오는 것은 왜일까. 수비수 기량이 떨어져서일까. 축구 전문가들은 원인을 강도가 높아진 상대 공격수의 ‘전방압박’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골키퍼가 볼을 전개하려는 순간부터 상대 공격수들이 맹수처럼 돌진하면 당황한 골키퍼와 수비수들이 실수할 확률이 높아진다. 통계로도 확인된다. 세계 축구의 중심인 유럽에서 펼쳐지는 대회, 특히 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에서도 이런 경향이 나타났다. 유로 2012에서 1골, 유로 2016에서 3골에 불과하던 자책골은 유로 2020에선 11골로 확 늘었다. 올해 유로 2024에서도 10골이나 나왔다. ‘12·3 비상계엄’ 사태를 보면서 전방압박과 ‘탈압박(press resistance)’ 상황에서 자책골로 이어지는 현대 축구를 떠올렸다. 엄중한 국가적 위기 상황을 축구 경기에 비유하는 게 경망스럽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유사점이 적지 않다. 전방압박의 주체는 더불어민주당(범야권 포함), 탈압박의 주체는 윤석열 대통령과 여권이다. 민주당을 포함한 범야권에 192석을 몰아준 지난 4·10 총선거는 압도적 볼 점유율을 바탕으로 한 ‘빌드업’ 축구를 위한 요건을 충족해줬다. 제22대 국회 개회와 동시에 11 대 11이 아니라 이미 여러 명이 퇴장해 균형이 무너진 경기가 시작된 것인데, 윤 대통령은 이런 ‘기울어진 축구장’을 만든 원인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있다고 봤고, 계엄을 통해 손보려 했다. 민주당은 수적 우세를 바탕으로 경기 시작과 동시에 라인을 확 끌어올렸다. 다양한 공격 루트로 전반전(탄핵 의결 이전 윤 대통령 재임기간)에만 슈팅 25개(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횟수), 유효슈팅 4개(감사원장·검사 탄핵 추진, 감액 예산안 처리, 김건희여사특검법안 추진)를 쏟아부었다. 여권은 전반전에 하프라인을 넘어보지 못했다. 게다가 이미 옐로카드(사법리스크)를 받고, 침대축구(재판 연기)를 하는 상대 팀 주장(이재명 대표)의 퇴장이 임박했는데 그 잠깐의 압박을 견디지 못했다. 탈압박이 모든 축구팀의 루틴이듯이 정적들의 폭주는 세계적 현상이자 ‘뉴노멀’이 됐는데, 윤 대통령의 참을성은 너무나 부족했다. 자책골은 전반전이 막 끝나고 후반전 반격을 해야 할 시점에 터졌다. 축구 전문가들은 탈압박에서 골키퍼의 키핑 능력도 중요하지만, 동료 수비수와의 호흡이 가장 중요하다고 분석한다. 탈압박 전개에 있어 수비 라인의 중심이자 공격 전환의 시작인 김민재 같은 든든한 센터백(여당 대표)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윤 대통령은 센터백을 8번이나 교체했고, 패스도 하지 않았다. 상대 팀의 전방압박보다 같은 팀 센터백(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이 싫어서 골키퍼가 자책골을 넣은 상황처럼 보이기도 한다. 축구 팬들은 94미국월드컵 예선 경기에서 팀의 패배를 가져온 자책골을 넣은 콜롬비아의 수비수 안드레스 에스코바르가 모국에서 총격을 받아 숨진 사건을 기억한다. “자살골은 만회하면 되지만 ‘자살’은 되돌릴 수 없다(박성민 민컨설팅 대표)”는 말처럼 12·3 비상계엄 사태는 단순 실책이 아니라 피아를 구분하지 못하고 만회골의 의지를 무력화하려 했다는 점에서 자책골 그 이상이다.
- 방승배 기자
- 2024-12-23 11:36
AI 시대의 신춘문예 흥행[뉴스와 시각] ‘눈송이 사이 낮고 희미한 소리／알지 못하는 이름을 부르는 중인가／까맣게 젖어든 한 조각의 기억／유리창 너머 희미한 얼굴이 깜빡인다.’ 이 시의 제목은 ‘겨울의 목소리’. 시 한 줄 써본 적 없는 기자와 챗GPT의 합작품이다. 한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의 연작 시 ‘거울 저편의 겨울’을 학습시킨 후, 겨울에 관한 시를 써보라 했더니, 솜씨가 제법이다. ‘AI 시인’은 습작을 거듭하더니 점점 더 ‘그럴듯한’ 시를 내놓았다. “김혜순 시인처럼 써줘” “박준 시인처럼 써줘”…. 호기심은 욕망이 됐다. 슬쩍, 신춘문예에 내볼까. 엉뚱한 실험과 흐뭇한 상상(혹은 망상)을 촉발한 건 2025 문화일보 신춘문예다. 작가의 등용문이던 일간지 신춘문예 응모작은 최근 수년간 감소 추세였다. 빠르고 짧고 자극적인, 그래서 ‘돈 되는’ 영상이 점령한 시대, 문학의 소외는 거스를 수 없어 보였다. 그런데 문화일보 신춘문예는 지난해보다 1000편 넘는 작품이 몰려, 1년 만에 응모작이 30% 이상 증가했다. 최근 6년간 가장 높은 수치. 다른 일간지들 역시 몇 군데를 빼고, 대부분 20% 이상 늘었다고 한다. 어떤 곳은 역대 최대라고 하니, 분명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 그게 뭘까. 그리고 왜? 출판은 위기이고, 문학 독자는 사라진다는데, 이 역주행 미스터리는 무언가. “응모작들 수준이 높아요. 매끄러운 시들이 많네요. ‘AI 스타일’이죠.” 심사를 맡은 한 시인은 신춘문예 붐을 챗GPT 덕(혹은 탓)으로 봤다. 대학교수인 그는 챗GPT 상용화가 본격화한 올해, ‘기계 냄새’ 나는 과제물이 부쩍 늘었다고 했다. 하지만 창작자의 자백(?) 없인 추정에 불과해, 결국 ‘사람 흉내’보다 뛰어난 작품을 고르는 것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시인의 감별안을 믿는 만큼, 심증에도 마음이 기운다. 그렇다면 이것은 반색할 일인가. 아니, 그보다 신춘문예 제도 정비가 급한 걸까. “챗GPT도 꿈이 있어야 사용합니다.” 한 문학평론가는 시인의 추측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는다면서도 기술의 힘을 빌려서라도 쓰고자 하는 이들이 늘어난 것에 주목했다. 또, 그 욕망의 발현에 한강 작가가 영향을 끼쳤다고 확신했다. 그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이야기를 짓는 일에 경이와 매력을 느끼게 하고, 용기를 주고, 결심을 재촉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한강 효과’라는 것. 정말일까. 30년을 쓴 작가의 거대한 문학적 성취를 목격했다고, 쓰는 일에 열망을 품을 수 있을까. 이 또한 미스터리다.“밤하늘의 별 같은 것이지요.” 한 소설 심사위원은 올해 응모작들을 읽으며 “어딘지 사람들이 고무돼 있음을 느꼈다”고 했다. “한 작가는 별 같은 존재이고, 별이란 보면서 걷고 싶은 방향성이기도 하죠.” 그러니까, 챗GPT를 어째야 할지 사람의 역할을 고민하기 전에 일단 환영하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스마트폰 속에선 몇십 초 안에 모든 게 판단되고, 이야기는 점점 짧아지고, 사람들은 갈수록 즉물적이 돼 간다. 그러한 세상에서, 하나의 이야기가 탄생하기까지 숙고와 인내, 성찰을 요하는 문학의 자장에 사람들이 돌아온다는 건 기적과 같다는 것이다. 아직 우리가 무언가 놓지 않았고, 지키고 싶다는 증거라고. 신춘문예 미스터리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으나 우선 그 꿈과 열망을 품은 당선작을 기다리면서(1월 2일에 공개된다), 저들의 심증이 맞기를 바라본다. 그렇다면 이 미스터리는 감동 그 자체니까.
- 박동미 기자
- 2024-12-20 11:50
부메랑 될 野의 反경제 폭주[뉴스와 시각] 45년 만에 내려진 비상계엄의 후폭풍은 가히 ‘쓰나미’급이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이 국민의 손에 의해 끌어내려지고, 나라는 엉망이 됐다. 지도자 한 명의 잘못된 선택이 국가를 어디까지 망가트릴 수 있는지,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다. 정치·경제·사회 등 국가 전 분야에서 혼돈이 이어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계엄과 탄핵 사태에 따른 여파가 가장 심각한 분야가 경제다. 정치는 여야가 대화와 타협으로 문제를 해결해 가는 영역이니 결국 회복될 것이다. 외교 역시 새 대통령과 내각이 구성되면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경제는? 경제는 얘기가 다르다. ‘돈줄’을 쥐고 있는 해외투자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내부만 정리된다고 해서 풀리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독재국가가 아닌 한 자본주의·시장경제에서 투자자를 강제할 방법은 없다. 비상계엄이 선포되는 불안정한 국가에 굳이 투자할 이유가 없지 않겠나. “경제는 심리(心理)다”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경제문제는 누가 해결해야 하는가. 당연히 난국을 풀어나가야 할 주체는 정부와 여당이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야당도 실타래처럼 얽혀 버린 경제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민주당은 사상 초유의 감액 예산을 다수결의 힘으로 밀어붙였다. 정부 예산안에서 무려 4조1000억 원이나 삭감해 버렸다. 이것이 비상계엄 선포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18일 가진 ‘2024년 하반기 물가안정목표 운영상황 점검 설명회’에서 “내년 성장률을 애초 1.9%로 전망했는데, 국회에서 통과한 감액 예산안이 -0.06%포인트가량 긴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면서 “재정 등 여러 문제를 볼 때 하방 압력이 커졌다”고 경고했다. 정치논리에 휩싸여 민주당이 일방적으로 통과시켜 버린 감액 예산안이 내년 성장률에 타격을 줄 것이라는 중앙은행 총재의 분석을 국민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국가 경제를 생각하지 않는 무책임한 행태를 보인 민주당은 이제 적자 국채 발행이 불가피한 추가경정예산(추경)을 빨리 올리라고 정부를 닦달한다. 정말 무책임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이뿐인가. 농업의 장래를 생각하지 않은 양곡법 역시 국가 경제는 안중에 없는 전형적인 ‘포퓰리즘적 법안’이라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지만, 민주당은 미동조차 없다. 국회증언감정법 역시 우리 기업들의 기밀정보가 해외 경쟁 기업들에 노출될 우려가 있다고 재계는 하소연하지만, 민주당은 전혀 들으려 하지 않는다. 기업을 바라보는 민주당의 이런 인식이 과연 자본주의·시장경제 체제 기반의 우리나라 경제에 맞는 것인지 의구심이 든다.지금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은 자국 기업뿐 아니라 외국 기업에까지 보조금을 주면서 자국에 공장을 세우고 고용을 해 달라고 하고 있다. 미·중 갈등과 트럼프 리스크, 우크라이나 전쟁 등 글로벌 악재들이 산재해 있는 지금은 기업에 힘을 불어넣어 줘야 할 때이지, 채찍을 휘두를 때가 아니라는 점은 명확하다. 민주당이 이런 무책임한 정책을 남발한다면 향후 ‘집권당’이 된다고 해도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 임대환 기자
- 2024-12-19 11:38
탄핵 속보 쏟아내는 中 속내[뉴스와 시각] 중국 관영 매체들이 이렇게 빠른 줄 미처 몰랐다. 지난 3일 윤석열 대통령이 한밤중 계엄을 선포한 때부터 국회에서 계엄 해제 결의안이 통과된 일, 7일 국회 본회의에 보고된 윤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의결정족수 미달로 투표가 불성립되고 14일 다시 올라온 탄핵소추안이 204명의 찬성표로 통과된 일 등을 관영 신화(新華)통신, CCTV 등은 시시각각 속보로 전했다. 탄핵안이 통과된 날 CCTV는 서울 특파원을 연결해 해당 소식을 상세히 전하기도 했다. 오전에 있었던 회의 결과를 오후 느지막이 보도해온 행태만 봐왔기에 이는 매우 이례적으로 느껴졌다. 중국이 한국에서 벌어진 이번 사태를 자국 체제 선전의 기회로 삼고 있다는 다수의 분석에 동의한다. ‘청와대의 저주’를 운운하고 내년 초 정권교체 가능성을 거론하면서 ‘친미반중’ 노선의 종언을 언급하고,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2기 출범과 맞물려 중국을 견제하는 한미일 3각 공조가 시험대에 올랐다는 식의 논평을 쏟아내는 것을 보면, 중국이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변화를 내심 반기는 건 아닌지 의심도 든다. 최근 보도들을 보면 한국에 어떤 새 정부가 들어설지 주시하고 있는데, 현재 차기 대권 주자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정치인은 ‘친중’ 성향에 중국 내 인지도도 높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다. 한국 상황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관심도 지대하다. 한국 소식이 중국의 최대 포털 바이두(白度)와 SNS 웨이보(微博) 등에서 매번 인기 검색어 1위를 차지했는데, 이는 중국 당국의 묵인 아래 중국 시민들도 한국 상황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낸다. 실제로 중국 젊은이들끼리의 이야기 화제로 한국 상황이 떠오르는가 하면 한국인이라는 말에 중국인 택시기사가 윤 대통령 사태를 어떻게 보고 있느냐고 묻기도 한다. 어떤 이는 “흥미로운 한국의 정치 드라마를 보는 기분”이라고 했다. 이런 상황 속 지난주 한 중국인 지인과 만났다. 한국 상황을 잘 아는 그와의 대화는 자연스레 현재 정국으로 흘렀고, 그와 함께 1시간이 넘도록 윤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이어갔다. 윤 대통령이 무슨 생각으로 일을 저질렀고 얼마나 큰 잘못을 했으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대화는 흥미로웠지만 뒷맛은 좋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참 썼다. 우리나라가 이것밖에 안 되나 싶은 좌절감과 무엇을 할 수 있지 싶은 무력감이었다. 그는 한국에 대한 애정으로 윤 대통령을 지적했지만 국가 원수에 대한 비판이 일절 금지된 국가의 국민과 우리나라 대통령에 대해 한마음으로 비판하고 있자니, 묘한 반발감과 우울감이 함께 밀려왔다. 엎질러진 물은 어찌할 수 없고, 앞으로가 중요하다. 희망은 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역사를 짓밟는 엄청난 과오를 저지른 윤 대통령을, 우리는 일단 끌어내렸다. 절차는 아직 남아 있지만 우리는 우선 민주주의적 절차에 따라 단죄했으며, 앞으로 엄벌할 것이다. 한국 상황을 속속 전하며 관전하고 있는 중국에 말하고 싶은 바는 이것이다.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회복한다. 언제든 회복할 수 있다. 민주주의의 힘으로 말이다.
- 박세희 기자
- 2024-12-18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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