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종의 시화기행>사랑을 잃고 고향 떠난 후…‘고독한 예술혼’ 불사르다

  • 문화일보
  • 입력 2020-12-01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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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김병종, 사랑아 나는 통곡한다, 25×37㎝, 종이에 채색,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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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파리, 아를과 화가 빈센트 반 고흐

‘첫사랑’ 사촌 케이보스에 이어
어린딸 둔 홀어미 시엔과 이별
2번의 실패…세상과 불화 시작

파리로 상경 미술계 별들 만나
새로운 인상주의 화풍 접하고
남부 아를서 창작열정 불태워

존재감 없는 삭막한 삶 지쳐
마지막 ‘지상과의 이별’ 감행
절절한 글·그림 사후 재조명


빈센트 반 고흐. 서른일곱에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그는 두 번 사랑에 빠지지만 두 번 다 실패한다. 만약 실패한 두 사랑 중 하나만이라도 성공했다면 그렇게 일찍 생을 마감했을까. 그건 모르겠다. 하지만 사랑이 붙들어주었다면 고달픈 삶이었을지라도 조금 더 지속될 수 있었을 것이다. 정작 오직 예술, 그것 때문에 자살한 예술가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은 사라져버린 불멸의 책 ‘사랑은 모든 것의 해답(제럴드 잼폴스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인간은 사랑을 갈구하는 존재이고 그런 점에서 그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잼폴스키는 인간을 사랑의 물을 먹고 사랑의 햇빛으로 크는 한 그루 나무와 같다고 봤다. 그러면서 인생의 모든 문제는 사랑의 결여나 고갈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고 했다. 심지어 스스로 택하는 죽음마저도 사랑의 갈망에 대한 좌절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고 봤다.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슬픔, 1882

반 고흐. 그가 그린 그림보다 지상에는 그에 관해 쓴 책의 수가 더 많다고 할 만큼 유명한 인물이다. 그의 그림 중 ‘슬픔’이라는 제목이 붙은, 벗은 몸으로 차디찬 돌 위에 머리를 묻은 채 웅크리고 있는 여인의 그림이 눈길을 끈다. 그 모델로 알려져 있는 여인은 반 고흐가 마음으로 열렬히 연모했던 고향의 시엔이라는 실존 인물이었다. 정확한 이름은 시엔 클라시나 마리아 후릭.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어린 딸을 둔 서른세 살의 가난한 여인이었고 태 중에는 또 다른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결코 예쁜 얼굴이라고 할 수도 없었고 살짝 얽기까지 했다. 그러나 반 고흐는 연상의 그녀에게서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발견했고 정신없이 빨려 들어갔다. 급기야 결혼을 결심하지만 가족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한다. 첫사랑의 대상이었던 사촌 케이 보스에 이어 두 번째 사랑도 그렇게 좌절되면서 세상과의 불화가 시작된다. 사랑을 상실한 그는 외로운 짐승처럼 네덜란드를 떠나 기차에 몸을 싣고 무작정 파리로 갔다. 대체로 사랑의 아픔을 겪게 되면 그 기억의 땅을 떠나고 싶어지는 것이고 그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그가 무작정 상경처럼 파리로 가지 않았다면, 몽마르트르에 정착해 새로운 사조를 이끌고 있던 일군의 화가들, 일테면 툴루즈 로트레크나 드가, 르누아르나 베르나르, 모네, 폴 시냐크 등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사랑의 상실을 그림에의 열정으로 바꾸지 않았다면 그는 여전히 네덜란드의 고향에서 농촌 풍경이나 그리고 있을 것이다. 채 10년도 되지 않은 세월 동안 무려 2000점에 이르는 방대한 양을 그려낼 수 있었던 힘도 고향을 떠나 파리로 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파리에 와 그곳에 집결한 당대의 별들을 만나면서 비로소 새로운 미술의 흐름에 번쩍 눈이 뜨였을 것이다. 그의 창작 본능은 그렇게 하여 활화산처럼 터져 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비로소 오늘날의 빈센트 반 고흐로 탄생할 수 있었다. 더구나 예술동네 몽마르트르의 벨에포크는 1880년부터 15년 남짓이었고 그는 그 전성기의 한복판에 뛰어든 셈이었다.

그 시절에는 그야말로 누군가가 호명하듯 유럽 각지에서 한다 하는 미술가들이 그곳으로 몰려들었고 공동스튜디오 ‘세탁선’은 창작의 용광로가 됐다. 그는 처음 몽마르트르에 있던 페르낭 코르몽(Fernand Cormon·1845∼1924)이라는 화가의 작업실 한 귀퉁이를 빌려 그림을 그렸고 비록 프랑스어는 서툴렀지만, 그때 막 불어오던 인상주의의 새로운 화풍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훗날 남부의 아를(Arles)로 내려간 후에는 그곳에서도 파리에서 만났던 드가, 모네, 피사로 등과 새로운 화가 공동체를 세울 구상까지 하게 된다. 몽마르트르에 머물렀던 2년여의 시간 동안 반 고흐는 그야말로 질풍노도처럼 몇백 점을 헤아리는 그림을 그렸고 그동안 사랑의 상실에 대한 슬픔도 흉터만 남긴 채 서서히 아물어 갔다.

그가 그 언덕배기 화가촌에 머물렀던 때에는 아직 몽마르트르의 상징이 된 새하얀 사크레쾨르성당도 없었고 만국박람회 때 선보일 목적으로 세워지던 저 거대한 에펠탑도 없었다. 따라서 그가 그린 파리 풍경은 ‘파리의 지붕’이라는 작품에 드러나 있듯 수평적이며 고요하고 오래된 전원형 도시로 나온다. 딱히 ‘저것이 파리다’라고 할 만한 시각적 지표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전성기는 다시 그 파리를 떠났을 때에 열린다. 그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와 외로운 행성처럼 유랑하면서 그의 빛과 색도 함께 터져 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전성기는 전성기로되 참혹한 전성기였다. 작은 화랑을 운영하는 동생 테오가 보내주는 몇 푼의 생활비로 근근이 버티는 삶이었다. 화가로서 그의 존재감은 미미했고 그저 독백의 일기장처럼 홀로 그리고 홀로 거둬들이는 나날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아를은 평화로웠지만 점차 그 진공상태 같은 평화가 그를 질식시켜 가기 시작했다. 따뜻한 여인의 손길이나 그 손길에서 빚어져 나온 더운밥 한 끼 없는 삭막한 나날이었다. 다시 모든 상처의 기억들이 오롯이 살아났고 붓은 칼이 돼 스스로의 내면을 겨눠 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쩌면 불빛 은성하고 떠들썩했던 몽마르트르의 나날이 오히려 추웠지만 따뜻한 계절이었던 셈이다. 그렇다고 그 파리로 다시 올라갈 수도 없었다. 고향 네덜란드 쪽으로는 더더군다나 아니었다. 고갱은 타히티로나 떠났지만 그에게는 더 이상 떠날 곳이 없었다.

반 고흐의 마지막 떠남은 그래서 아예 지상을 뜨는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아를은 그의 ‘땅끝’이었던 셈이다. 그는 사랑에 실패하고 절망이 일용할 양식처럼 돼 자신이 마치 그 옛날 그렸던, 맨몸으로 얼굴 파묻고 ‘돌팍’에 앉아 있던 여인 시엔처럼 돼 있었다.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김병종 화가·서울대 명예교수·가천대 석좌교수

그런데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그림이 아닌 그의 편지며 일기, 에세이들이 쏟아져나왔다. 그림을 그리지 않을 때에는 홀로 정체가 애매한 글들을 많이 썼던 그였다. 그런 그의 글들이 먼저 세상을 향해 소리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글들은 한결같이 절절하고 눈물겨운 것이어서 사람들을 흔들어놓았다.

글로 감동 받은 사람들이 그림을 뒤지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문필가가 아닌 ‘화가 빈센트 반 고흐’라는 이름이 햇빛 아래 드러났다. 발길에 차이듯 홀대받던 그의 그림들이 별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 대목에서 어디선가 봤던 한 여행책자의 제목이 생각난다. “그러므로 떠남은 항상 옳다.” 여기에 한마디 덧붙인다면 “심지어 지상을 떠나는 일마저도”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지상을 떠나면서 그의 예술도 찬란하게 발화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빈센트 반 고흐의 슬픈 패러독스, 혹은 알고리즘이라 아니할 수 없다.

화가, 서울대 명예교수
가천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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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르세미술관의 빈센트 반 고흐실

파리 오르세미술관(사진) 5층 인상주의 갤러리에는 별도로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전시실이 마련돼 있다. 이 미술관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반 고흐의 작품을 소장한 곳이기도 하다. 반 고흐를 정통 인상주의 화가로 볼 것이냐에는 이론(異論)이 많지만, 인상주의 본류를 제치고 ‘이민자 화가’와 같은 반 고흐만이 그곳에 특별실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 전시실의 복도 한쪽에는 큰 유리창이 달려 있고 그 유리창 너머로 몽마르트르 언덕이 보인다. 새하얀 사크레쾨르성당(Basiligue du Sacre-Coeur)이 빛나는 몽마르트르와 대각선에, 한때 그곳에서 작업했던 화가의 작품이 대량 전시돼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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