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패션, 우크라이나 아픔 속으로 걸었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파리 패션위크에서 열린 발렌시아가 패션쇼에서 모델이 소지품을 가득 넣은 자루를 들고 눈이 내리는 듯한 무대 위를 위태롭게 걷고 있다. 발렌시아가는 이번 쇼에서 우크라이나 난민의 모습을 접목한 연출을 선보였다. CNN 캡처·발렌시아가

■ Global Window - 2022 파리 패션위크 리뷰

우크라이나 詩 낭송으로 개막
좌석엔 우크라 국기색 티셔츠

모델들 무거운 검은 자루 들고
눈보라속 비틀거리며 걷기 연출
음악 없이 침묵으로 진행하기도

러 군복 제작 디자이너는 퇴출
유명 브랜드마다 러 매장 닫고
난민들 위한 기부금도 쏟아져

3월 첫 주에 열린 프랑스 파리 패션위크(2022∼2023년 가을·겨울)는 당초 축제로 치러질 예정이었다. 2020년 봄부터 시작된 코로나19의 전 세계적 확산으로 각종 패션쇼가 취소되거나 연기된 가운데, 파리 패션위크는 드디어 일상으로 복귀하는 첫 대규모 패션 무대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패션위크가 시작되기 며칠 전 분위기가 바뀌었다. 2월 24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했기 때문이다.

파리에서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까지는 비행기로 불과 3시간 거리. 공습을 피해 지하철역에 마련된 피란처를 찾아 헤매는 우크라이나인들의 이미지가 전 세계로 타전됐고 더 이상 파리 패션위크는 화려한 축제의 장이 될 수 없었다. 특히 파리 패션위크가 시작된 1일 랄프 톨레다노 조직위원장은 “쇼를 엄숙하게, 어두운 시간을 반영하라”는 성명을 내고 반전을 촉구하는 패션쇼 분위기를 자아냈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발렌시아가 패션쇼에 마련된 좌석에 우크라이나 국기의 색인 노랑·파랑이 들어간 티셔츠가 놓여 있다. 뎀나 바잘리아 인스타그램

◇패션쇼에 반영된 전쟁의 참상 = CNN에 따르면 프랑스 패션 브랜드 발렌시아가의 쇼는 우크라이나어 시 낭송으로 시작했다. 행사장 500석이 넘는 좌석 위에는 노란색과 파란색, 우크라이나 국기 색의 티셔츠가 놓였다. 함께 놓여있던 메모에는 “지금 상황에서 패션위크를 하는 것이 어처구니가 없지만, 쇼 취소는 ‘항복’을 의미하기에 강행한다”고 쓰여 있었다. 이 브랜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뎀나 바잘리아의 메시지다.

특히 발렌시아가의 쇼는 흩날리는 눈보라 속을 모델들이 걷는 것처럼 연출됐다. 얇은 옷을 입고 나온 모델들은 옷깃을 여몄고, 몇몇은 검은 소지품을 가득 넣은 검은 자루를 들고 비틀거리며 걸었다. 전쟁을 경험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난민들의 모습을 쇼에 접목한 연출로 해석된다. 쇼에는 조지아 출신 바잘리아 디렉터의 개인적 아픔도 반영됐다. 그는 1993년 압하지야-조지아 분쟁으로 난민이 된 경험이 있다. 바잘리아 디렉터는 “우크라이나 전쟁은 내 트라우마를 촉발했다”며 “내 조국에도 같은 일이 일어났었고 나는 영원한 난민이 됐다”고 말했다.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쇼는 음악 없이 침묵으로 치러졌다.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아르마니 회장은 SNS에 자신의 쇼 영상을 공유하며 “쇼에 어떠한 음악도 사용하지 않기로 한 내 결정은 비극을 맞은 이들을 존중하는 표시로 만들어졌다”며 그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우리 주변에서 매우 불안한 일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축하하고 싶지 않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프랑스 브랜드 이사벨 마랑의 디자이너 이사벨 마랑이 패션쇼 말미에 우크라이나 국기의 색이 들어간 티셔츠를 입고 인사를 위해 무대에 오르고 있다. 이브닝 스탠더드 캡처

이 밖에도 영국의 스텔라 매카트니는 쇼의 마지막을 존 레넌의 반전 메시지를 담은 곡 ‘기브 피스 어 챈스(Give peace a chance·평화에 기회를 주세요)’로 채웠으며 덴마크의 세실리에 반센은 쇼 말미에 “함께하는 고요한 순간(quiet moment of togetherness)”이라고 불린 묵념의 시간을 집어넣었다. 프랑스 브랜드 이사벨 마랑의 디자이너 이사벨 마랑은 우크라이나 국기의 색인 파랑·노랑이 들어간 티셔츠를 입고 쇼의 마지막에 등장해 우크라이나에 연대를 표했다.

반면 러시아의 유명 디자이너 발렌틴 유다스킨은 파리 패션위크에서 퇴출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가 지난 2008년 러시아 정부의 요청으로 육군, 해군, 공군 병사들의 군복 85개 종류를 제작한 바 있기 때문이다. 특히 톨레다노 파리 패션위크 조직위원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파리 패션위크 관계자들은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유다스킨의 입장을 듣고 싶었지만, 그는 침묵으로 일관했다”면서 “그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반대했다면 패션위크에서 퇴출당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밝혔다.

◇패션쇼 밖에서도 우크라이나 응원 = 패션쇼장을 벗어난 곳에서도 패션 업계의 러시아 보이콧과 우크라이나 연대가 본격화하고 있다. 주로 러시아 영업을 중단하고 매장을 폐쇄하거나, 배송을 중단하는 형태가 많다. 유엔난민기구 등을 통한 우크라이나 지원도 이어지고 있다. 특히 지난 4일 프랑스 패션 브랜드 에르메스가 러시아에서의 모든 상업 활동을 중단한다고 밝힌 이후 루이비통 모에 헤네시(LVMH)도 러시아 매장 운영 중단에 돌입했다. 러시아 전역 120여 곳 매장이다.

샤넬도 러시아 내 17개 매장의 문을 닫았다. 구찌, 발렌시아가, 생로랑 등을 보유한 케링 그룹과 프라다 그룹, 몽클레르도 러시아 매장 일시 중단을 결정했다. 에스티로더, 로레알, 유니레버 등 뷰티 기업들도 러시아 내 모든 사업 활동 중단에 나섰다. 버버리와 마이테레사 등은 러시아로의 배송을 중단시켰다. H&M그룹 역시 러시아 내 170여 개 매장 판매를 일시 중단한다고 밝혔다. 자라의 모기업 인디텍스 그룹도 502개의 러시아 매장을 임시 폐쇄하고 영업을 중단한 상태다. 영업 중단 등의 보이콧과 더불어 우크라이나 난민에 대한 지원도 이어지고 있다. LVMH는 국제 적십자 위원회에 500만 유로(약 67억 원)를 기부했다. 버버리도 영국 적십자사를 통해 동참했다. 케링 그룹의 구찌 역시 유엔난민기구에 50만 달러를 기부해 우크라이나 난민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임정환·박세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