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간 비시즌에 매일 3~4시간 헬스… 몸 관리 못할 때 오심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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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입력 2022-10-14 09:14
업데이트 2022-10-14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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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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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나광남 KBO 심판위원이 지난 6일 창원NC파크에서 열린 NC-KT전에서 주심으로 출전, 스트라이크를 선언하고 있다. NC 제공



■ M 인터뷰 - 나광남 프로야구 심판위원

KBO 첫 3000경기 출전 달성
140년 MLB도 88명뿐인 기록
철저한 자기관리 있었기에 가능
안경 못써 30대부터 눈도 신경써

1989년 1군에 데뷔한 선수 출신
부상 후 1992년 심판 인생 시작
심판은 기계적 아닌 공정이 우선

지금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선수
착실하면서 예의도 바른 이승엽
신인때 괴물피칭 선보인 류현진


창원=정세영 기자

나광남(55) 심판위원은 프로야구계에서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은 베테랑 심판이다. 평소 현장에서 정확한 판정을 내리는 심판으로 손꼽힌다.

최근 나 심판위원에겐 ‘철인’이라는 수식어까지 붙었다. 그는 지난 11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2022 신한은행 쏠(SOL) KBO리그 LG와 KT전에 1루심으로 나섰고, KBO리그 역대 최초로 3000경기 출전을 달성했다. 3000경기 출전은 14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메이저리그(MLB)에서도 단 88명만이 달성한 대기록이다.

3000경기 출전을 앞둔 지난 6일 나 심판위원을 창원NC파크에서 만났다. 그는 “3000경기는 젊은 시절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막상 닥치니까 크게 와 닿지는 않는다”면서 “매년 겨울 쉬지 않고 몸 관리를 잘했던 것이 3000경기 출장이라는 값진 결과를 만든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나 심판위원은 일찌감치 능력을 인정받았다. 지난 1992년 4월 KBO 공채로 심판복을 입은 나 심판위원은 그해 4월 10일 광주구장에서 열린 한화와 해태의 경기에서 심판 데뷔전을 가졌다. 이후 승승장구했다. 2003년 5월 28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두산과 삼성전에서 역대 17번째로 1000경기를 달성했고, 2008년엔 ‘팀장’으로 승진했다. 나 심판위원은 국제무대에서도 실력을 인정받았다. 2013년 제3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등에서 심판을 맡는 등 다수의 국제대회에 출전해 한국 심판의 우수성을 알렸다.

나 심판위원이 롱런할 수 있었던 건 철저한 ‘자기 관리’가 있었기 때문. 심판복을 입은 지 30년이 훌쩍 지났지만 ‘열정’은 여전하다. 특히 프로야구 경기가 열린 전국 방방곡곡을 다녀야 하지만 체력은 젊은 심판들에게 밀리지 않는다. 나 심판위원은 겨울엔 헬스장에서 거의 살다시피 한다. 또 비시즌 주말엔 산에 오르며 하체와 지구력을 다지고 마음을 힐링한다. 키 180㎝, 체중 74㎏의 왜소한 체구의 핸디캡을 극복한 비결이다.

나 심판위원은 “심판들의 체력 관리는 겨울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면서 “프로 심판이 된 이후 겨울엔 하루도 빠짐없이 3∼4시간을 헬스장에서 보내고 있다. 이런 점에서 남들보다 열심히 했다고 생각한다. 3000경기에 출전하게 된 큰 원동력”이라고 강조했다.

심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눈 관리. 심판은 찰나의 순간을 잘 캐치해야 한다. 나 심판위원은 “심판들은 사실 안경을 쓸 수 없다. 주심의 경우엔 마스크, 여름엔 습기 때문에 안경을 거의 쓰지 않는다”면서 “나는 30대부터 눈 관리에 신경을 썼다. 요즘엔 눈 안마기를 쓰고 있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덧붙였다.

나 심판위원은 프로야구 현역 선수 출신이다. 1989년 삼성 유니폼을 입고 1군에 데뷔한 나 심판위원은 24세이던 1991시즌을 마치고 현역 생활을 완전히 마감했다. 프로 통산 성적은 104경기에서 타율 0.104 7타점 20득점. 나 심판위원은 경기 중 슬라이딩을 하다 심각한 어깨 부상을 당했다. 당시 병원에서 “운동을 포기하라”며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진단을 받았다. 어깨에 좋다는 각종 민간요법을 다 써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나 심판위원은 “프로에서 성공하는 게 꿈이었고, 좀 더 길게 선수 생활을 했으면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면서 “지금의 의료 기술로는 고칠 수 있는 부상이지만, 당시엔 그렇지 않았다”고 떠올렸다.

나 심판위원은 좋아하는 ‘야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1991년 겨울, 한 지인의 조언으로 심판학교에 참가했고, 10 대 1의 경쟁을 뚫고 합격했다. 이듬해인 1992년 4월부터 심판으로 활동했다. 나 심판위원은 “1992시즌 시범경기를 통해 최종 합격자를 가렸는데, 30년 전 이야기지만 아직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고 회상했다.

심판은 ‘잘해야 본전’이다. 오심 하나로 인해 빗발치는 비난의 화살을 맞기 일쑤다. 게다가 요즘엔 촬영 장비의 발달로 TV 화면에서 오류를 금방 짚어낸다. 정확한 판정으로 이름이 높지만 2014년은 나 심판위원에게도 ‘악몽’이었다. 그해 4월 말 두 차례 오심 논란에 휘말린 것이다.

특히 4월 29일 광주에서 열린 SK(현 SSG)와 KIA전에선 2회 오심 후 중도 교체됐다. 심판 경력에 치명적인 오점이었다. 나 심판위원은 “당시 건강에 이상이 생겨 며칠 동안 밤새 잠을 자지 못하고 끙끙 앓던 끝에 게임에 나섰는데 결국 연속으로 큰 오심이 났다. 2회 말 종료 직후 대기심에게 교체를 요청했다. 몸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내 잘못”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동안 내가 쌓아왔던 것을 그해 다 잃어버렸다. 잘했던 것이 한순간에 허물어졌다. 여러 생각이 들었다. ‘심판을 그만둬야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족들을 위해 포기할 수는 없었다. 꾹 참고 버틴 것”이라고 말했다.

그랬던 나 심판위원은 지난해 그간의 마음고생을 훌훌 털어낼 수 있었다. 그는 지난해 연말 KBO리그 시상식에서 심판상을 받았다. KBO는 해당연도 스트라이크존의 정확성과 판정 번복 횟수 등 여러 요소를 꼼꼼히 따져 수상자를 결정한다. 나 심판위원은 “그간의 맘고생을 털어낼 수 있었던 내겐 정말 값진 상이었다. 그간 위축도 많이 되고, 힘들었지만, 그 상을 받고 너무 기분이 좋았다. 아내, 가족들도 매우 좋아했다”고 환하게 웃었다.

심판, 특히 주심은 포수를 제외하고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객관적으로 선수들의 기량을 살필 수 있다. 나 심판위원도 KBO리그의 내로라하는 스타들의 성장을 바로 가까이서 지켜봤다. 나 심판위원은 가장 인상이 남는 선수로 이승엽을 콕 찍었다. 나 심판위원은 “이승엽은 신인 때부터 은퇴할 때까지 리그 최고 선수였다. 이승엽은 늘 한결같다. 착실하고, 예의도 바르다. 타석에 들어설 때도 늘 ‘고생이 많으십니다’라며 격려의 말을 건넸다. 심판 생활을 하면서 단연 기억에 남는 선수를 꼽으라면 이승엽”이라고 말했다.

류현진(토론토 블루제이스)도 잊을 수 없는 선수다. 나 심판위원은 “류현진이 신인이었던 2006년 하와이 전훈 때 심판 훈련을 위해 그곳으로 갔는데, 류현진이 신인 투수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노련한 피칭을 하더라. ‘야! 이 친구 크게 사고 치겠는데’라고 생각했고, 진짜 그해 류현진은 신인왕에 MVP(최우수선수상)까지 받더라. 신인 류현진도 아주 기억에 남는 선수”라고 전했다.

나 심판위원은 그라운드에선 냉철함을 잃지 않은 ‘명판관’이지만, 야구장을 떠나면 확 달라진다. 성품이 온화하고, 친화력이 뛰어나다. 그래서 나 심판위원에겐 늘 사람이 몰린다. 김성철 심판위원은 “언제나 후배들을 챙긴다. 경기장에선 냉철한 심판이지만, 운동장 밖에선 모두에게 모범이 되는 선배”라고 말했다. 나 심판위원은 “잔소리하기보다는 몸으로 보여주려고 한다. 후배들에게 내 행동으로서 하나라도 주자는 마음”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프로야구 판정에는 과학적 영역이 넓어지고 있다. 비디오판독이 도입됐고, 현재 2군 리그에선 로봇 심판이 시범 도입돼 운영 중이다. 나 심판위원은 “인간의 눈으로 살필 수 없는 사각지대를 없애고 정확한 판정을 유도한다는 의미가 있지만, 운용의 묘를 발휘할 수 없는 등 부작용도 분명히 있을 것”이라면서 “로봇 심판이라는 시대의 흐름을 막을 순 없겠지만 로봇 심판이 제대로 자리 잡기까진 쉽지 않은 과정이 필요하다. 심판들은 기계적인 판정이 아니라 공정한 판정을 하려고 애쓴다”고 강조했다.

심판은 늘 스트레스와 싸워야 한다. 나 심판위원은 “술을 잘 마시지 못하지만, 경기 뒤 맥주 한잔은 스트레스를 푸는 유일한 수단”이라며 “선수들이 팬들 앞에서 최상의 경기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원활하게 경기를 운영하는 게 심판의 역할이다. 은퇴하는 날까지 항상 최선을 다한 심판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밝혔다.

■ ‘3D직종’ 꼽히는 KBO심판

장거리 이동 많고 부상위험까지 도사려… 가족에겐 ‘죄인’인 직업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6일 NC-KT전 주심으로 KBO 첫 3000경기 출전을 달성한 나광남 KBO 심판위원. NC 제공



프로야구 심판은 고된 직업이다. 9번 잘하더라도 1번 실수하면 엄청난 비난이 쏟아진다. 두 팀으로 나뉘어 치열한 경쟁을 펼치는 야구에선 어떤 판정을 내려도 미움받기 마련이다. 또 경기가 없는 월요일을 제외하면 늘 경기장에서 살아야 한다. 주심의 경우, 3㎏이 넘는 보호장비를 차고 짧게는 3∼4시간을 집중하고 서 있어야 한다.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눈과 귀는 늘 초긴장 상태다. 일각에선 프로야구 심판을 ‘3D 직종’으로 꼽는다.

특히 프로야구 심판은 늘 부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파울 타구가 ‘주적’. 그런데 KBO리그 주심은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 일본프로야구보다 더 많이 파울 타구를 맞는다. KBO리그 심판들은 홈플레이트 정중앙 뒤에 가까이 자리하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 좀 더 정확한 판정을 내리기 위함이다. 메이저리그 주심들이 부상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타자 쪽에 붙는 것과 다르다.

프로야구 심판들은 전국 5개 구장에서 경기가 열리는 특성상 원정 이동도 많다. 그래서 심판들은 선수 못지않게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한다. 원정 이동은 고될 수밖에 없다. 5명이 한 조로 구성된 심판팀은 한국야구위원회에서 제공하는 밴을 이용한다. 여기에 이동은 대부분 ‘심야’에 이뤄진다. 장거리, 그리고 새벽 이동은 늘 위험하다.

심판들은 가족에겐 ‘죄인’이다. 정규리그 기간엔 가족들에게 거의 신경을 못 쓴다. 겨울에도 각종 워크숍 등이 진행된다. 그래서 대다수 심판은 겨울엔 운동하는 시간을 빼곤 가족과 보내려고 한다. 나광남 심판위원은 “아내가 희생을 많이 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이야기를 안 했지만, 정말 미안하다. 아내는 지금도 겨울엔 건강 관리에 많은 신경을 써준다. 너무 고마운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심판들의 처우는 열악하다. 1980년대 월급은 30만 원. 현재는 초봉이 3000만 원 정도다. 10년 차 이상이 되면 5000만 원 전후의 월급을 받지만 대기업 평균 연봉엔 훨씬 못 미친다. 허운 심판위원장은 “당장은 좋은 더 나은 처우를 요청하기보다는 우리가 먼저 신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판정의 편차를 최소한으로 줄여 신뢰받는 심판 조직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정세영 기자 niners@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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