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시간이나 늦은 사절단을 너그럽게 환대… “정말 고마웠습니다”

  • 문화일보
  • 입력 2022-10-26 09:04
  • 업데이트 2022-10-26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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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립습니다 -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1910∼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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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졸업 후 1980년대 초반 대한(서울)상공회의소 국제통상부에 입사했다. 그곳에 첫발을 내디딘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을 방문한 미국상공회의소 사절단 일행을 수행해 국내 주요 경제계 인사들을 예방하게 되었다. 그 첫 번째 일정으로는 오전 9시께 서울 종로구 계동 현대그룹 본사를 방문하고 이어서 10시에 태평로 삼성사옥을 방문하기로 사전에 조율했다. 통상 이러한 일정은 그 시각의 교통상황 등을 고려해 한 치 빈틈없이 다음 목적지에 5분 전 도착해야 했다.

제 시각에 현대그룹 본사에 도착해 우선 정주영 회장과 잠시 면담하고 이어 그룹 임원들과 40분간 간담회를 열었다. 당시 시계를 보니 현대그룹에서 남은 시간은 10분밖에 없었다. 이를 확인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현대그룹 담당 직원에게 그러한 사실을 알렸다. 그렇게 현대그룹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했다고 생각하고 일행과 일어나려는데 갑자기 불이 꺼지면서 출입문이 닫혔다. 그러고는 현대그룹 홍보 영상을 상영했다. 그 누구도 손쓸 겨를이 없었다. 나는 영상이 상영되는 내내 좌불안석이었다. 그래도 ‘빨리 끝나겠지’라고 고대했다. 그런데 그 영상 상영은 20분을 넘겨 30분이 지나도 끝나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 당시 1980년대 초반에는 핸드폰은 물론 삐삐도 없었다. 예정시간이 되어도 우리 일행이 나타나지 않자 삼성그룹 비서실에서는 그 사연을 확인할 수 없어서 애간장을 태웠으리라고 본다. 그렇게 지옥과도 같았던 그 영상 상영은 무려 40분이 지나서야 끝났다.

당시 이병철 회장께서는 어떤 약속도 5분 이상 더 안 기다린다고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에 나의 낭패감과 초조함은 극에 달해 있었다.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사전에 약속한 시각보다 1시간 정도 늦게 삼성 본관 회장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당시 이 회장은 21층 접견실 앞에서 1시간 넘게 학수고대하면서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내가 감히 고개를 들 수 없었으나 곁눈질로 바라본 삼성그룹 비서진과 배석 임원진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나는 안절부절못하고 방한 사절단 일행을 접견실로 들여보내고 바깥 의자에 넋이 빠져 앉아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병철 회장을 한 시간이나 바람맞힌 건은 그냥 넘어갈 사안 같지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온몸에 맥이 다 풀리는 느낌은 좀처럼 가셔지지 않았다. 드디어 미팅이 끝나고 방한 사절단 일행이 나왔다. 이병철 회장께서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하시는데 나는 죄송해서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했다. 그리고 인사하면서 잠깐 회장님과 눈을 마주쳤다. 키도 크지 않은 마른 체구에 안경을 쓴 이 회장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나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직전에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송구한 마음을 전했다.

그날 오후 일정을 마무리하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이제 한바탕 난리가 나겠구나 싶어 조용히 자리에 앉아 주변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무실이 너무 평온해 더욱 긴장되었다. 상사에게 한바탕 야단을 맞고도 남을 사안인데 사무실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며 ‘아, 아무도 모르게 잘 넘어가는 것 같네. 다들 아직 모르고 있는가 보네’라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왠지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도록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평온하게 지나가고 나는 기가 다시 살아나서 그때 일을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세월이 지나고 나이 들어 생각해 보면 그 당시 대형 의전 사고에 대해 주변 사람들이 절대 모를 리가 없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곤 한다. 일단 삼성그룹 비서실에서 책임 소재를 따지고 항의를 했을 법도 한데 그냥 넘어갔다는 게 잘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오래 세월이 지난 후 비로소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역시 거인 이병철 회장이셨구나. 포용력과 관대함이 넘치는 보기 드문 지도자였구나. 그 후 나는 가끔은 그분을 생각하면서 그날 체험한 감동을 가슴에 아로새긴다. ‘그땐 정말 고마웠습니다. 이병철 회장님!’.

이인희 박사, 전 서울상공회의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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