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종의 시론>차라리 ‘민정수석실’ 부활하라

  • 문화일보
  • 입력 2022-11-07 11:42
프린트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이현종 논설위원

대형사고 전 반드시 징후 나와
사고 전 신고 무시, 지휘부 부재
尹도 이런 지휘·보고 붕괴 몰라

정보와 채찍은 국정 운영 필수
대통령실, 부처 장악 아직 못해
공약보다 중요한 건 국정 성과


대형 사고가 발생하기 전에 여러 가지 징후가 나타난다고 한다. 1920년대 미국 한 보험회사 관리자였던 허버트 W 하인리히는 7만5000여 건의 산업재해를 분석해본 결과, 1 대 29 대 300이라는 ‘하인리히 법칙’을 발견했다. 1번 대형 사고는 그 전에 29번의 작은 재해가 발생하고, 그 이전에 같은 원인으로 300번 부상 당할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이 법칙이 시사하는 것은 사소한 일을 무시하면 큰 사고를 불러일으킨다는 교훈이다.

이번 참사도 그랬다. 가깝게는 사고 발생 4시간 전부터 112신고센터에는 압사 사고가 일어날 것이라는 신고가 잇달아 접수됐다. 오후 6시 40분쯤 최초의 신고는 ‘골목길에 내려오는 인파와 올라가는 인파 때문에 압사 사고가 날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11차례 신고 전화는 무시됐다. 앞서 광화문에서 민주노총과 촛불집회, 보수단체 집회 등 하루에만 15건의 집회가 몰려 경찰이 집중적으로 배치됐다. 보수·진보 집회가 함께 열리다 보니 불상사에 대비하는 차원이었다. 그런데 윤희근 경찰청장은 충북 제천으로 산행을 떠났고, 김광호 서울경찰청장은 관사 대신 강남 대치동 집에서 쉬고 있었다. 서울청 112신고센터 류미진 상황관리관은 5층 센터 대신 10층 자신의 사무실에 있었다. 현장 책임자인 이임재 용산서장은 현장 보고를 받고도 굳이 차를 타고 이태원으로 가겠다고 고집하다가, 걸어서 10분 거리를 차 안에서 1시간 가까이 허비했다. 누구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할 일을 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윤석열 대통령은 이런 징후를 파악하고 있었을까. 그나마 국정상황실에서 소방청의 보고를 받고 행정안전부 장관이나 경찰청장보다 빨리 사고를 파악해 보고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사후약방문이다. 경찰 조직의 지휘·보고 체계가 완전히 붕괴돼 있었다는 사실을 미리 감지하기엔 역부족이다. 물론 조짐은 있었다. 행안부 경찰국 신설을 둘러싸고 경찰대 출신들, 특히 일선 서장을 맡은 총경들이 집단 반발했다. 윤 정권에 대한 충성도도 매우 떨어졌다. 임명된 지 3개월밖에 안 된 경찰청장이 서울 시내에 시위와 핼러윈 축제로 난리가 났는데 산행을 즐기다 전화도 못 받았다.

한비자는 제왕이 통치를 위해선 ‘법(法)·술(術)·세(勢)’ 3가지가 필요하다고 했다. 법은 신상필벌을 위한 제도이고, 술은 사람을 부리는 용인술이다. 세는 권위라고 해석된다. 호랑이가 개를 이길 수 있는 것은, 긴 수염과 몸에 새겨진 매화 문양이 아니라 단단한 어금니와 날카로운 발톱이라고 한다. 그런데 윤 대통령에게는 단단한 어금니와 발톱이 보이지 않는다. 요즘 관가에서는 윤 대통령을 별로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나돈다. 대통령실이 부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은 후보 시절 울산시장 선거 개입 사건을 보면서 청와대의 민정수석실을 없애겠다는 결심을 했다. 대통령이 권력을 이용해 불법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뜻은 이해하지만, 그동안 민정수석실에서 했던 공직기강 확립, 부처 간 이견 조율 등 긍정적인 효과도 모두 사라졌다. 특감반이 없어지면서 공직 기강을 감찰할 기구가 마땅치 않다. 이 때문에 문제가 곪아 터져야 대통령실이 개입한다. 최근 국가정보원 조상준 전 기조실장의 갑작스러운 사퇴가 대표적이다.

이러니 경찰 수뇌부가 동시에 자리를 비우는 기강 해이가 벌어지고 있어도 대통령실은 속수무책이다. 또 부처 내에서는, 정권이 바뀌었는데 전 정권 때 잘나가던 인사들이 여전히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높다. 대통령 혼자 열심히 해봐야 정보와 채찍이 없는 대통령실을 공무원들은 무서워하지 않는다.

선의(善意)와 현실은 다르다. 국정 운영은 당근도 필요하지만, 채찍도 써야 한다. 약속 위반이라는 비난을 감수하고라도 국가 운영을 위해 필요하다면 민정수석실을 부활할 필요가 있다. 부정적 역할은 줄이더라도 공직 사회 기강을 잡고 정보의 신속한 수집과 판단을 위한 조직 개편이 절실하다. 윤 대통령은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공약을 어긴 것은 잠깐의 비난이지만 국정의 실패는 두고두고 비판받을 일이다. 지금이라도 과감한 국정 대개조에 나서야 한다.
주요뉴스
기사댓글
AD
count
AD
AD
AD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