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호의 시론]‘청담동 술판’ 개소리의 정치학

  • 문화일보
  • 입력 2023-01-20 11:24
  • 업데이트 2023-01-20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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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논설고문

언어가 타락하는 개소리 시대
거짓말과 달리 진실 상관없이
약간 뻔뻔함만 필요한 개소리

개소리엔 논쟁 휘말리지 않고
아예 외면하거나 무시가 정답
오바마 진정 어린 설득 돋보여


개소리는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당치도 않은 말이다. 하지만 비속어를 넘어 현대 철학의 진지한 탐구 주제로 어엿이 자리 잡았다. 2005년 미국 프린스턴대 해리 프랭크퍼트 명예교수의 소책자 ‘개소리에 대하여(On Bullshit)’가 그 효시였다. 서울대는 2015년 논술고사에 이 책을 지문으로 싣고 ‘(개소리가 순화된) 빈말과 거짓말의 차이점을 논하시오’라고 물었다. 그만큼 개소리가 만연하고 현대 사회의 언어는 타락했다.

프랭크퍼트는 개소리와 거짓말은 잘 구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거짓말쟁이는 팩트를 알아야 거짓말을 지어낼 수 있다. 나름의 엄밀성과 진정성이 필요한 것이다. 반면, 개소리는 사실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굳이 공들여 만들 필요가 없다. 가짜로 들통나도 ‘웃자고 하는 소리에 죽자고 달려드냐’고 하면 그만이다. 오로지 약간의 뻔뻔함만 있으면 된다. 거짓말쟁이도 개소리쟁이에 비하면 양반이다.

철학자들의 대표적 연구 대상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다. 그는 흑인·이민자·동성애자 등 약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혐오 공격으로 ‘떴다’. 트럼프에게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고, 그는 애써 거짓말을 꾸며내지도 않았다. 오히려 차별과 분열을 자극하는 뻔뻔한 개소리로 극우 진영의 맹목적 지지를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렇다면 지난해 말 ‘청담동 술자리’ 사태 당시 김의겸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발언은 거짓말일까, 아니면 개소리일까. 폭로 주인공인 여성 첼리스트는 경찰 수사에서 녹취 내용이 가짜라고 진술했다. 거짓말이라는 자백이다. 이로 인해 그는 사회적 비난을 받았으며,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사과도 했다. 하지만 김 의원은 “그날로 되돌아간다 해도 저는 다시 같은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팩트에 개의치 않고, 떳떳하다는 입장이었다. 프랭크퍼트의 분류에 따르면 한마디로 ‘개소리’다.

영국의 제임스 볼이 ‘개소리는 어떻게 세상을 정복했는가’에서 소개한 현실은 끔찍하다. 버락 오바마가 당선된 날, 구글에선 ‘최초의 흑인 대통령’보다 ‘깜둥이 대통령’이 훨씬 많이 검색됐다. 백인 우월주의 사이트 가입은 10배나 늘었다. 실제로 김 의원 관련 인터넷 댓글도 양쪽으로 쫙 갈라졌다. 야당 지지자의 70%는 “청담동 술자리는 사실”이라고 믿었다. 김 의원은 1억5000만 원 정치 후원금 한도도 조기에 채웠다. 개소리의 대표적 성공 사례다.

현대 심리철학은 개소리가 거짓말보다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조국 사태 때 “정경심 교수의 컴퓨터 반출은 증거인멸이 아니라 증거 보존용”이란 유시민 작가의 발언도 그중 하나다. 검찰 수사로 컴퓨터 반출이 증거인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도 유 작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조국 지지자들은 오히려 그의 주장을 철통같이 믿고 서초동으로 몰려나갔다. 개소리의 전형적 성공 방정식이다.

개소리를 치유하긴 쉽지 않다. 강성훈 서울대 철학과 교수의 해설이다. “프랭크퍼트 진단에 따르면, 개소리를 발생시키지 않으려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주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10억 원 소송을 제기한 한동훈 법무부 장관처럼 일일이 맞대응하는 게 효과적일까. 철학자들의 진단은 정반대다. 한마디로 소용없는 짓이다. 오히려 상대 진영을 결집시키고 개소리의 역효과만 키워주는 부질없는 일이다. 개소리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무시하는 게 정답이다. 개소리와의 논쟁은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할 뿐, 아예 휘말리지 않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대단히 힘들긴 하지만 최선의 해법은 옳은 소리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가끔 상대 진영에 손을 내미는 지도자가 있다는 점이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도 그중 하나로 기억된다. “우리 미국에는 두 가지 부류의 애국자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라크전에 찬성하는 애국자이고, 또 하나는 이라크전에 반대하는 애국자입니다.” 반대 진영 설득에 진심이었던 오바마 덕분에 미국은 큰 무리 없이 이라크 철군을 이끌어 냈다. 한국엔 이런 오바마가 보이지 않는다. 갈수록 트럼프만 판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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