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호의 시론]SVB 사태 묵시록…미 국채 위상 추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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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입력 2023-03-17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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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논설고문

기존 금융위기 공식 모두 실종
23조 달러 미 국채는 숨은 뇌관
국채 담보 액면가 평가 주목해야

미 연준과 일·중 일제히 매도 중
中은 미 국채를 위험자산 간주
최대 악몽은 미 국채 위상 붕괴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사태는 처음 경험하는 위기다. 전통적인 위기 공식이 모두 깨졌다. 무엇보다 금리가 오르면서 SVB가 보유한 미 국채가 파산을 부른 것부터 처음 보는 일이다. 부실 채권이 아니라 초우량 자산이 뇌관이 될 줄은 누구도 몰랐다. 이러니 사전 경보도 깡그리 증발했다. 무디스는 3월 초에도 SVB에 중상급 투자적격인 A3를 매겼다. 자금 조달이 실패한 지난 8일에야 부랴부랴 Baa1으로 내렸으나 여전히 신용 적절 수준이었다. 그 이틀 뒤 뱅크런이 터지자 투자부적격인 Caa2로 10등급이나 폭락시켰다. 사전에 위기 징후를 감지해야 할 신용 평가 기능이 실종된 것이다.

미 금융 당국의 SVB 사태 해법도 마찬가지다. 미 연준(Fed)·연방예금보험공사는 일요일이던 12일 비상회의를 열어 신종 처방을 쏟아냈다. SVB와 시그니처은행에는 “결정적인 행동에 나선다”며 즉각 폐쇄와 함께 예금 전액을 보장했다. 부동산 투자 부실의 퍼스트 리퍼블릭 은행엔 미 연준과 JP모건이 7억 달러의 긴급 유동성을 지원했다. 다양한 표적 항암치료를 총동원한 셈이다. 유일한 기준이라면 내년 대선에서 혈세 논란을 부를 구제금융 투입만 극구 제외했다는 점이다. 당연히 논란은 꼬리를 문다. 아무리 초동 진압이 중요해도 예금 전액 보장의 초법적 조치는 지속 불가능하다. 미 언론들도 “이례적인 개입 조치”라며 “벤처와 부유층 자산을 전액 보호했다는 정치적 논란을 부를 것”이라 경고했다.

정말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따로 있다. 위기 은행이 담보물로 미 국채와 주택저당증권(MBS)을 내놓으면 시장가가 아닌 액면가로 평가해 현금을 내주겠다는 것이다. 현재 미 10년물 국채는 평균 20%쯤 손실이 난 상태다. 또, 일반적으로 국채를 담보로 잡을 때는 ‘헤어 컷’을 적용한다. 예를 들어 100만 원을 빌리려면 105만 원어치의 국채를 담보로 제공해야 한다. 한국은행도 관행적으로 헤어 컷 105%가 원칙이다. 따라서 미 재무부의 국채 액면가 매입 조치는 더 이상 국채 손실로 인한 은행 파산은 막겠다는 강력한 의지다. 하지만 여기엔 미국의 심각한 고민이 또 하나 숨어 있다. 미 국채 발행 잔액은 23조7000억 달러. 무려 3경이 넘는 엄청난 규모다.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 말(16조7000억 달러)과 비교하면 42%나 폭증했다. 만약 위기 은행들이 헐값으로 국채를 던지면 시장은 악순환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된다.

실제로 불안한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무엇보다 전통적인 큰손 3곳이 모두 국채 시장에서 발을 빼는 중이다. 최대 큰손인 미 연준은 양적 긴축으로 방향을 틀면서 보유 국채를 매달 600억 달러씩 내다 팔고 있다. 2위 큰손인 일본은행의 움직임도 심상찮다. 지난해 미 국채 보유량이 연초(1조2180억 달러)보다 연말에 줄어들었다. 미 금리 인상으로 국채값이 떨어진 만큼 보유 채권을 파는 건 당연한 현상이지만, 그 자금을 엔화 환율 방어에 쏟아붓는 게 미 월가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일본의 제로금리-미국 고금리’ 흐름에선 일본의 미 국채 매도가 구조적으로 거세지기 때문이다.

3위 중국은 더 심각하다. 2013년 중국은 사상 최대인 1조3200억 달러의 미 국채를 쌓아 놓았다. 미·중 갈등에도 미 국채 사랑은 변함없었다. 지난해 우크라이나 전쟁이 변곡점이었다. 러시아 해외 자산이 묶이는 것을 본 중국 입장에서 더 이상 미 국채는 안전 자산이 아니었다. 언제 동결될지 모를 위험 자산이 됐다. 지난해 중국은 미 국채 1738억 달러를 팔아치울 만큼 싸늘하게 돌아섰다. 미 국채 보유액 8623억 달러는 2010년 이후 최저치다. 중국은 그 매각대금으로 금을 대량 사들이는 한편 값싼 러시아산 원유 비축에도 열심이다.

미 국채는 달러 기축통화와 함께 슈퍼 파워 미 경제를 떠받치는 두 기둥이다. 미국으로선 중국과 일본이 함께 미 국채를 투매하는 건 끔찍한 악몽이다. 자칫 달러 기축통화국 위상까지 뒤흔들지 모를 대량파괴무기가 될 수 있다. 미국이 SVB 사태에서 미 국채를 특별 취급하는 데는 다분히 이런 국가적 우려가 깔려 있다. 미국은 머지않아 SVB 파문을 수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불안해진 미 국채의 위상 하락에 어떻게 대처할지는 두고두고 지켜봐야 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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