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잃어버릴 때 세상은 끝나버리죠… “있을 때 잘하세요”[주철환의 음악동네]

  • 문화일보
  • 입력 2023-03-20 08:57
  • 업데이트 2023-03-20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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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철환의 음악동네 - 카펜터스 ‘탑 오브 더 월드’

이선희가 부른 ‘알고 싶어요’(1986)에는 12가지 시시콜콜한 문항이 나온다. ‘달 밝은 밤에 누구를 생각하나’ ‘잠이 들면 무슨 꿈을 꾸나’ 이렇게 시작해서 ‘내가 많이 어여쁜가’ ‘진정 나를 사랑하나’ 등으로 마무리 체크한다. 노래로 엮은 사랑의 청문회다. 중간엔 동물과 기계도 등장한다. ‘참새처럼 떠들어도 여전히 귀여운가요’ ‘바쁠 때 전화해도 내 목소리 반갑나요’.

신혼의 ‘사랑과 평화’가 중년의 ‘사랑과 전쟁’으로 바뀌는 건 대체로 말 때문이다. 언어의 온도와 간섭의 빈도가 영향을 미친다. 냉동실에서 꺼낸 감정은 입속에서 좀 데웠다가 내뱉으면 좋으련만 5초를 못 참는다. 말이 넘칠 땐 기술적으로 편집해야 한다. 길게 말하는 건 시간 경과이자 용량 초과다. 듣는 사람은 부담스럽고 고통스럽다. 직사광선 아래 몹시 길었던 교장 선생님의 훈화를 떠올려보라. 부실한 마이크의 성능과 현기증의 기억이 어른거리지 않는가.

말 많고 뜨겁기로 이곳도 뺄 수 없다. ‘기생충’ ‘미나리’ 이후 남의 잔칫상이 아닌 곳. 이번 95회 아카데미시상식도 말의 성찬식이었다. 수상자나 수상작만큼 수상소감도 흥미롭다. 주제는 감사(Thank you)지만 명단 나열로 그치지 않는다. 파노라마처럼 스치는 모든 것, 살아온 모든 곳을 한꺼번에(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아우르려니 자신의 드라마를 몇 분 안에 응축해야 한다. 생방송이니만큼 한 사람이 너무 길게 말해도 곤란하다. 감정 조절은 당사자, 시간 조절은 담당자의 몫인 만큼 사회를 맡은 지미 키멜부터 초반에 시범을 보였다. 서론이 길어지는 조짐을 보이자 한 무리의 댄서들이 경쾌한 음악과 함께 그를 무대에서 밀어내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양자경(1962년생)은 “전성기가 지났단 말 믿지 마세요”라며 ‘예스 마담의 오뚝이 인생’을 설파했다. 같은 영화로 남우조연상을 받은 키 호이 콴은 ‘인디아나 존스’의 아역 이후 스턴트맨이나 영화 스태프로서 보낸 시간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저는 오랫동안 난민캠프에서 지냈고 보트를 타고 긴 여정을 거쳐 이렇게 큰 무대에 오게 되었습니다.” 10대에 ‘인디아나 존스’로 인연을 맺은 해리슨 포드(작품상 시상자)를 50대에 다시 만났으니 그 감격이 오죽했을까. 영화 ‘더 웨일’로 남우주연상을 받은 브렌던 프레이저 역시 ‘미이라’ 이후 남다른 고통의 시간을 겪었다. “고래만이 깊은 심연에서 헤엄칠 수 있지요. 제게는 동료 배우의 재능이 그런 바다와도 같았습니다.” 그가 시인이 된 순간 무대와 객석은 눈물로 바다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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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 주제가상(인도영화 ‘RRR-라이즈 로어 리볼트’의 주제가 ‘나뚜 나뚜’)은 오프닝에서 사회자를 견제하는 역할을 맡았던 그 팀이 가져갔다. “저는 카펜터스의 음악을 들으면서 자랐는데 지금은 오스카상을 들고 서 있네요.” 그러면서 노래 한 소절을 개사해서 불렀다. ‘내겐 오직 한 가지 소망이 있어요’(There is only one wish on my mind) 이 노래의 제목은 ‘탑 오브 더 월드’(1972)다. 반세기 전 노래가 세계의 별들이 모인 자리에서 부활하는 장면이었다. 영광의 자리를 허락한 사람의 정체는 노랫말 속에 숨어있다. ‘내가 바라던 세상이 특별히 나를 위해 펼쳐지고 있네요(Everything I want the world to be is now coming true especially for me) 이유는 분명합니다. 바로 당신이 있기 때문이죠(And the reason is clear. It’s because you are here)’.

카펜터스는 ‘탑 오브 더 월드’ 이듬해(1973)에 ‘디 엔드 오브 더 월드’(원곡 스키터 데이비스)도 녹음했다. 인생의 시상식이 끝나면 적막이 찾아온다. 끝내주던(Top) 사람이 어느 순간에 끝나버리는(End) 이유 역시 노래 속에 나와 있다. ‘사랑을 잃어버릴 때 세상은 끝나버리죠’(It ended when I lost your love) 사랑이 충고한다. “있을 때 잘하세요.”

작가·프로듀서 노래채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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