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종의 시론]탁상공론 정책과 ‘세종시 관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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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입력 2023-03-20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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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종 논설위원

급제동 걸린 노동시간 유연화
尹 대통령 뒤늦게 문제점 파악
제대로 여론 수렴 없이 입안돼

반도체법과 초등 5세 입학 혼선
홍보 실패는 결국엔 정책 실패
관료·전문가 덫에서 벗어나야


요즘 대통령실발 기사 중에 윤석열 대통령이 ‘격노했다’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대표적인 것이 고용노동부가 지난 6일 입법 예고한 근로시간 개편 방안이다. 문재인 정부가 입법한 주 52시간제가 노동시장에 심각한 부작용을 가져왔기 때문에 윤 대통령이 대선 공약으로 내세운 노동시간 유연화의 구체적 방안이었다. 바쁠 때는 일주일에 69시간까지 일할 수 있게 하고, 쉴 때는 장기 휴가를 갈 수 있게 하는 내용인데 ‘69시간제’로 프레임이 만들어지면서 비판이 거세지자 윤 대통령이 브레이크를 건 것이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이 참모들에게 ‘정책 홍보 실패도 정책 실패’라는 취지의 강한 질타가 있었다”고 전했다.

반도체 육성을 위한 ‘K-칩스법’도 마찬가지다. 6%였던 대기업 반도체 시설투자 공제율을 20%로 올리려던 여당, 10%를 주장하던 야당이 맞서던 중 어이없게도 세수 감소를 우려한 기획재정부의 8% 안이 받아들여져 지난해 말 국회에서 통과됐다. 시설·연구 개발 투자의 25%까지 세금을 깎아주는 미국, 대만에 비해 지원 수준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비판이 빗발쳤고 결국 윤 대통령이 재검토를 지시, 여야가 다시 합의해 본회의 통과를 앞두고 있다. 국회 통과 법안이 대통령 지시로 몇 달 만에 재개정되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두 사례에서 보듯이 정책을 입안하는 정부 부처가 윤 대통령의 국정 방향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 의문이다. 윤 대통령은 지난 대선 과정에서 노동시장 정책의 핵심으로 MZ 근로자, 노조 미가입 근로자 그리고 중소기업 근로자 등 노동 약자의 권익 보호에 방점을 뒀다. 대기업 노조를 기반으로 하는 민노총과 한국노총의 기득권을 약화하는 대신 임금노동자 2058만여 명 중 노조가 없는 다수 노동자(86%)를 중심에 두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용부가 이런 안을 낼 때 MZ세대나 비노조 노동자의 현실과 의견을 충분히 들어야 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런데 한국노총 출신의 이정식 고용부 장관은 한 달 휴가 운운하면서 “요즘 MZ세대는 기성세대와 달리 ‘부회장 나와라, 회장 나와라, 성과급이 무슨 근거로 이렇게 됐냐’ (말할 정도로) 권리의식이 굉장히 뛰어나다”고 했다. 이 말이 나오자마자 각종 인터넷 게시판에는 대기업은 몰라도 중소기업 등에서 아무리 자기주장이 강한 MZ세대라도 한 달 휴가 갈 수 있는 강심장 직원이 어디에 있냐는 비난 글이 쇄도했다. 윤 대통령 질타가 있고 나서야 이 장관은 MZ세대와 대화에 나서겠다고 했다. 전형적인 무사안일의 관료주의 단면이다.

탁상공론에 능한 교수들이 정책의 초안을 만들면 관료들은 정권의 입맛에 맞게 포장하고, 전문성이 떨어지는 대통령실 참모들은 꼼꼼히 살펴보지도 않은 채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5세 초등학교 입학’ 정책을 발표했다가 낙마한 박순애 전 교육부 장관의 사태와 똑같이 닮았다. 당시에도 맘 카페를 중심으로 맞벌이 엄마들의 반발이 엄청났는데도 교육부와 대통령실 참모들은 알지 못했다.

“그는 이 자리에 앉으면 ‘이거 해! 저거 해!’라고 말하겠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불쌍한 아이젠하워는 여기는 군대와 다르다는 걸 알게 될 것이야.” 해리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이 당선이 유력했던 군인 출신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에게 한 말이다. 관료주의가 대통령 권력을 무력화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윤 대통령은 정치에 입문하면서 정치인보다는 전문가·관료를 선호했다. 특히, 함께 일을 해본 검사 출신에 대한 선호도가 높다. 이들이 정책을 잘 만들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 국민을 설득할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지난 13일 국민의힘 신임 지도부와 만찬 자리에서 윤 대통령은 반도체법에 반대하던 민주당이 입장을 바꾼 것을 예로 들며 “아무리 다수 의석을 가지고 있어도 국민 여론이 돌아서면 그들도 양보할 수밖에 없다”고 당의 대국민 여론 설득 강화를 주문했다. 요즘 웬만한 기업은 최고커뮤니케이션책임자(CCO)를 따로 두고 있다. 아무리 물건이나 정책을 잘 만들어도 홍보에 실패하면 말짱 도루묵이 되기 때문이다. 세종시에 갇힌 공무원의 관료주의를 극복하지 않으면 정책·홍보 실패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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