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 없이 걷는 산책… 그때 떠오르는 생각은 ‘억압에 짓눌리지 않은 보석’[서동욱의 세계의 산책자]

  • 문화일보
  • 입력 2023-04-21 09:07
  • 업데이트 2023-08-07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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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카페 - 서동욱의 세계의 산책자 - (38) 산책

걷기는 유쾌한 명상·두서없는 생각 만들어 내… 니체 “사상은 산책에서 오는 것이지, 책에 몰두해 얻는 게 아니다”
늘 똑같은 길로 가지만 늘 새로운 하루… 승부 걱정도, 꼭 가야 할 의무감도 없이 ‘자유로운 생각의 폭죽’ 만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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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를 좋아한다. 걷는다는 것은 비효율적으로 느린 이동방식 같지만, 실은 시간을 버는 일이다. 걷는 중에 생각할 수 있고, 나중에 사람들과 해야 할 말을 가다듬을 수도 있으며, 행운과도 같은 햇살을 만날 수도, 잎사귀에 부딪히는 빗소리도 들을 수 있다. 잘 아는 길도 최초의 길인 듯 관광객처럼 이것저것 구경할 수 있다. 차를 타면 이 모든 것이 일시에 사라진다. 일찍 도착해서 빨리 일해야 하고, 누군가와 빨리 복잡한 대화를 나눠야 할 뿐이다. 촉박한 일정으로부터 해방된 이런 걷기의 정수는 ‘산책’이 간직하고 있다.

무엇보다 산책을 다른 걷기와 헷갈려서는 안 된다. 산책은 이동이라는 실용적 목적을 지니지 않는다. 놀라운 도보 이동자들이 있다. 가정 교사 자리를 얻기 위해 시인 횔덜린은 독일 슈투트가르트부터 프랑스 보르도까지 걸어서 갔다. 열여덟 살의 푸치니는 베르디의 ‘아이다’를 보기 위해 17시간을 걸어 극장까지 가기도 했다. 이들의 걷기는 놀랍지만 이것은 걷기 자체에 목적을 두기보다는 자신의 운송에 목적을 두는 실용적인 행위이다. 산책은 이런 실용적인 운송과는 다르다. 또 산책은 김삿갓의 방랑 같은 것도 아니다. 비탄에 빠져 죽을 때까지 떠돌아다닌 오이디푸스의 유랑과도 다르다. 산책자는 정처 없이 방랑하지 않으며, 길을 잃는 법이 없고, 명확한 괘도 위에서 움직인다. 산책은 늘 집으로 되돌아오기 위한 산책이며, 그런 점에서 정주민의 지혜로운 거주 방식이다.

산책하는 자는 운동하는 자도 아니다. 군인다운 체력단련이 목적이건 아름다운 체형이 목적이건, 고대 그리스의 김나시온부터 현대의 피트니스 클럽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운동을 해왔다. 그러나 운동경기에서 이기는 것이라는 관념 자체가 산책에는 없다. 러닝머신 위에서 좀 더 빨리 오래 걷겠다는 집념이 산책에는 없다. 한마디로 산책은 신체의 능력과 에너지를 극한으로 발휘하려는 노력이 없는 행위다. 산책자는 목적을 달성하려고 안달하는 자가 아니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처럼 걷기를 천천히 수행하는 태평한 자다. 건강조차 산책의 목적이 아닐 것이다! 레비나스가 ‘시간과 타자’에서 말하듯 “산책하는 것은 바람을 쐬기 위한 것이고, 건강 때문이 아니라 공기 때문이다.”(강영안 역) 의무나 달성해야 할 목적이 아닌, 야외에서 누리는 공기의 즐거움이 산책을 이끈다.

모르는 사이 자라난 화초처럼, 산책하는 동안 생겨나는 것은 뭘까? 바로 ‘생각’이다. 산책과 생각의 긴밀한 관계에 대해선 이미 고대인들이 잘 알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리케이온이라는 학당을 세우고 철학을 가르쳤다. 이 학당에는 산책로가 있었는데, 그는 제자들과 ‘산책(페리파테인, peripatein)’을 하면서 토론하고 연구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학파를 가리켜 소요학파(페리파토스 학파)라고 부른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가정 교사이기도 했는데, 알렉산드로스와도 산책하면서 여러 문제에 대해 토론했다고 한다. 이 흥미로운 이야기들은 철학자들에 관한 최초의 전기인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이 전한다. 산책길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사상의 열매를 수확하는 비옥한 대지와도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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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인뿐 아니라 현대인도 산책을 통해 생각의 열매를 수확한다. 루소는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문경자 역)에서 말한다. “매일 산책하며 보낸 여가 시간은 종종 유쾌한 명상으로 채워지곤 했는데, 그 기억을 잃어버려 몹시 안타깝다. 이제 앞으로 떠오르는 명상들을 기록해두려 한다.…… 산책을 하면서 머리를 스쳐 간 온갖 낯선 생각 또한 이 종이들 속에서 제자리를 찾을 것이다. 나는 생각한 것들을 머리에 떠오른 상태 그대로, 전날 떠오른 생각이 다음 날의 생각과는 대개 별 상관이 없듯 그렇게 두서없이 말하려 한다. 그러나 내 정신이 지금 내가 처한 이 이상한 상태로부터 매일 자양분을 얻어 만들어낸 감정과 생각을 통해, 나의 천성과 기질에 대한 인식이 늘 새롭게 생겨날 것이다.” 산책은 유쾌한 명상, 두서없는 생각들을 만들어낸다. 머리에 떠오른 상태 그대로의 생각이 산책길에는 있다. 이 모든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바로 산책은 책상 앞에 앉아 계획을 가지고서 하는 공부와는 전혀 다른 생각의 장(場)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유의 체험을 버지니아 울프의 산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녀는 산책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걸을 때는 이런 수만 가지 흥분이 지속되지만, 내일이면 오래되고 죽어버린 구절을 쓰기 위해 앉아 있어야 하죠.……나는 걸으면서 계획을 세우겠어요.”(케리 앤드류스, ‘자기만의 산책’(박산호 역)에서 인용) 울프는 산책길에서의 생각과 책상 앞에서의 생각을 구별하고 있다. 산책길에서 생각은 불어오는 바람처럼 자연스럽게 머리를 채우고, 길옆에 핀 꽃처럼 자연스럽게 마음을 기쁘게 한다. 그러나 책상 앞에 앉아 이 생각들을 정리할 때는 까다로운 글쓰기의 규범이 끼어들며 산책길이 주었던 축복 같은 생각의 자유는 사라지고 만다.

산책길의 생각과 책상 앞에서의 생각 사이의 이런 근본적인 차이 또는 불화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이는 니체다. 니체는 걸으면서 사유하는 자였는데, ‘즐거운 학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책 사이에서만, 책을 읽어야만 비로소 사상으로 나아가는 그런 인간들이 아니다. 야외에서, 특히 길 자체가 사색을 열어주는 고독한 산이나 바닷가에서 생각하고, 걷고, 뛰어오르고, 산을 오르고, 춤추는 것이 우리의 습관이다.”(안성찬 외 역) 니체는 사상이란 산책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지, 책상 앞에 앉아 책에 몰두하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책상과 의자와 서재가 없던 문명의 저 이른 시기부터 인간은 사유해왔다. 그때의 생각이란 걷는 일과 분리된 것이 아니다.

인간이 서재로 들어가 의자에 앉게 되면서, 걷는 일 속에서 생각을 자유롭게 창조하던 시절은 종말을 고했다. 산책의 자유 반대편에 서재, 즉 전문가가 답답한 규칙들에 따라 생기 없는 지식을 산출하는 장소가 자리 잡는다. 걷는 이의 자유를 의자에 종일 앉아 있는 이의 접힌 뱃살이 대신한다. “오, 한 인간이 어떻게 그 사상에 도달했는가를, 그가 잉크병을 앞에 두고 뱃살을 접은 채, 종이 위로 머리를 구부리고 앉아서 그 사상에 도달했는지의 여부를 우리는 얼마나 빨리 알아채는가! 오, 우리는 또한 얼마나 빨리 이런 책을 읽어치우는가! 내기를 해도 좋다. 눌린 창자가 스스로를 폭로하며, 또한 서재의 공기와 천장, 좁은 서재가 스스로를 폭로한다.―이것이 성실하고 박식한 책을 덮으며 내가 받은 느낌이었다.……박식한 학자의 책에서는 또한 거의 언제나 억누르고 또 억눌린 어떤 것이 느껴진다: 어디에선가 ‘전문가’의 티를 내는 것이다.”

충분히 걷지 못하고, 앉아 있기를 자신에게 강요할 수밖에 없는 학자 또는 사무원은 이제 직업병으로서 곱사등을 가지게 된다. “모든 전문가는 곱사등을 가지고 있다. 학자의 책은 또한 언제나 굽은 영혼을 반영한다. 모든 전문수공업은 구부리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의 친구를 그가 학문의 소유자가 된 후에 다시 만나보라. 아, 얼마나 반대가 되어버렸는가!……자신의 구석 자리에 틀어박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일그러지고 부자유스럽고 균형을 잃고 쇠약해지고 모든 점에서 모가 나고……, 사람들은 그를 다시 만나면 마음에 충격을 받고 할 말을 잃는다.” 여기서 ‘일그러지고 부자유스럽고 균형을 잃고 쇠약해지고 모가 난 것’은 단지 서재에 갇힌 자의 성격과 신체만을 가리키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생기 없는 규칙에 억눌린 학자의 지식, 그리고 사무원의 업무 자체의 모습일 것이다.

반대로 산책은 지구 위를 걸어 다니는 생명의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 자체이며, 산책 중 얻게 되는 착상 역시 어디선가 날아온 씨앗이 자연스럽게 꽃으로 피어나듯 생겨나는, 어떤 억압적인 규칙에도 짓눌리지 않는 보석이다.

우리가 산책에 대해 살펴본 바들을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는 이가 있는데, 바로 로베르트 발저의 단편 ‘산책’의 주인공이다. “산책은…… 나에게 무조건 필요한 것입니다. 나를 살게 하고, 나에게 살아 있는 세계와의 연결을 유지시켜주는 수단이니까요.……산책을 못 하면 나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고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내 일도 무너져버릴 겁니다.……산책을 못 하면 관찰을 하지 못하고 연구도 할 수 없게 됩니다.……산책을 하다 보면 수천 가지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는데, 그것이 내게는 얼마나 아름답고 유용하고 쓸모 있는 일인지 모릅니다.”(배수아 역) 맞다. 산책은 자유로운 생각의 폭죽을 만들어낸다. “원래 산책을 할 때는 여러 가지의 번쩍이는 발상이 번개처럼 동시에 떠올라 한꺼번에 마구 밀려오는 것이 보통이니까.”

산책이 한 인간의 삶을 만들어낼 수도 있을까? 그럴 것이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사실 두 개의 서로 다른 산책로에 관한 이야기다. 부르주아 계급을 나타내는 메제글리즈 쪽 산책길과 귀족 계급을 나타내는 게르망트 쪽 산책길. 한 번의 오후에 다 가 볼 수 없는 이 두 산책길은 소설의 주인공 마르셀의 평생 탐구 대상이며 사색 거리다. 산책에는 삶의 중요한 진실이 있다. 산책에는 단조로움과 새로움이 결합하여 있다. 달리 말하면 반복과 반복을 통해 얻는 새로움이 결합하여 있다. 늘 똑같은 길로 들어서지만 그것은 늘 새로운 하루다. 이것이 일상의 구조 자체라는 것, 반복이 새로움의 조건이라는 것은 산책의 귀중한 동반자인 우리 집 강아지가 나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다. 매번의 산책이 세상에서의 첫날인 것처럼 너무 신나서 걸어간다. 산책이 그렇듯 반복이 새로움이 아니라면, 일상은 그저 형벌일 것이다.

서강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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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어설명 - 산책과 책

루소의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은 루소 말년의 미완성 작품으로 열 번의 산책을 기록하는 형식으로 루소 자신에 대한 탐구를 진행하는 책이다. 산책의 자유와도 같은 사유의 자유 속에서 물 흐르듯 자신에 대한 회상과 탐색이 진행된다. 니체 사상의 주요한 면모들을 담고 있는 ‘즐거운 학문’은 그의 다른 저작도 그렇듯 걷기, 춤 등 신체적 활동 속에서 자유를 얻는 사유의 가치를 포착하려고 한다.

산책과 관련된 책들은 부지기수로 많지만, 산책하는 공간의 적막한 여유로움, 풍성함, 다양함을 문자 그대로 읽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통해 보여주려고 한 독특한 작품으로 다니구치 지로의 만화들이 있다. ‘산책’ ‘우연한 산보’ ‘에도 산책’ 등. 지로의 산책 만화에서 동네 길 같은 공간은 더 이상 바쁘게 사용되고 소모되는 실용적인 시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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