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여담]‘멍 때리기’와 피로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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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입력 2023-05-23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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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 논설위원

우리는 시간을 아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시간은 인간이 쓸 수 있는 가장 값지고 되돌릴 수 없는 자원”이라는 말에 공감한다. 나태하게 시간을 보내면 죄의식을 느낀다. “아무 하는 일 없이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 항상 뭔가를 한다면 놀라울 만큼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다.” 토머스 제퍼슨의 잔소리를 뒷받침하는 분석도 있다. 하루 15분을 활용하면 1년에 책 한 권을 쓸 수 있고, 3년이면 악기 연주나 외국어에서 중급의 실력을 쌓을 수 있다고 한다.

틈새 시간에도 무언가를 하도록 강요하는 사회에서 ‘아무것도 안 하기’ 경쟁을 하는 대회가 지난 21일 한강 잠수교 인근에서 열렸다. 올해로 6회를 맞은 ‘멍 때리기 대회’에는 3160개 팀이 지원해 70개 팀이 본선에 진출했다. 대회 규칙은 간단하다. 90분 동안 말도, 행동도 하지 않은 채 ‘멍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휴대전화를 확인하거나 졸거나, 웃거나 잡담을 하면 바로 탈락한다. 우승자는 관전자 투표(예술점수)와 15분마다 이뤄지는 심박체크(기술점수)를 합산해 선정된다. 1등에게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모양 황금색 트로피와 상장, 배지 등을 주는데 올해는 배우 정성인 씨가 차지했다.

2014년 처음 대회를 개최한 시각예술가 ‘웁쓰양’은 “벌어놓은 돈으로 근사한 옷을 사는 사치를 누리듯, 시간의 사치도 부릴 수 있어야 한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낭비라는 통념에 도전한다는 것이다. 이런 대회가, 불철주야 근검절약을 통해 최빈국을 세계 10위권 강국으로 끌어올린 기적의 현장 한강에서 열린 것은 상징적이다.

독일 베를린대 한병철 교수는 20세기 후반을 ‘피로사회’로 규정했다. ‘해서는 안 된다’는 금지사회에서 ‘할 수 있다’는 성과사회로 패러다임이 전환되면서 능력과 성과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기 위해 스스로를 착취한다는 것이다. 한 교수는 대안으로 영감을 주는 무위(無爲)와 심심함, 휴식의 가치를 역설했다. 이를 통해 유아론적 세계에서 벗어나면 타자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물론 새로운 영감을 얻게 된다. 양극화된 사회의 통합, 패스트 팔로어에서 퍼스트 무버로 도약하기 위한 창의성의 고양 등이 절실한 상황에서 이번 대회를 다시 주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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