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진용 기자의 엔터 톡]존중받고 싶다면 존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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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입력 2023-05-26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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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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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였던 때가 있습니다. ‘레옹’으로 유명한 뤼크 베송 감독의 1998년 연출작인 ‘택시’에는 한국인 택시운전사들이 차량 트렁크에서 잠을 자고 교대로 일하며 “나라가 어려워 24시간 일한다”는 대사가 삽입됐죠. 이보다 앞선 1994년작 ‘폴링 다운’에는 주인공이 한국인 상인에게 “미국은 한국을 도왔는데 너희는 돈만 안다”며 구타하는 장면이 포함됐고, 2015년 국내 개봉된 영화 ‘버드맨’에서는 여주인공이 “망할(fuxxing) 김치처럼 역한 냄새가 난다”고 말했습니다. ‘버드맨’은 이듬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포함해 4관왕에 올랐는데요. 이런 작품을 만드는 제작진이 한국과 한국 문화에 대해 갖고 있는 인식 수준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다는 것에 부아가 치밀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불과 10년도 되지 않는 사이, 세상은 크게 바뀌었습니다. 한국 관객이 할리우드 영화에 몰두했듯 글로벌 시청자들이 넷플릭스, 디즈니+ 등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플랫폼을 통해 K-콘텐츠를 실시간으로 즐기게 됐죠. 그러면서 K-콘텐츠를 만드는 한국 크리에이터들의 책임감 또한 커졌는데요. 과거의 그들처럼, 이제는 우리가 타 국가나 문화권을 다루면서 철저한 고증과 자기 검열을 해야 되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최근 방송된 케이블채널 ENA 드라마 ‘보라! 데보라’에서는 외모 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독일 나치 정권의 상징과도 같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언급했는데요. 주인공 연보라(유인나 분)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는 자기 배설물 위에 누워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누군가는 한 컵의 물을 받아 반만 마시고 나머지 반으로는 세수했다. 그리고 살아남았다. 외모를 가꾸고 치장하는 것은 생존의 문제라는 것”이라고 말해 질타를 받았죠. 지난해 방송된 tvN 드라마 ‘작은 아씨들’은 베트남전 참전 군인을 유공자로 묘사하며 “한국군 1인당 베트콩 스무 명을 죽였다”고 말한 장면이 베트남 시청자들의 역린을 건드렸고, 결국 베트남 송출이 중단됐는데요. 이 외에도 넷플릭스 ‘수리남’이 실제 국가명을 제목으로 쓰며 이 지역을 마약국으로 묘사해 강한 항의를 받기도 했죠.

만약 외국 드라마에서 비슷한 상황을 연출하며 일제강점기 고문실을 비유의 대상으로 삼았다면,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공로를 치하했다면, 한국을 성매매의 온상으로 묘사했다면 한국 시청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타 문화권에 대한 몰이해를 ‘표현의 자유’로 치부할 순 없죠. 콘텐츠 시장의 소비자에서 공급자가 된 K-콘텐츠의 크리에이터들이 깊이 고민해야 할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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