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망울 터뜨리면 어머니 저녁밥 짓던 ‘오후4시꽃’ 분꽃[정충신의 꽃·나무 카페]

  • 문화일보
  • 입력 2023-10-08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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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비에 젖은 분꽃. 붉은색이 가장 흔한 분꽃의 깔대기 모양의 꽃잎은 실제는 꽃받침이며 5갈래로 갈라진다. 9월26일 서울 마포구 한강변 촬영


분(粉)꽃 씨앗 속 뽀얀 흰가루 가루분 향기 닮아
‘오후 네시꽃(Four-O’clock)’…오후 4∼5시경 꽃망울
남미 페루가 원산지 17세기 우리나라 들어와
멘델의 유전법칙 무시 중간유전자를 가진 꽃
여자화, 분화, 자미리, 초미리, 자화분(紫花粉)

<엄마는 해마다/분꽃씨를 받아서/얇은 종이에 꼭꼭 싸매 두시고/더러는 흰 봉투에 몇 알씩 넣어/멀리 있는 언니들에게/선물로 보내셨다//어느날/학교에서 돌아온 나에게 엄마는/분꽃씨를 뿌렸단다/머지않아 싹이 트고 꽃이 피겠지?/하시며 분꽃처럼 환히 웃으셨다//많은 꽃이 피던 날/나는 오래오래 생각했다//고 까만 꽃씨 속에서/어쩌면 그렇게 푸른 잎이 돋았는지?/어쩌면 그렇게 빨간 꽃 노란 꽃이/태어날 수 있었는지?//고 딱딱한 작은 씨알 속에서/어쩌면 그렇게 부드러운 꽃잎들이/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는지?//나는 오래오래/분꽃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이해인 수녀가 1992년 펴낸 동시집 ‘엄마와 분꽃’이다. 곱고 수더분한 새색씨 닮은 분꽃을 보면 어머니의 향기와 유년의 추억이 떠오른다.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분꽃의 수술은 5개이고 밖으로 나온다. 암술대는 밖으로 길게 나온다. 열매는 난형이고 겉에 주름이 있으며 검게 익는다. 7월27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촬영



왜 분(粉)꽃일까. 이해인 수녀의 동시 속 ‘고 까만 꽃씨’에 답이 있다. 지금은 기초화장품 재료로 ‘페이스 파우더(가루분)’로 메이크업을 하지만, 가난한 어린 시절 분꽃이 이를 대신했다. 엄마 따라 언니 따라 뽀얀 분가루를 얼굴에 바르면 자아도취에 빠져들던 시절!

뽀얀 분꽃 가루 향기가 코끝에서 맴돌던 시절. 지금의 중장년에겐 ‘아, 그 옛날이여’의 아련한 추억이 돼버렸지만 분꽃을 보면 새색시의 뽀사시하고 수더분한 얼굴을 떠올리던 시절이 있었다.

분꽃의 알록달록한 꽃이 지고 나면 동글동글한 열매가 맺힌다. 열매는 난형이고 겉에 주름이 있으며 검게 익는다.이 열매가 익으면서 까맣고 오돌토돌한 까만 씨앗이 된다. 이 씨앗의 껍데기 안에서 분처럼 뽀얀 흰 가루가 나온다. 냄새도 얼굴에 바르던 가루분 향기와 비슷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한여름/해질녘이면/어머니의/목소리가 들렸다/"선순아, 분꽃 피는구나/저녁밥 지어야겠다"//쌀 씻어 밥 안치는 소리가 들렸다//분꽃에선/어머니의 코티분 냄새가 난다/달착지근히 밥 익는 냄새가 난다>

김용옥 시인의 ‘분꽃’이다.



분꽃은 해질 무렵부터 꽃이 피었다가 다음날 아침에 시든다. 그래서 영어 이름이 ‘오후 네시꽃(Four-O’clock)’이다. 흐리든 맑든 날싸와 상관없이 오후 4∼5시경이면 어김없이 꽃망울을 터뜨린다. ‘오후4시 알람 시계꽃’인

셈이다. 시계가 흔치 않은 시절, 분꽃이 피기 시작하면 어머니들은 저녁을 준비했다고 한다. 김용옥 시인의 ‘분꽃’에서 보듯, 우리 어머니들은 분꽃이 꽃망울 터뜨리기 시작하는 것을 신호로 저녁밥을 준비했다고 한다. 분꽃은 그 옛날 ‘코티분’과 더불어 ‘저녁밥’ 등 여러 모로 우리 어머니들을 떠올리게 하는 정겨운 꽃이다.

우리나라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분꽃과 식물로서 유사종이 없으므로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자가교배 및 타가교배를 통해 분홍색, 보라색, 자주색, 크림색 등 다양한 꽃 색과 무늬가 나타난다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흰색 바탕에 빨간 점이 있는 분꽃. 분꽃은 한 뿌리에서 올라온 줄기에 여러가지 색상의 꽃이 피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한 꽃에서도 두가지 색이 반쪽씩 나뉘어 피는 경우도 있다. 7월27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촬영



<해질 무렵/장독대 옆 화단에/분꽃이 피면/이남박 들고 우물로 가던/그 여인이 보입니다.//육십년 전에

싸움터로 끌려가서 돌아오지 않은/정든 님을 기다리다가/파삭하게 늙어버린 우리 형수님/세월이 하 무정하여/눈물납니다.>



민영 시인의 ‘분꽃’에는 무정한 세월, 여인의 한이 서려 있다. 장독대 옆 분꽃이 필 시기면, 밥 지으러 쌀을 이는 바가지 ‘이남박’을 들고 우물로 가는 여인, 전쟁터로 가 돌아오지 않는 신랑 기다리며, 신랑이 살아 돌아오길 기다리며 따뜻한 밥 한 그릇 올리는 그 마음으로 살아가는 형수를 떠올리게 하는 한 맺힌 꽃이다.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분꽃은 깔대기 모양의 꽃잎이 사실은 꽃받침이다. 오후 4∼5시가 돼야 꽃망울이 벌어진다. 9월26일 서울 마포구 한강변 촬영



분꽃은 쌍떡잎식물로 석죽목 분꽃과의 한해살이 또는 여러해살이 초본이다. 원산지는 남미 페루다. 원산지에서는 여러해살이 초본이다. 아열대에서는 여러해살이풀이지만, 온대지방에서는 얼어 죽는다. 또한 뿌리가 크게 발달하는데, 온대지방에서도 뿌리를 캐내어 보관했다가 심는 식으로 여러 해 기를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17세기경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며, 관상용으로 전 세계에 퍼져 있다. 분꽃은 여자화, 분화, 자미리, 초미리, 자화분(紫花粉)이라고도 불린다.

분꽃은 수수한 생김새와는 달리 특이한 비밀이 많은 꽃이다. 분꽃의 꽃을 자세히 보면 깔대기 모양의 통꽃인데, 꽃받침처럼 감싸고 있는 5개의 갈라진 녹색의 포는 ‘꽃싸개잎’이라 한다. 꽃이 지고난 후 씨앗을 감싸고 있다가 씨앗이 자라면 활짝 벌어진다.

우리가 꽃잎으로 알고 있는 깔대기 모양은 꽃받침이 변형된 것이다. 결국 분꽃은 꽃잎이 없는 꽃인 셈이다. 마치 꽃인 양 자주, 노랑, 흰색 등 형형색색의 빛깔로 유혹하는 이 분꽃의 꽃잎이 정작 꽃이 아닌 ‘꽃받침’인 셈이다.

한 뿌리에서 올라온 줄기에 여러가지 색상의 꽃이 피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한 꽃에서도 두가지 색이 반쪽씩 나뉘어 피는 경우도 있다.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붉은색 분꽃. 분꽃은 우성과 열성의 법칙인 멘덜의 유전법칙을 벗어나 중간의 유전자를 갖는 꽃이다. 이를 ‘불완전 우성’이라고 한다. 7월 27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촬영



분꽃은 멘델의 우성과 열성의 법칙에서 벗어난 중간의 유전자를 가진 꽃이다. 우성과 열성이 어우러져 자신만의 독특한 유전의 법칙을 만들어간다. 열성과 우성이 겨뤄 우성이 득세하는 멘델의 유전법칙을 벗어난 것이다. 분꽃은 유전 법칙의 원칙을 무시하고 중간유전을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현상을 ‘불완전 우성’이라고 부른다. 불완전 우성이란 제1세대의 개체가 우성과 열성이 일정하지 않고 중간 형질이 나타나는 현상을 일컫는다.

분꽃은 6∼10월에 핀다. 꽃은 식용색소 원료다. 잎을 염증약으로 쓴다. 분꽃의 꽃말은 겁쟁이, 수줍음. 수줍음이란 꽃말은 한낮의 따가운 태양의 시선을 피해 노을처럼 피는 꽃이란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글·사진=정충신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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