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재세 발상과 샤워실 바보[뉴스와 시각]

  • 문화일보
  • 입력 2023-11-21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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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범 경제부 부장

‘샤워실의 바보’. 1976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미국의 자유주의 경제학자인 밀턴 프리드먼이 정치권력과 정부의 과잉 대응을 경계하기 위해 빗댄 표현이다. 샤워하려고 수도꼭지를 틀었는데 차가운 물이 쏟아지자 반대 방향으로 성급하게 꼭지를 돌린다. 이번에는 뜨거운 물이 쏟아지자 놀라서 급하게 반대로 돌린다. 해당 비유는 정치권력과 정부의 지나친 개입이 오히려 경제를 망치는 역효과를 설명할 때 쓰인다. 세계 경제와 금융 시장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도 ‘샤워실의 바보’라는 악평을 들은 적이 있다. Fed는 코로나19 사태 극복을 위해 2020년 3월을 시작으로 기준금리(상단기준)를 1.75%에서 0.25%까지 과격하게 끌어내린 뒤로 2022년 2월까지 동결하는 조치를 했다. 이 과정에서 강력한 통화완화 정책의 여파로 물가상승률이 중립 수준(2%)을 훌쩍 넘어 5% 안팎까지 올랐지만, 파월은 일시적인 현상이라며 애써 무시했다. 급기야 2022년 1월 7%대에 진입하자 기준금리를 급하게 올리기 시작했다. 물가 상승은 세금이 늘어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극단적인 긴축정책으로의 전환은 은행 도산 등 금융 불안을 부추겼다.

내년 4월 10일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대한민국은 ‘정치의 계절’에 들어섰다. 한 표라도 더 얻기 위한 포퓰리즘 정책 입안 경쟁도 본격화하고 있다. 야권이 강력 추진 중인 ‘횡재세’ 법안도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5년 평균 이자수익의 120%를 초과하는 수익에 최대 40%의 부담금을 물려 서민 금융 지원에 쓰자는 내용이다. 지난해 기준으로 은행이 토해내야 할 부담금은 약 1조9000억 원으로 추산된다. 세계적인 긴축과 장기화한 고금리로 고통을 받아온 차주 입장에서는 속이 후련한 제안일 수 있다.

하지만 은행에 대한 횡재세 부과는 선진국 대부분이 검토하다 철회하고 이탈리아 등 유럽 일부 국가만 도입한 정책이다. 이중과세, 시장경제의 원칙 훼손 등과 같은 논란은 차치하더라도 횡재세는 역으로 은행이 망하면 국민의 세금으로 살리겠다는 발상과 일맥상통한다. 굳이 은행 입장에서는 이윤을 극대화하거나 부실 대출을 줄이기 위해 애쓸 유인이 없어진다. 분풀이 대상을 찾기 위한 총선용 정책은 자칫 외환위기와 같은 금융위기를 부추길 수 있다. 대외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에서 금융 시스템이 차지하는 중요도는 절대적이다. 지난 3분기 기준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100.2%)이 4년째 주요 국가 1위를 달릴 정도로 막대한 가계부채 문제나, 다중채무를 지닌 자영업자가 코로나19 사태 이후 급증해온 불안한 상황에서도 시스템 위기 가능성이 낮은 이유는 무엇보다 은행의 견실한 재무구조가 큰 몫을 했다.

정치권이 민심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것은 바람직한 자세지만, 지나친 시장 개입으로 기둥뿌리조차 갉아먹는 ‘샤워실의 바보’가 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초유의 이자 수익으로 공공의 적으로 떠오른 은행도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시대정신에 부응하는 상생금융을 고민해야 할 때다. 현재의 논란은 은행이 막대한 이자 장사와 성과급 잔치로 자초한 측면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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