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기관 블라인드 채용 재고할 때[포럼]

  • 문화일보
  • 입력 2023-12-08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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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흥석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

국민권익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조사 대상 825개 공공기관 중 절반이 넘는 454개 기관에서 공정 채용 절차를 위반했다고 한다. 공공 부문의 채용 비리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최근 몇 년 사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긴 하지만, 공공기관의 채용 비리는 매년 반복적으로 발생했다. 그리고 지난 9월에는 심지어 국가기관인 선거관리위원회의 지난 7년 경력 채용에서 58명의 부정 합격 의심자가 발생했고, 이와 관련된 선관위 직원 28명이 대검찰청에 고발돼 우리 사회가 온통 떠들썩하기도 했다.

채용 비리는 종종 젊은이들의 취업 기회 불공정 문제로만 치부되곤 한다. 그런데 공공기관 채용 비리가 우리 사회에 지닌 함의는 그보다 훨씬 더 심오하다. 범죄 수준의 채용 비리는 적발과 수사 의뢰 또는 징계 요구로 마무리될 수 있다. 하지만 채용의 공정성 문제는 이러한 소수의 채용 범죄와는 그 수준을 달리하는 것이고, 우리 사회의 기본 질서와도 연관되는 중요한 사안이다.

만일 미국에서 성인들이 회의를 진행하는 와중에 누군가가 ‘이것은 공정치 못하다’고 외치면, 그 회의장은 얼음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질 것이다. 공정성의 문제는 자유, 개인의 존엄성 등과 더불어 그 사회 이면의 매우 중요한 기본 가치이기 때문이다. 미국 사회가 현재 얼마나 공정한지에 대해서는 생각들이 다르겠지만, 그곳에서는 공정성의 문제가 불거지면 최소한 그에 대한 심각한 사회적 토론이 시작된다. 그리고 이러한 토론은 종종 국가 수준 정책 결정의 영역에서도 진행된다. 여성과 소수자를 위한 공정성의 문제가 그랬고, 근래에는 역차별 문제가 그랬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움직이는 타깃일 수도 있는 공정성의 문제에 대해 사회적 인식과 이해가 높아진다. 문명의 발전이다.

경제성장 잠재력이 줄어들고, 개개인의 발전 기회도 정체되는 우리 사회에서 취업과 다른 기회 공정성의 문제는 지난 수년간 부각돼 온 인지 감수성이 필요한 영역에 있다. 즉, 정부가 택하는 각종 정책이 취업·진학·근로 기회 등의 측면에서 무슨 함의를 지니는지를 분석하고 토론하는 장이 우리 사회에 필요한 시기가 된 것이다. 게다가 노후 준비가 덜 된 고령층이 급속히 늘어나는 상황에서 이 문제는 아마도 젊은이들에게만 국한된 사안이 아닐 것이다. 공정성 인지 감수성은 기후변화 인지 감수성이나 성(性) 인지 감수성 못지 않게 중요하다.

공공기관 채용 비리는 대체로 절차 위반의 문제다. 그러나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작금의 채용 절차가 급속히 변화하는 환경에 비춰 과연 얼마나 내용상으로 공정한지를 따져보는 일이다. 예를 들어, 블라인드 채용을 연구기관에 대해서만 더 이상 적용하지 않기로 했는데, 이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이며, 또한 그것으로 충분한지 등의 문제에 대한 사회적 고민을 시작할 필요도 있다. 블라인드 채용에 대해 피채용인들은 과연 어떻게 느끼는지,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제도가 공정성에 대해 지니는 함의에 관해 우리는 과연 얼마나 조사했고, 고민해 봤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채용과 기회 공정성의 문제는 우리 사회에 극히 폭넓게 존재하면서 많은 젊은이의 사기를 짓누른다. 공정성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지 않으면서 민주주의와 문명 발전을 도모하기란 힘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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