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독광부 1진 첫 출국… 123명 젊은이가 몸을 실었다[역사 속의 This week]

  • 문화일보
  • 입력 2023-12-18 09:02
  • 업데이트 2023-12-18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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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1963년 처음 독일로 간 파독 광부들이 탄광 지하 막장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 역사 속의 This week

1960년대 초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 79달러의 최빈국이었다. 실업률은 30%에 달했다. 정부는 경제개발을 위해 우여곡절 끝에 서독으로부터 1억5000만 마르크(당시 3000만 달러)의 차관을 도입하기로 했다. 그러나 가난한 나라에 지급보증을 해주겠다는 은행이 없었다. 독일인들의 기피 직종이던 광부와 간호사를 서독에 파견하고 이들의 임금을 담보로 차관을 얻을 수 있었다.

1963년 12월 21일 김포공항에서 파독 광부 1진이 3년 계약으로 서독으로 출발했다. 가족의 생계비를 벌기 위해, 동생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123명의 젊은이가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들은 500명 모집에 4만6000명이 몰리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선발됐다. 대부분이 광산 노동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었고, 대졸 학력자도 상당수였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그려진 것처럼 낯선 땅에서의 광부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지하 1000m까지 파고 들어간 막장은 37∼38도의 고온에 숨이 막힐 만큼 덥고 답답했다. 장화 속에 고인 땀을 몇 번이고 쏟아내야 고단한 하루가 끝이 났다. 크고 작은 부상은 말할 것도 없고 사고로 동료들을 떠나보내야 했다. 광부들은 갱도로 들어가며 “글뤽 아우프(Gluck Auf)” 인사를 나눴다. ‘살아서 지상에서 다시 만나자’라는 뜻이다.

이듬해인 1964년 서독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함보른 탄광을 찾아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을 만났다. “국가가 부족하고 내가 부족해 여러분이 이 먼 타지까지 나와 고생이 많습니다.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들에게만큼은 잘사는 나라를 물려줍시다. 열심히 합시다. 나도 열심히…”라며 눈물을 쏟았고, 결국 장내는 울음바다가 됐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외로움과 설움을 견디며 이를 악물고 열심히 일해 번 돈은 고향에 있는 가족들에게 고스란히 송금했다. 월급이 650∼950마르크(당시 원화 가치 13만∼19만 원)로 국내 직장인 평균 임금의 8배에 달하는 큰 금액이었다. 파독 광부는 1977년까지 7936명이 파견됐고, 파독 간호사도 1만1057명이 서독으로 떠났다. 1달러가 아쉬웠던 시절, 이들이 고국에 보내온 1억여 달러는 당시 총수출액의 2%에 달해 경제 성장의 종잣돈이 됐다. 이 돈과 함께 서독에서 빌린 차관으로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 등을 건설할 수 있었다.

청년 파독 광부들이 가족과 조국을 위해 독일 땅을 밟은 지 올해 60주년으로 이제 70∼80대 노인들이 됐다. 그들의 헌신과 희생이 대한민국 산업화와 경제발전의 밑거름이 됐음을 후세대는 기억해줘야 할 것이다.

김지은 기자 kimjieun@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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