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의 본성은 ‘자기주장’… 기존 세계 안주하지 않고 새 집 만드는 것[서동욱의 세계의 산책자]

  • 문화일보
  • 입력 2023-12-22 09:01
  • 업데이트 2023-12-22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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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동욱의 세계의 산책자 - (44) 파괴자이자 창조자로서 학문

진리에 대해 냉소한 니체
‘스토아주의’ 비판한 헤겔
기존 지식의 순응에 반감

학문은 중립적이다?
기존 사상의 답습 아니기에
판단 없이 맹목적 기록 안해
좋다 또는 나쁘다 심판 후
파괴하고 새롭게 창조


“내게 가장 좋은 것은 달이 대지를 사랑하듯 사랑하는 것이고, 오로지 눈길로서만 대지의 아름다움을 더듬는 것이리라.”(백승영 역) 이 서정적인 문장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온 것이다. 저 구절이 아름다운가? 그러나 저 문장은 폐기되어야 할 문장이다. 차라투스트라의 적대자(기만하는 정신)가 하는 저 말은 학문적 인식의 ‘객관성’이 감추고 있는 폐해를 보여주고 있다. 객관적 거리라는 핑계를 대며 대지, 즉 현실에 개입하지 못하고 떠도는 달처럼 멀리서 구경만 하는 학문의 폐해 말이다.

우리는 학문의 본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학문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창문이다. 보통 학문은 객관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것으로부터 중립적인 거리를 유지할 때 얻어지는 객관성 말이다. 그러나 이럴 때 도대체 학문의 대상 또는 지식이 눈앞에 나타나기나 할까? 학문의 눈은 CCTV가 아니다. 지나가는 모든 것을 아무런 가치 판단 없이 맹목적으로 기록하지 않는다. 대상은 늘 ‘판정’ 속에서 나타난다. ‘이 과일은 너무 비싸다’ ‘너의 행동은 좋다’ 등등. 대상은 늘 비싸다 또는 비싸지 않다, 좋다 또는 나쁘다 등 심판을 거치고 나서야만 하나의 대상으로서 인지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판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세계 안의 한 ‘위치(소비자의 위치, 사회 계급적 위치 등등)’이지, 세계와 무관하게 떠 있는 달의 자리가 아니다.

따라서 학문은 특정한 위치에서 심판하는 자의 자기주장이며, 이미 있는 가치를 ‘객관적’ 복사기처럼 복제하는 일이 결코 아니다. 이미 있는 가치란 불변의 진리라서가 아니라, 세상을 지배하는 기존의 권력에 해가 없는 것, 용인되는 것이기에 가치 행세를 하며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니체는 ‘반시대적 고찰’에서 이렇게 냉소적으로 말한다. “우리의 교수님들이 자주 입에 올리는 ‘진리’는 별로 까다롭지 않은 존재인 것 같아서, 무질서나 일탈에 빠지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진리’는 편안하고 마음 좋은 것이라서 모든 기존의 권력에 자기 때문에 신경 쓸 필요는 전혀 없다고 항상 다시 다짐한다. 우리는 단지 ‘순수한 학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이진우 역) 여기서 니체는 기존의 권력에 무해하기에 살아남고 존속이 보장된 것을 논문 같은 것의 형태로 잘 정리해 되풀이하는 공부를 표적으로 삼아 이야기하고 있다. 기존의 지식과 가치를 비판하는 힘을 잃고(아니면 비판하는 척하며), 그것들을 정당화해주기에 급급한 공부 말이다.

우리는 학문에 대한 이런 비판의 또 다른 형태를 니체와 사뭇 다른 철학자인 헤겔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헤겔의 비판이 겨냥하는 것은 ‘스토아주의’이다. 기원전 탄생해 로마 시대에 이르기까지 철학의 한 중요 학파를 이루었던 스토아주의는 ‘마음의 평정’을 추구하는 윤리 사상을 펼쳤다. 행복, 노년, 우정, 분노 등등을 다루며, 정서의 노예가 되지 않고 평정한 상태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찾고자 했다. 그런데 정치와 사회가 온통 불타는 지옥과 같을 때, 오로지 내면으로 들어가 마음의 평화만을 얻고자 하는 일은 옳은가? 헤겔의 비판은 이런 의문에서 시작한다. 그는 ‘정신현상학’에서 말한다. “스토아주의로서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참인가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그저 내용 없는 사유로써 답변을 대신할 수밖에 없으니, 이성 속에 참과 선은 담겨 있다고 답하는 것이 고작이다.”(임석진 역) 평정이나 행복을 요동치는 그때그때의 현실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유리된 이성의 개념으로서만 파악한다. 이것은 그야말로 ‘내용 없는 사유’이다. 현실에는 눈 감은 채, 평정과 행복은 중요하다느니, 우정은 소중하다느니 낱말 뜻풀이에 불과한 원론적인 이야기만 떠들어 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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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 삶의 지표가 되어 준다고 생각했던 스승이나 지도자에게 현실의 절실한 문제를 가져가 물을 때도 종종 비슷한 답변과 마주한다. 언젠가 정의는 이긴다는 둥, 성실히 살라는 둥……. 아수라와도 같은 현실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다급히 물었는데, 돌아오는 것은 선계(仙界)의 공허한 개념뿐이다. 처세로 바쁜 자는 현실의 복잡한 문제에 엮이는 것을 피하며, 이미 나도 알고 너도 알고 있는 교과서적인 내용만 자신의 최고의 가르침인 양 답답하게 되풀이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진리의 전문가들에게 실망하곤 하며, 비로소 선생이나 우상 없이 혼자서 눈보라 속으로 들어설 결심을 하게 된다.

한마디로 기존의 질서 속에 자리 잡은 저 전문적인 진리의 세공사들은 현실을 못 본 듯 공허한 개념들의 세계에 머문다. 스토아주의 역시 그랬다. 그래서 헤겔은 스토아주의의 의식을 “일상세계로부터 자기 내면으로 칩거하는 데 그치는 의식”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스토아주의는 현실에 눈감고서 가치와 덕을 찾기에 왕이건 노예건 사회 계급과 상관없이 그 사상 세계의 일원이 된다. “왕좌에 올라서 있거나 사슬에 묶여 있거나 간에, 그 어떤 자질구레한 일상적 조건에도 구속되지 않고 세상사에 휘말려서 음양으로 닥쳐오는 여하한 작용에도 꿈쩍하지 않은 채 단순한 사상의 세계 속에 칩거해 있는 것이 스토아주의이다.” 어떤 왕과 어떤 노예를 말하는가? 스토아 철학자 가운데 왕좌에 올라서 있는 자는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이고, 사슬에 묶여 있는 자는 노예 철학자 에픽테토스이다.

황제건 노예건 공허한 관념의 세계 속에만 몰입해 있으므로 스토아주의, 이 사상은 ‘분명히 한계를 안고 있는 현실과는 유리된 사상’이다. 스토아주의가 현실과 유리되어 있기에 이 평온한 사상은 역설적이게도 로마의 미친 황제들이 공포로 몰아넣은 사회와 잘 공존했다. “이(스토아주의)는 사회 전체에 공포와 예속이 만연해 있으면서도 동시에 일반적인 교양의 폭이 현실적인 도야와 형성을 위한 사유의 함양으로까지 고양되어 있는 그러한 시대에만 출현하는 것이다.” 정말 로마의 제정(帝政) 시대는 미친 황제들이 만들어내는 공포의 나날이었다. 영국 작가 로버트 그레이브스가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를 주인공으로 쓴 소설에서 말하듯 제정은 미친 황제들의 시대였다. “그렇다. 우리 황제들은 모두 미쳤다. 아우구스투스나 티베리우스나 심지어 천성이 사악한 칼리굴라조차도 아주 정상적인 상태에서 출발했으나 제정이 우리의 머리를 망쳐놓았다.”(‘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 오준호 역) 물론 여기 네로 황제가 그 광기의 정점에 추가되어야 한다.

본론으로 돌아가 보자. 학문은 기존의 가치를 답습하는 것일 수 없다. 그것은 이미 생활을 지배하는 것이고 위기에 처한 것도 아니기에 학문이 거들어줄 필요가 없다. 학문은 새로운 가치의 창조자이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쓰고 있다. “모든 것의 가치는 그대들에 의해 새롭게 정립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그대들은 투쟁하는 자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 그대들은 창조하는 자여야 한다!…… 내 작열하는 창조 의지는 나를 언제나 새로이 사람들에게로 몰아간다. 망치를 돌에게로 내몰아대는 것이다…… 이제 내 망치는 형상을 가둔 감옥에 잔인한 분노를 퍼붓는다…… 우리의 진리들로 인해 부서질 만한 것이라면 모조리 부숴버리도록 하자! 지어야 할 집이 아직도 많지 않은가!”

학문은 기존의 집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집을 창조한다. 정말 학문은 ‘파괴자’가 아닌가? 학문은 ‘판단문’으로 이루어진다. 예컨대 ‘이 세계에는 부조리가 가득 차 있다’ 같은 문장 말이다. 이 판단문은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세계를 기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부조리를 행사하는 자가 아니라 겪는 자의 입장에서 이 세계를 비난하는 중이며, 부조리한 세계는 파괴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중이다. 사르트르가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글쓰기에 대해 한 다음과 같은 말은 이 기존 가치와 지식의 파괴자로서 학문에 대해서도 타당하다. “만일 당신이 어떤 사람의 행위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이름 붙인다면, 당신은 그에게 그의 행위를 드러내 보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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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그렇게 된 이상, 그가 어떻게 이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할 수가 있겠는가?”(정명환 역) 학문은, 그리고 글쓰기는 세계와 인간이 그대로 있도록 놓아두지 않는다. 그를 파괴하고 달라지라고 요구한다. 즉 세계와 인간을 새롭게 창조한다.

서강대 철학과 교수

■ 용어설명 - 본문 중 언급된 책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5)는 그의 대표작으로서, 고대 그리스 철학자 파르메니데스 이래 서구철학의 전통적 글쓰기인 ‘시로 지은 철학서’의 범주에 든다. 니체의 저 책은 전통적인 통념, 가치, 종교 등을 그야말로 통렬하게 비판하는 책이다. 헤겔의 ‘정신현상학’(1807)은 독일관념론의 정점에 가닿은 사유를 보여준다. 헤겔 사상에 씌워진 보수적 이미지와 반대로 이 책은, 고대 노예제 시절부터 근대 프랑스혁명과 그 뒤에 이어지는 시대에 이르기까지 세계를 지배하는 ‘정신’이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기존의 것들을 파괴하며 어떻게 역동적으로 전진해나가는지 그 궤적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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