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어선 동생들, 결혼뒤엔 자식들… 구멍가게로 30년 뒷바라지[그립습니다]

  • 문화일보
  • 입력 2024-01-23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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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박사학위 받는 날, 나를 창작의 세계로 이끈 건 어머니의 공이기에 사각모를 씌워드렸다.



■ 그립습니다 - 어머니 박두연(1931∼2007)

내 어머니는 7남매의 맏이였다. 6학년 때 일본인 여자 담임선생이 폐결핵에 걸려 수업을 진행하지 못했다. 반장인 어머니는 선생님의 명령으로 예습을 해와 선생님을 대신해 수업을 진행해야 했다. 그 덕에 전교 1등을 했다. 그 학교의 전교 1등인 학생에게만 응시원서가 주어지는 경성여자사범학교에 20 대 1의 경쟁을 뚫고 합격했다. 입학하고 보니 학생의 70%가 일본인이었다. 그래도 전교에서 2, 3등을 했다니 비상한 수재였다. 체육을 못해 1등을 놓쳤다.

광복이 되었다. 학교가 서울사대부중으로 바뀌었다. 1948년에 제헌의회 선거가 있었다. 상주군청에 근무했고 건준 상주군 노농위원장을 한 외할아버지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근소한 표차로 떨어졌다. 대한농민회와 대한잠사회의 중앙위원을 하면서 권토중래를 노려 1950년 5월 30일에 행해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었다. 등원한 지 한 달이 채 못 되었을 때 6·25전쟁이 일어났다. 외할아버지는 철사 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단장의 미아리고개’(반야월 작사)를 넘어갔다.

피란처에서 돌아온 일곱 남매에게 아버지의 납북 소식은 청천에서 떨어진 날벼락이었다. 어머니는 여섯 동생의 입에 풀칠하는 일에 나서야 했다. 초등학교 교사 월급이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화장품 하나 살 수 없었다. 양재 기술을 배웠지만 까만 치마, 흰 저고리를 1년 내내 입는 궁핍 속에서 여섯 동생을 거둬 먹이는 처녀 가장이 젊은 날의 어머니 모습이었다. 외할머니는 남편이 살아 있다고 믿기에 자식들에게 ‘아버지 진지 드세요’를 외치고 나서 숟갈을 들게 했다.

상주지서 주임인 경찰관 아버지는 순시차 학교를 방문했다가 어머니를 보고 반해 줄기차게 구애작전을 펴 성공한다. 어머니가 그때 결혼하지 않고 동생들 뒷바라지를 계속할 수 있었다면 서울대 공대와 미대에 들어간 두 동생을 졸업시킬 수 있었을 거라고 종종 한탄했다.

경찰전문대 출신인데도 아버지는 앞날이 잘 열리지 않았다. 계속 시골지서 주임으로 전근이 되었고 승진도 제때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때는 경찰이 아주 박봉이었다. 어머니가 김천에 있는 중앙초등학교 앞에 문방구점을 열었다. 일손이 달리는데 아버지가 다시 먼 곳으로 발령이 나자 사표를 냈다. 그때 이후 아버지는 어머니가 하는 가게의 점원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30년 동안 가게를 했다. 명절이면 아침에 차례를 지내고 바로 가게를 열었는데, 아이들이 세뱃돈을 들고 장난감을 사러 오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생일에도 스스로 미역국을 끓여 먹고 가게를 열었다. 장사 일이 성격에 안 맞는다고 신경질을 부리는 남편이 원망스러웠지만 장남이 마침 공부를 잘했다. 오직 거기에 희망을 걸고 살아갔다.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 대구로 유학을 보냈다.

서울대 법학과 2학년 학생이 3, 4학년 때 공부할 책을 다 독파하고는 시험장에 갔다. 여유 있게 합격했다. 2차 시험을 몇 번 칠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것이다. 3학년 때는 따로 공부하지 않은 상태로 시험장에 갔는데 또다시 전 과목 합격이었다. 3학년과 4학년 때 2차 시험을 준비해서 합격했다면 가족의 운명이 바뀌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완전히 절망하였다.

나는 고등학교를 2개월 다닌 시점에 어머니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자식이 집을 나간 것만으로도 마음이 찢어지는 일이었을 텐데 남겨놓고 간 편지봉투에 ‘유서’라고 써놓았으니. 어머니는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검정고시에는 일찍 합격했지만 독학으로 공부하니 대학 진학이 여의치 않았다. 삼수생이 되어 원서를 어디 낼까 고민 중일 때 어머니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네가 처음 가출할 때 써놓고 간 그 편지, 정말 잘 썼더라. 형은 국문학과로 학사편입했으니 학문을 할 게다. 너는 시나 소설을 쓰도록 해라. 신문에 보니까 중앙대 문예창작학과라는 데가 있던데 여기에 원서를 넣는 게 어떻겠니? 네 중학교 때 국어선생님도 그렇게 칭찬하셨고.”

어머니의 예상은 맞았다. 본고사에 국어와 영어와 창작실기가 있고 수학이 없어 합격했고, 신춘문예에 시와 소설이 당선되었다는 소식을 어머니에게 알려드릴 수 있었다. 췌장암으로 돌아가신 것은 2007년 설날 다음 날이었다. 저승에서 이 글을 읽는다면 ‘장하다, 내 아들’ 하고 웃으면서 말씀하시리라.

아들 이승하(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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