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정보보호법 개정과 무모한 도전들[기고]

  • 문화일보
  • 입력 2024-01-26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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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혁 개인정보보호위원회 부위원장

몇 해 전 행정안전부 전자정부국장으로 근무하던 때, 유럽연합(EU) 본부가 있는 벨기에를 방문했다. 데이터 3법 가운데 핵심인 개인정보보호법 개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때였다. 국내 기업들의 해외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개인정보보호법 처리가 시급했고, 이를 위해 유럽연합과 일반개인정보보호규정(GDPR) 협상을 마무리지어야 했다. 그 와중에 벨기에의 남극 탐험을 다룬 ‘지구 끝에 있는 매드하우스’란 책을 접했다. 이 책에는 우리나라 국토 면적의 3분의 1 크기인 벨기에가 유럽연합 본부와 수많은 국제기구를 유치한 강소국으로 우뚝 선 역동성이 담겨 있었다.

1890년대 세계는 과학적 발견 욕구와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극지 탐험에 도전했다. 당시 남극은 아무도 가 본 적이 없는 미지의 대륙으로 남아 있었다. 네덜란드에서 갓 독립한 신생국 벨기에가 쟁쟁한 해양 강대국들과 남극 경쟁에 뛰어든 것은 무모한 도전이었다.

1897년 8월 벨기에 안트베르펜(앤트워프) 항을 출발한 벨지카함은 이듬해 1월 남극 바다에 도착한다. 당시 남극은 이미 여름 끝자락이라 바다가 얼기 전에 탐험을 마치기는 불가능했다. 그런데도 제라세 선장은 탐험을 강행했고, 벨지카함은 곧 꽁꽁 언 남극 바다에 갇히고 만다. 이듬해 여름까지 버텨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이때 탐험대원 의사 쿡은 무모한 제안을 한다. 배 주위 얼음을 작은 톱으로라도 잘라 운하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쿡의 설득으로 선원들은 수개월 간 남극 얼음을 톱으로 잘라냈고, 앞으로 조금씩 나아갈 수 있었다. 또한, 이 노력이 남극의 지각변동과 운하 확대를 촉발해 결국 대원들은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벨지카함 대원들은 최초의 남극대륙 탐험이란 명예를 거머쥐진 못했지만, 영웅으로 존경받게 됐다.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법안을 입법하는 과정은, 과장하면 남극대륙 탐험처럼 힘든 여정이다. 재작년 11월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개인정보보호법을 논의할 때 필자는 빙하에 갇힌 벨지카함 대원 같았다. 두 차례의 상임위 논의에도 의원들의 의견이 갈려 법안 심사가 또다시 밀릴 처지였다. 필자를 포함해 개인정보위 직원들은 회의장 밖 복도에서 낙담하고 있었다. 그때 법안담당 과장이 “뭐라도 한번 해보자”며 직원들을 추스르더니 의원들을 설득할 자료를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 필자도 힘이 났다. 뭐라도 해보자는 심정으로 마침 화장실을 가던 반대파 의원을 쫓아가 한 번만 더 법안을 살펴봐 달라고 호소했다. 결국, 법안은 그날 소위를 통과했고 이듬해 3월 본회의를 통과했다.

그날 필자를 포함한 공무원들이 낙담해 의원 설득을 포기했더라면, 개인정보보호법 개정안은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법 통과 이후에도 인공지능(AI) 프라이버시 분야의 글로벌 주도권 확보와 전 분야 마이데이터 확산 등 과제는 산적해 있다. 특히, 전 분야 마이데이터 추진은 전 세계 최초로 시도되는 미증유의 길이기도 하다. 적극적인 도전이 필요한 이유다.

지난해 2030세계박람회 유치 경쟁에서 부산이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 패하자 “애초에 무모한 도전이었다”는 말도 나온다. 하지만 무모한 도전은 없다. 남극의 두꺼운 얼음을 톱으로 잘라낸 그 시도가 남극의 지각변동을 가져왔듯이, 우리의 도전은 미래의 새로운 지각변동을 가져올 시발점이 될 수 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뭐라도 한번 해 보자”는 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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