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이가 빛나도록 양보한 당신께… ‘편한 숨을 쉬듯이 내곁에 쉬어가요’[주철환의 음악동네]

  • 문화일보
  • 입력 2024-02-05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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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철환의 음악동네 - 임영웅 ‘모래 알갱이’

조규성 선수(1998년생)가 1월의 마지막 날 카타르 알라이얀의 에듀케이션 시티 스타디움을 한순간에 영화관으로 바꿨다. 전날까지도 ‘예능으로 가라’ 야유하던 관중들은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며 수렁에서 한국축구를 건져낸 조규성에게 ‘참 잘했어요’를 연발했다. 끝이 좋으면 모든 게 좋은 법이다.

극장골(last-minute goal)은 종료 직전, 아니 후반 추가시간에 터진다. 이제부턴 경기장이 아니라 진짜 극장에서 일어난 사례다. 라디오에선 주인공을 도맡았어도 영화나 드라마에선 거의 조연, 주로 할머니역을 하던 배우 김영옥(1938년생) 씨가 마침내 영화 ‘소풍’의 주인공이 됐다. 전반전에 주역만 하다가 후반전에 조역을 맡거나 퇴장당하는 이는 많아도 평생 조역만 하다가 나이 들어 주역을 맡는 경우는 드물다. 호각 불기 직전에 찾아오는 극장골처럼 인생의 경기에서도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다.

드라마에서 처음엔 모녀였다가 이따금 자매도 됐다가 이번엔 친구로 나온 나문희(1941년생) 씨와는 MBC 성우 1기(1961) 동기다. 두 사람은 토크쇼에 나와 ‘명 짧은 사람은 도저히 만날 수 없다’며 건강과 우애를 과시했다. 쉼 없이 일하고 원 없이 연기했다는 말이 와 닿는다. 원(怨)이 없다는 건 소원이 없다는 게 아니라 원망이 없다는 뜻이다. 그들은 선망의 대상이 아니었기에 오래도록 이웃으로 남을 수 있었다. 공백기도 거의 없었다. 아역배우는 시기가 지나면 그 역을 맡기 어렵지만 노역 배우는 익을수록 더 잘할 수 있어서다.

오래전에 ‘당당한 이류’라는 제목의 칼럼을 연재한 적이 있다. 시시한 배우는 있어도 시시한 배역은 없다는 취지였는데 그래도 ‘이류’라는 단어는 여전히 마음에 걸린다. 그때 만나 인터뷰한 김영옥 씨는 명랑하고 총명한 분이었다. ‘옛날의 금잔디’(1991)라는 드라마(KBS)에서 치매 노인을 실감 나게 연기했는데 그 후로도 여러 작품에서 비슷한 배역을 탁월하게 수행했다. 그 후 가리지 않고 각종 할머니를 도맡았는데 한때는 욕쟁이 할머니더니 지금은 독보적으로 귀여운 할머니다.

노래채집가는 ‘옛날의 금잔디 동산에’로 시작하는 민요를 지나칠 수가 없다. 번안 제목은 ‘매기의 추억’(When You And I Were Young Maggie)이다. 원곡가사에 ‘내 얼굴은 잘 쓴 페이지’(My face is a well written page)라는 부분이 나오는데 이분이야말로 한줄 한줄 스스로 잘 써내려간 인생극장의 알파걸이다. 일찍 온 전성기는 일찍 간다. 숙성된 발효유는 우유보다 유통기간이 길다. 그걸 알기에 일희일비하지 않았던 거다.

1월 23일에 세상을 떠난 가수 멜라니 사프카는 ‘가장 슬픈 것’(The saddest thing)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작별’(say goodbye to the ones you love)이라고 노래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보다 나를 데리고 가시는 임이 더 애잔하다. 저세상 갈 때 집문서와 경력증명서는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다. 다만 이 세상에서 주인공을 자주 한 사람보다는 조역을 많이 한 사람이 조금 더 천국의 입학사정관에게 호감을 줄 것 같다는 상상을 한다. 그들은 스스로 빛나기보다 다른 사람이 빛나도록 양보하고 조력한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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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병 시인은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제목 ‘귀천’) 다짐했다. 소풍날엔 숙제 검사, 복장 검사를 안 하는 대신 보물찾기를 한다. 김영옥 씨는 이번 ‘소풍’에서 노래의 보물을 찾았다. 노배우의 한결같은 팬심에 임영웅은 노래(‘모래 알갱이’)로 화답했다. ‘그렇게 편한 숨을 쉬듯이 언제든 내 곁에 쉬어 가요 언제든 내 맘에 쉬어 가요’ 넉넉하지 않은가. 사랑은 사랑에 손 내밀고 진심은 진심에 응답한다.

작가 프로듀서·노래 채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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