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여자 아닌 엄마로만… “다음 생애는 제 딸로 태어나세요”[그립습니다]

  • 문화일보
  • 입력 2024-02-29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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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1989년 부모님을 모시고 가족이 경기 용인 자연농원(현 에버랜드)에 놀러 갔을 때 함께 찍은 사진.



■ 그립습니다 - 나의 어머니 권혁희(1935∼2013)

올해 내가 환갑이고 나의 어머니는 11년 전 하늘로 승천하셨다. 지병이 있으셨으나 70대 중반이셨고, 또랑또랑 정신이 맑으셨다. 그런 어머니가 그렇게 갑자기 가실 줄 몰라 이별 따윈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으니 허망함에 슬픔은 배가 되었다.

나는 4남매 중 셋째였고, 오빠가 위로 둘이 있다. 나의 어머니는 오직 아들, 그중에서도 큰아들이 으뜸이었다. 도드라진 편애에 가까운 그 사랑은 나머지 자식들을 아프게 했다.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서운함도 잊히는가 보다. 큰딸의 가시 돋친 말들에 엄마도 아프셨을까? 끝내 엄마와 속내를 털어놓지 못했고, 더 이상 기회는 없게 됐다.

6·25 때 고아가 돼 어린 나이에 군에 들어가 말뚝을 박으셨던 아버지. 군 생활에 어려움을 느낀 아버지는 군에서 나오게 됐고, 퇴직금을 받은 그날 사기를 당해 처와 4명의 어린 자식은 길거리에 나앉게 됐다. 망연자실 아버지는 어찌할 바를 모르셨지만, 그런 위기의 순간에 엄마는 자식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못할 것이 없었다. 무일푼에 오갈 데가 없었던 우리 가족, 4남매를 잠시 낯선 집에 맡기시며 그날 밤 급하게 방을 구하셨고, 그때부터 돌아가시기 전까지 우리 집 가장은 엄마였다.

엄마는 충주 시내에서 만화 가게를 하셨다. 초등학생 오빠들이 만화 가게를 드나들다 쫓겨나기를 여러 번, 맹모삼천지교라고 엄마는 잘되는 가게를 접으시고 서울로 올라와 보따리 장사를 하셨다. 판잣집에서 찐빵을 만들어 팔다 사정이 조금 나아져 시장에서 번듯한 가게를 얻어 채소 장사를 하셨고, 나중에는 중간 도매상까지 하게 되셨다.

그러나 채소 도매상은 새벽 2∼3시면 집을 나가야 했고 자정이 다 되어서야 몸을 누일 수 있었다. 김장철이 되면 엄마는 더욱 바쁘셨다. 며칠씩 집에 들어오지도 못하시고 시골로 배추밭을 사러 다니셨다. 언제 밥을 먹고 언제 잠을 자는지 초인적인 힘을 보여주셨던 엄마 덕분에 우리는 더 이상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되는 안정적인 가정에서 자랄 수 있었다.

남편에 대한 기대가 없었으니 똑똑한 큰아들에게 인생을 거신 듯 모든 투자를 아끼지 않으셨다. 욕심 많은 딸은 온갖 투정과 짜증을 냈고, 그러다가 두들겨 맞고 청소년 시기에 쫓겨나기도 했으니 엄마와 딸은 친할 수가 없었다. 여자는 대학에 갈 필요 없다는 엄마에게 난 늘 쌀쌀맞게 엄마에 대한 서운함을 토로하며 원망했었다.

크리스마스엔 트리를 만들고 가족이 모여 파티를 했다. 추석과 설 전날엔 명절 대목으로 밤 12시까지 장사를 하시지만, 추석엔 송편을, 설엔 만두를 밤새 빚으셨다. 전도 부치고 수수부꾸미 등도 만들어주셨다. 명절을 명절답게 보내며 우리는 ‘화목한 가족’으로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 어린 시절 이런 추억은 살아오면서 큰 힘이 된다. 엄마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몸소 보여주셨던 그 모습을 나도 모르는 사이 따라 하고 있다. 딸은 엄마를 닮는가 보다. 힘들고 쉬고 싶지만, 가족들 입에 맛난 거 들어가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몸이 부서져라 일했던 엄마. 여자로서의 삶이 아닌 엄마로서의 삶만 있었던 나의 어머니.

불효자가 서럽게 운다고 했던가? 그런데 난 아직 서럽게 울지 못했다. 아직 엄마와 화해를 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효도하고 싶지만, 부모님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고 했던가? 엄마가 돌아가실 때까지 내 마음은 뾰족하니 마음속 가시가 많았다. 이제 그 가시를 뽑아 버리고, 엄마와 화해를 하고 싶지만 화해할 엄마는 계시지 않는다. 이제 그만 소리 내어 서럽게 울고 싶다. 가슴 후련하게 털고, 엄마와 딸로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 엄마의 따스한 품이 그립다.

엄마에게 사랑받아보지 못한 우리 엄마, 당신을 닮은 딸이 부담스러워 따뜻하게 품어 주시지 못한 우리 엄마. 다음 생애는 나의 딸로 태어나세요.

딸 석영애 (논술 교습소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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