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뜨기전 써내려간 ‘병상일기’… 홍매화처럼 아픈 향기로 남아[그립습니다]

  • 문화일보
  • 입력 2024-03-06 09:06
  • 업데이트 2024-03-06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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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1988년 2월 아버지(왼쪽)와 내가 대학 졸업식에서 함께 찍은 사진.



■ 그립습니다 - 아버지 박노관(1938∼2003)

수말스러운 미소를 띤 홍매화가 하늘을 향해 서 있다. 꽃이 한창이다. 텅 빈 뜨락에서 혼신의 힘으로 꽃을 피워 올리고 있다. 홍매화는 다른 매화보다 향기가 강하다. 죽음을 맞이한 사람의 육신도 불길 속에서 홍매화처럼 향기로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좋은 향기를 풍기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아버지는 꼬박 일 년을 중환자로 사셨다. 서서히 육신을 하나둘 의료기에 맡기더니 급기야 의식마저 잃고 인공호흡기로 연명하게 됐다. “어서 일어나서 예전처럼 호통도 쳐 보세요.” 마치 나의 말을 듣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버지는 눈물을 또르르 흘리셨다. 의사는 의식이 없는 환자가 눈물을 흘리는 행위에 의미를 두지 말라고 했다. 아버지의 상태는 더 나빠졌고 의사는 사망을 선언했다.

아버지의 몸에 달린 기계들을 떼는 동안, 나는 밖에서 하염없이 울었다. 마치 어미의 몸과 분리하기 위해 아기의 탯줄을 자르듯 아버지는 이승과의 인연을 자르는 중이었다. 칠순 잔치를 삼 년 앞둔 아버지는 가장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제대로 된 여행 한번 못하고 그렇게 떠나셨다. 그때 나는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나의 죽음을 생각했다. 우주의 시간을 일 년으로 축소했을 때 인류는 단 1초, 지구의 시간을 하루로 줄이면 인간의 시간은 겨우 56초라고 한다. 찰나를 살다가 다시 영원으로 돌아가는 나의 삶은 물거품 같은 것이란 말인가.

그 생각도 잠시였고 문상객을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삼일의 시간은 후다닥 지나갔고, 당신이 일찌감치 마련해 둔 자리에 모셨다.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는데 중절모가 있었다. 아버지가 환갑을 맞았을 때 내가 사드린 선물이었다. 여태 상표도 떼지 않은 걸 보니 아끼신 흔적이 뚜렷했다. 나는 그 모자가 아버지인 양 부둥켜안고 울었다.

유품 가운데는 스프링 공책 한 권이 있었다. 평소 글쓰기를 좋아하셨던 아버지에게 내가 사드린 공책이었다. 병증이 진행될수록 아버지는 스스로를 집 안에 가두셨기에 무료함도 달랠 겸 낙서장 삼으라고 건넸던 물건이었다. 첫 장을 열자, 손 글씨가 단아하게 사연을 담고 있었다. 약자 내지는 초서체로 쓴 한자가 절반을 차지하는 문장들이었다.

‘서기 2003년 1월 24일 목요일. 오늘은 나의 생일이다. 아내가 점심으로 떡국을 먹자고 했다. 저녁에는 자녀들과 함께 외식하니 기분 전환이 되었다. 손자들과 함께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내린 눈으로 길바닥이 얼었다. 이 몸은 언제쯤 과거와 같이 가볍게 걸을 수 있을지. 근육이 사라지고 힘이 자꾸 빠지니 참으로 이상하다.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는 아비가 될까 두렵다. 생각하니 괴롭다. 눈 내리는 고향을 떠올리며 창밖을 보니 다분히 우울하다. 그 옛날, 눈 오는 날 저녁이면 무와 배추 뿌리를 먹었는데 돌아보니 행복한 시절이었다.’

그날그날 드신 음식과 복용한 약의 이름까지 사관이 역사를 기록하듯 적고 인상적인 장면은 그림까지 그렸으니, 사마천이 궁형을 당하고도 사기를 기록한 정신과 무엇이 다르랴. 아버지는 그렇게 반년을 기록한 공책을 유품으로 남겨 나에게 돌려주셨다. 뒷장으로 갈수록 아버지의 글씨는 떨고 있었다. 문장도 차츰 사그라들었다.

공책의 뒷장들은 아버지가 나에게 남기신 숙제처럼 텅 비어 있었다. 아버지의 공책은 추억이라는 향기를 풍기며 그렇게 내게 다가왔다. 좋은 향기와 아픈 향기가 엉켜 있었지만, 아버지를 생각하면 짠한 마음이 앞섰다. 평생을 직장과 집을 시계추처럼 오가며 살았으니 퇴직 후에는 인생을 좀 즐기면 좋으련만 스스로 굴레를 씌운 분이었다.

나는 홍매화의 여윈 나뭇가지에 기대어 서서 아버지를 떠올린다. 아버지가 남기신 향기가 내 안에 흐르듯 나의 향기는 내 아이들에게 어떻게 기억될까.

딸 박희주(대구 수성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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