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은은 조금 더 집중했다… 미진이 속삭인 말을 간신히 떠올렸다[소설, 한국을 말하다2]

  • 문화일보
  • 입력 2024-04-22 09:27
  • 업데이트 2024-04-22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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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일러스트=변영근 작가



■ (10) 강화길

중독 - 화원의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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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그날, 미진은 영은의 국사 교과서에 물을 쏟았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 사람을 피하다 균형을 잃었고, 그 바람에 손에 들고 있던 컵이 와락 엎어진 것이었으니까. 다행히도 물은 거의 다 책상에만 쏟아졌다. 교과서에는 대여섯 방울 정도만 튀었다. 설사 교과서가 다 젖었다고 해도 영은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국사 공부에 별 관심이 없었고, 무엇보다 미진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까. 하지만 미진은 영은에게 지나치게 미안해했다. 사과를 연속으로 다섯 번쯤 했고, 영은을 매점으로 데려가 과자와 우유를 사줬다. 그러면서 또 사과했다.

“영은아, 내가 미안해. 정말 미안해.”

이렇게까지 사과받을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영은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미진은 모든 사람을 그런 식으로 대했다. 눈치를 보고 기분을 살폈다. 영은은 미진의 그런 성격이 성가시다고 생각했고, 앞으로 두 사람이 가까워질 일은 없으리라 여겼다.

오늘 아침, 영은은 일어나자마자 미진의 문자를 받았다.

“영은아, 미안해. 내가 어제 말실수를 했지.”

한 시간 뒤, 미진의 문자가 또 도착했다. 정말 미안하다며, 마음이 풀리면 답장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영은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답장하지 않았다. 어제 두 사람은 지선의 집들이에 갔다. 지선은 영은의 대학 동기였는데, 몇 년 전부터 어쩌다 보니 미진까지 함께 어울리게 되었다. 하지만 영은은 지선을 미진만큼 가깝게 느끼지는 않았다. 지선은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으로 속내를 잘 내비치지 않는 편이었으니까. 그래서 지선에게 어떤 선물을 해야 할지 꽤 고민이 되었다. 그녀의 취향이 어떤지, 뭘 필요로 하는지 알지 못했으니까. 미진 역시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결국 영은은 자신이 좋아하는 루이보스 차 세트를 선물하기로 마음먹었다. 장미 향기가 은은하게 블렌딩 된 꽤나 고급스러운 차였다. 사실 영은의 형편에 이 차를 즐기는 건 상당히 사치스러운 일이었으나, 그녀는 이 취향을 고집스럽게 유지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우연히 마시게 된 차였고 무척 마음에 들었을 뿐이다. 온종일 일과 사람에 시달리고 집으로 돌아와 이 차를 마시면, 고요하고 향기로운 화원에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마음이 차분해졌다. 뭐랄까, 공허한 마음이 채워지는 것 같달까. 아니, 온전해지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좋은 선물이 될 것 같았다.

지선에게 차를 건네는데, 미진이 옆에서 불쑥 말했다.

“이거 정말 좋은 차야. 화원에 온 듯한 느낌이 들 거야.”

그때부터였다. 미진은 영은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영은은 미진의 속이 훤히 보였다. 미진은 영은의 말을 자신이 가로챘다고 생각한 것이다. 솔직히 영은은 아무렇지 않았다. 선물에 대해 누가 뭘 어떻게 설명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리고 설사 영은의 기분이 나빴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눈치 볼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미진은 눈치를 봤다. 신경을 썼다. 미진의 머릿속에는 오직 그런 생각뿐인 듯했다. 자신이 누군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까. 실수를 하지 않을까. 만일 잘못을 한다면, 어떻게 만회해야 할까. 특히 미진은 영은에 대해 특히나 예민하게 반응했다. 어린 시절, 책상에 물을 쏟았던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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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일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영은은 미진이 자신의 허물을 계속 들여다보고, 타인의 마음을 살피는 일에 중독되어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끝없이 배려하고, 사과하고 용서받는 삶이라니.

영은은 미진이 안쓰러웠고, 가능하면 다정하게 대하려 했다. 그러다 보니 오랜 시간 가깝게 지내게 되었고, 이제 영은의 가장 친한 친구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미진이었다.

어쩌면 그렇게 한결같을까.

지하철 출근길에서, 사람들의 피로한 얼굴을 마주한 채로, 영은은 친구의 마음을 헤아려보았다. 지선과 함께 있는 내내 나에게 신경 썼겠지. 곧장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겠지. 내가 별 내색을 하지 않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겠지. 그냥 넘어갈까, 잠시 그런 생각도 해봤겠지. 하지만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고, 밤새워 고민했겠지. 영은이에게 뭐라고 말할까. 어떻게 해야 영은의 기분을 풀어줄 수 있을까. 이런 일로 영은이와 멀어지고 싶지는 않은데. 영은이는 나의 유일한 친구인데, 그녀를 잃을 수는 없는데...... 그 순간, 지하철이 멈췄고, 영은은 깜짝 놀랐다. 도착역을 두 정거장이나 지나쳐 버렸던 것이다. 그녀는 정신없이 승강장 밖으로 뛰어나왔고, 반대 방향을 찾아 역 계단을 올랐다. 벌써 이게 몇 번째인가 싶었다. 언젠가부터 영은은 미진의 마음을 가늠하다가 지각을 하고, 할 일을 잊었다. 멍하니 앉아 있기도 했고, 약속을 잊어버리기도 했다. 미진이 자신을 생각하며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상상하다 보면, 영은은 어쩐지 그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대체 내가 왜 이러지? 한심한 짓거리를 저지른 것 같기도 했고, 지각 때문에 상사에게 한 소리 들을 생각을 하니 짜증도 났다. 영은은 미진에게 답장하려던 걸 관뒀다.

미진이 한숨을 쉬며 얼굴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영은은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하루가 조용히 지나갔다. 그녀의 지각을 나무라는 사람도 없었고, 별 다른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너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이상할 지경이었다. 미진에게는 연락이 없었다. 영은이 답할 때까지 기다린다고 했으니, 정말로 기다리고 있겠지. 얼마나 초조하고 답답할까. 누군가의 처분을 기다리기만 하는 하루라니. 그리고 그 처분을 내리는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영은이었다.

선배가 말을 걸어왔다.

“영은 씨, 졸리지 않아? 커피 마실래?”

“...... 커피요?”

“응, 내가 살게.”

그 순간 영은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는 재빨리 핸드폰을 확인했다. 얼마 전 가입한 쇼핑몰에서 온 할인 문자였다. 미진의 문자가 아니었다. 영은은 또다시 미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두려움이 가득 담긴 처량한 목소리. 영은아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네 답을 기다릴게. 물론 미진이 그런 문자를 보낸 건 처음이 아니었다. 다만, 미진은 영은에게 결정을 맡기고선, 속을 잔뜩 끓이다가, 참지 못하고 다시 문자를 보내거나 전화를 걸어왔다. 애처롭게 묻곤 했다. 영은아, 아직도 화났어? 그런데 이번에는 연락이 없었다.

“영은 씨, 커피 안 마셔?”

“네, 안 마실래요.”

영은은 무뚝뚝하게 대답하며 핸드폰만 쳐다봤다. 뭔가 이상했다. 그리고 계속 이상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퇴근 시간이 되고, 저녁 시간이 될 때까지 미진은 연락이 없었다.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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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영은은 집에 도착한 뒤에도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미진에게서 진작 전화가 왔어야 했다. 그러면 영은은 미진의 목소리를 들으며 루이보스 차를 우렸겠지. 차의 향과 함께 그 순간의 마음을 즐겼겠지. 온전해진 느낌. 공허함을 밀어내는 희열.

그날, 차를 사면서 영은은 미진에게 일부러 설명했다. 이걸 마시면 화원에 있는 기분이 든다고. 아마 너도 그런 기분이 들 거라고. 미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지선에게 선물을 건네면서 영은은 입을 열지 않았다.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슬쩍 미진을 살폈다. 그녀를 잘 알았으니까. 미진은 사람들 사이의 침묵을 잘 견디지 못했다. 무슨 말이든 해서 공백을 메우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미진이 할 수 있는 말이 뭐가 있었겠는가. 뻔한 안부? 어색한 인사치레? 아마 미진에게는 차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영은에게 들은 말이 있으니까. 그리고 미진은 영은의 이야기를 항상 잘 기억하니까.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 말이 튀어나왔을 것이다.

“화원에 온 듯한 느낌이 들 거야.”

그리고 화들짝 놀랐겠지. 그러나 그건 영은이 일부러 만들어 낸 틈새였고, 미진은 평소 습관대로 그곳에 발을 내디뎠을 뿐이다. 무엇을 위해서? 그래. 영은의 어떤 온전함을 위해서. 미진의 애처롭고 초조한 표정, 절박한 목소리. 그와 함께 어우러지는 장미 향.

드디어, 전화벨이 울렸다.

그럼 그렇지.

영은은 전화를 받았다. 지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신이 나 있었다.

“바쁘니? 미진이랑 나랑 같이 차 마시려고 만났는데, 너도 나올래?”

영은은 대답했다.

“아니, 괜찮아. 지금 좀 피곤하네.”

“그래?”

“응.”

그 순간, 미진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영은은 손으로 핸드폰을 꽉 쥐었다. 사실 떨고 있었다.

전화를 끊은 뒤, 영은은 차를 우렸다. 장미향이 나는 루이보스 차. 그녀는 집중해서 레시피대로 차를 우렸다. 두 티스푼 반. 100℃의 물. 250㎖, 그리고 6분의 기다림.

영은은 차를 천천히 한 모금 마셨고, 눈을 감았다. 조금 전 전화 너머 들려온 미진의 웃음소리를 떠올렸다. 영은은 조금 더 집중했다. 미진의 목소리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놓치지 않도록. 그리하여 영은은 미진이 웃음 끝에 속삭인 그 말을 간신히 떠올릴 수 있었다.

“미안해. 미안해, 지선아.”

왜?

그러나 무슨 의미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잠시나마 이 순간이 완벽해졌다는 것, 그것만이 중요했다. 영은은 계속 미진을 생각했다.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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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됐다는 사실 자체도 모르는 관계 무섭다고 생각해”

■ 작가의 말


“중독됐다는 사실 자체도 모르는 관계. 그래서 끊어낼 수 없는 관계가 무섭다고 생각했어요.” 강화길 작가가 우리 사회 속 수많은 ‘중독’ 가운데 주목한 것은 관계 속 중독이다. 소설은 영은과 미진이 인지하지 못한 가운데 서로에게 해악을 끼치고 있으면서도 이를 지속하는 모습을 그린다.

관계의 중심은 각자의 마음에 따라서 둘 사이를 오간다. 이 때문에 소설의 제목인 ‘화원의 주인’은 사실 존재하지 않고 오직 허망한 마음만이 일시적으로 채워지길 반복한다. “중독은 인간의 사악함을 상징하는 어휘일지도 모르겠다”는 작가는 자신에게 매달리는 미진의 목소리를 배경으로 루이보스 차를 우리고 그 향과 그 순간의 마음을 즐기는 영은을 통해 중독의 화원이 가진 섬뜩함과 위험을 보여준다.

■ 강화길작가는

1986년생. 2012년 단편소설 ‘방’으로 등단. 소설집 ‘괜찮은 사람’, 장편소설 ‘다른 사람’ 등을 썼다. 젊은작가상 대상, 백신애문학상, 구상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신재우 기자 shin2roo@munhwa.com
신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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