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받은 팬덤[오후여담]

  • 문화일보
  • 입력 2024-05-23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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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미 논설위원

2021년 일본 최고 권위의 아쿠타가와상을 받은 우사미 린의 ‘최애, 타오르다’는 팬덤을 본격적으로 다뤄 주목받은 작품이다. 주인공 아카리는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짐짝 취급받지만,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살아간다. ‘최애’인 아이돌 그룹 ‘마자마좌’의 멤버 우에노 마사키 덕질이다. 아르바이트해서 CD를 사고 콘서트에 가고 팬들과 이야기하는 게 삶이고 행복이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에노가 팬을 때렸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추락이 시작된다. 하지만 아카리는 이 사랑을 접을 수 없다. 실망한 팬들이 내버린 굿즈와 CD를 수십 장씩 사들인다. 콘서트 취소 표를 재구매하는 김호중 팬덤이 겹쳐 떠오른다.

광신자(fanatic)에서 파생한 ‘팬’이라는 단어는 1884년 한 행사 기획자가 스포츠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칭하기 위해 만들었지만, 역사는 더 거슬러 올라간다. 19세기 최고 베스트셀러 작가 찰스 디킨스는 신간을 내면 수천 명이 줄을 서 기다렸을 정도로 대단한 팬덤을 가졌다. 1926년 미국 과학소설(SF) 잡지 ‘어메이징 스토리’는 처음으로 팬 커뮤니티를 만들었고, 팬들의 힘이 커지면서 집단행동도 시작됐다. 1967년 NBC가 스타트렉을 두 시즌 만에 중단하려 하자 팬들은 11만5893통의 편지를 보내 상황을 바꿔놓았다. 영국 왕립협회 연구원 마이클 본드의 책 ‘팬덤의 시대’에 따르면 팬덤은 2000년대 들어 드디어 주류 일상이 되고, 인터넷·SNS로 정치 팬덤의 길이 본격적으로 열렸다.

‘21세기 새로운 부족’인 팬덤은 양날의 칼이다. 기존 관계가 해체되는 이 외로운 시대, 소속감을 주고 삶을 풍부하게 하며 선한 영향력을 미치기도 하지만, 김호중 방탄 팬덤처럼 나쁜 영향을 낳기도 한다. 광기 어린 팬덤은 맹목적 사랑을 화력 삼아 법과 윤리, 정의와 진실은 물론 인간성까지 훌쩍 뛰어넘는다.

팬덤을 등에 업고 마지막까지 콘서트를 강행하는 현실의 김호중과 달리 소설의 우에노는 결국 은퇴한다. 그리고 최애가 사라진 현실에서 아카리는 남루한 자신을 마주하며 아픈 성장의 걸음을 내디딘다. 사람들은 인생에서 한 번쯤 누군가의 팬이 된다. 팬덤이 맹신과 광신이 되어 나와 상대 그리고 딛고선 땅 전체를 태워 버리지 않기를, 삶을 풍요롭게 가꾸는 사랑이 되기를. 모든 팬덤의 안녕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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