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3·1절 99주년>‘나는 파리의 독립운동가’… 臨政 도왔던 韓人명단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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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입력 2018-02-28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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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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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뚜렷이 남은 국적 ‘Coreen’ 프랑스 한인 노동자와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인사들이 주축이 돼 결성된 재법한국민회가 1920년 3월 1일 쉬프에서 3·1운동 1주년 경축식을 열고 단체 사진을 찍고 있다. 오른쪽 작은 사진은 27일 공개된 프랑스 한인들의 이름과 직업 등 인적사항이 적힌 1920년 쉬프 시청의 외국인 명부. 출처:나기호 회고록 ‘비바람이 몰아쳐도’·연합뉴스


- 佛유학 이장규씨, 1920년 쉬프市廳 자료서 37명 첫 확인

일제 침략으로 나라 잃었지만
한국국적으로 체류허가 이례적

戰死者안치 등 궂은 일하면서도
1919년 재법한국민회 단체결성
십시일반 臨政 파리위원부 지원
3·1운동 이듬해 경축식 열기도


100년 전 프랑스에서 고된 일로 생계를 이어가면서도 ‘한국’ 국적으로 독립운동을 펼쳤던 한인들의 명단이 공개됐다.

프랑스 파리 7대학(디드로대학) 한국학 박사 과정에 재학 중인 독립운동사 연구자 이장규 씨는 프랑스의 소도시 쉬프에 거주하던 한인들의 명단을 프랑스 지방정부 자료에서 확인했다고 27일 밝혔다. 1920년 쉬프시청의 외국인 명부에는 박춘화·박단봉·차병식·배영호·박선우 등 한인 37명의 이름과 직업, 생년월일, 프랑스 도착 일자, 프랑스 정부에 체류증을 신청한 날짜 등이 담겼다. 당시 한국은 일제 침략 이후 소멸한 나라로, 외국의 한국인들은 일본이나 중국 국적자로 활동했다. 한국 국적으로 프랑스의 체류 허가를 받은 것은 이례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이는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의 활동 덕분인 것으로 전해진다.

조국을 일제에 빼앗기고 러시아 연해주와 북해, 영국을 거쳐 프랑스로 건너간 한인들은 제1차 세계대전 복구 사업에 참여했다. 주로 철도 복구, 시신과 유골 안치, 묘지 조성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 한인들은 그러면서도 1919년 11월 재법한국민회(在法韓國民會)라는 한인 단체를 결성했고 돈을 모아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의 활동을 지원했다.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파리위원부에 6개월간 6000프랑의 거액을 기부한 것으로 나타난다. 당시 프랑스의 한인 노동자를 50명으로 가정하면 한 명당 매월 평균 20프랑을 낸 셈으로, 당시 프랑스의 노동자 평균 임금을 고려하면 한 달 수입의 4분의 1을 파리위원부에 기증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주도로 1920년 3월 1일에는 3·1운동 1주년 경축식도 열렸다.

이들은 유럽 각지의 한인들을 쉬프로 초대했고 당시 신문 ‘신한민보’에 따르면 경축식에는 한인 노동자 35명과 학생 10여 명, 영국 런던에서 가족을 데리고 온 10여 명, 파리위원부 인사들이 모였다. 행사장 벽에는 한국과 프랑스 국기가 걸렸고, 참석자들은 애국가 합창과 ‘대한독립 만세’ 삼창 등을 하며 3·1운동 정신을 기렸다. 프랑스 마른도청 소장자료에서는 당시 쉬프의 이도순·백오난 부부가 자녀 ‘루이’와 ‘조르제트’를 출산했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애초 쉬프시청에는 한인 관련 자료가 다수 보관돼 있었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많은 자료가 소실됐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이날 공개된 한인 명부는 한인 노동자들의 실체가 100년 만에 프랑스 기록으로 확인된 사례로, 프랑스 최초의 한인 이주집단 연구에 중요한 사료로 평가된다.

박세희 기자 saysay@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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