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니신소바’가 준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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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입력 2023-01-27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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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우 영화배우

청어 한 조각 올린 음식 먹으러
아내와 딸 태우고 맛집 가는 길

뒷좌석 두 여인이 나누는 대화
서로 지적하거나 가르치지 않아

나만 옳다는 꼰대 소리 줄이고
올해는 다른 사람 말 경청 다짐


어릴 적엔 건강을 위해서 아니라 형편상 육고기보다는 아무래도 값이 싼 꽁치·고등어·갈치·이면수(임연수어) 같은 생선을 많이 먹은 것 같다. 그중 꽁치가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연탄불에 구울 때 온 동네를 덮을 듯 나는 냄새와 연기 때문이 아닐까. 그 기름진 냄새에 이웃들은 누구 집엔가 저녁상에 꽁치가 오르는구나 짐작하면서 침을 ‘꿀꺽’ 삼켰겠고, 동네 개들의 애절한 울음소리는 아직도 들리는 듯하다.

겨우 꽁치 서너 마리가 온 동네에 존재감을 드러냈던 걸 보면 아무래도 예전 꽁치가 요즘 꽁치보다 훨씬 더 기름졌던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중 덜 친한 생선은 청어였다. 어릴 적에 본 어느 만화의 주인공 아저씨가 생선 얘기를 하던 중 ‘꼬로록’ 소리 내며 듣는 아이들에게 ‘청어는 비싸서 못 먹는다’라고 하던 말풍선이 아직도 눈에 선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 탓에 나는 여태 청어는 비싼 생선으로 인식하고 있다.

며칠 전 딸아이가 가족 단톡방에 꾸둑꾸둑한 청어 한 조각을 올린 ‘니신소바’ 사진을 띄웠는데,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라 얼른 확대해 보니 일본 교토(京都)에 있는 유명한 맛집이었다. 지도를 검색해 교토 기온(祇園)역 사거리 근처라는 위치를 확인하면서 잠시 생각에 빠진다. ‘그래, 재벌 회장 정도라면 좋아하는 음식을 한 그릇 먹으러 비행기 탈 수도 있겠지, ㅎㅎ.’ 얼른 현실 파악을 하고 ‘니신소바’ 집을 검색해 보니 성수동에 소문난 집이 있다!

‘내일 점심은 성수동에서’ 마음 결의를 다지면서 아내에게 의향을 묻자 언제나처럼 밝게 웃으며 좋단다. 여세를 몰아 딸아이에게도 의사 타진을 하니 내일 점심은 몸매 관리상 먹어야 할 것이 이미 정해져 있다며 일언지하 거절한다. 내 안면 근육에는 없는 ‘비굴한 표정’까지 보이며 한 번 더 청했으나 요지부동. 삼세번? 한 번 더 얘기하고 싶었으나, 괜히 좋아진 기분 흐트러질 것 같아 거기까지만 하기로 한다. “12시쯤에 출발 하자구!”

다음 날 아침 눈뜨자마자 아내에게 확인하고는 책상 앞에 앉아 오늘부터 읽기로 작정한 책을 펴고 음악을 고르는데 2층에서 딸이 내려온다. “다은아, 오늘 점심 니신…” 별생각 없이 또 얘기할 뻔했으나, 얼른 자제하며 “오늘은 뭐 할 일 있어?”라고 돌려 물었다. ‘오늘은 할 일이 있냐?’고 물은 게 화근이었다. 2층에서부터 “안녕히 주무셨어요?” 하며 기분 좋게 소프트랜딩 하던 딸아이가 속도를 줄여 식탁 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하드랜딩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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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입 모양으로 아내에게 물으니, 요즘처럼 뭘 해야 할지 딸아이가 고민하고 있을 때는 그런 질문도 삼가야 한다고 귀띔한다. 어이쿠! 사람의 감정에 대한 배려는 제법 통달했다고 평소에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니구나! 어떡하지?’ 하는 내 표정을 보며 아내는 그냥 내버려 두라고 한다, 조금 있으면 절로 나아진다고. 정말 그랬다. 참 신기한 일이다. 딸 아이는 12시 정각에 잘 차려입고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얼굴로 사뿐하게 내려오며 성수동에 같이 가잔다. 그 모습을 보니 ‘우리 딸이 이젠 자기 기분을 컨트롤 할 줄 아는 어른이 되었구나’ 하는 대견한 생각과 행복이라는 감정이 오래전 그 꽁치 굽던 연기처럼 온 집 안에 퍼졌다.

‘아하! 엄마가 개입했군’ 미소를 지으며 아내를 본다. 나에겐 세상 가장 귀한 ‘두 여인’ 기분 좋게 수다 좀 떨라고 뒷자리로 모시곤 기사 노릇을 자청한다. “면이 툭툭 끊어지는 게 나는 싫더라.” 오늘 먹을 점심에 대해 딸이 말을 꺼내자 아내가 얼른 말을 이어받는다. “나는 국물에 시치미(七味·양념 가루) 뿌리지 않는 게 더 좋아.” “메밀국수에 온천 달걀하고 유부초밥 곁들이면 좋을 것 같아.” 딸아이가 기분 좋게 이어받자 “근데, 유부초밥에 깨 뿌리면 안 돼. 아빠 내일 위내시경 하니까.” 그 짬에 내 걱정까지? 간이 잘 밴 청어 한 토막이 곱게 올라간 메밀국수를 상상하며 듣다가 행복한 대화를 하는 묘수를 깨닫게 되었다.

아내와 딸은 “아냐 아냐, 그건 아니지” 하며 상대방의 말을 부정하거나 “그건 틀렸어” 하며 가르치려는 말은 없었다. 그저 자기의 생각만을 기분 좋게 말할 뿐. 문득 자녀들과 오랜만에 분위기 좋은 대화 이어짐에 고무된 나머지, “내 말 들어봐” 자녀들의 말을 끊으며 짐짓 윤리교사 같은 표정으로 몇 마디 거들다가 ‘갑분싸’해졌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저 마음씨 좋은 옆집 아저씨처럼 미소를 지으며 ‘아 그랬구나’ 추임새만 넣었어야 했다.

성수동 가는 길 ‘아, 그건 아니지’ 하며 끝없이 이어지는 ‘두 여인’의 대화에 끼어들고 싶은 순간이 몇 번 있었으나, 과묵한 택시 기사처럼 말없이 운전에만 전념하며 ‘올해는 내 생각만 옳다는 꼰대 같은 소리 줄이고 가족들의 말을 경청하리라’ 입술을 힘주어 오므리며 새해 결심을 다짐하는 사이 ‘그 집’에 도착했다. 명성에 비해 대기 줄이 길지 않아 가게 한쪽에 금방 비집고 앉을 수 있었고, 메뉴판을 건네받기도 전에 그 음식을 주문하려는데 ‘니신소바’는 다음 달부터 시작한다며 종업원이 나보다 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토록 그렸던 청어 한 토막을 지우며 메뉴판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새 아쉬움은 행복한 기대감으로 바뀌었다. 보름 뒤 딸이 한번 더 성수동에 동행해 주리라는 믿음이 생겼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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