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귀거래(歸去來)

  • 문화일보
  • 입력 2023-02-10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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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前 이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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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본당’이란 당호 만들어
20년째 새로운 성과 강의

책 틈새마다 꽂힌 명함 보니
지난날이 파노라마처럼…

난 이상적인 학자의 길 걸어
나에게는 죽음만이 ‘귀거래’


대학교수 퇴임에 즈음해 2004년 이래 20년째 수요일마다 무본당(務本堂)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그 준비가 늘 만만찮은 까닭은, 매주 새로운 성과를 발표하는 성격의 강의라 다뤄야 할 작품이 많아서다. 매주 새로운 성과를 강의한다는 것은 매일 학문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다. 세계의 작품들을 분석하다 보니, 주로 세계 미술 전집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모니터 2대를 넓은 책상 위에 두고, 한 대에는 작품 사진을 올려놓고 다른 한 대에는 곁의 모니터를 보면서 자판을 두드리며 오로지 작품만 보고 논문과 책을 쓴다. 일반 논문과 달리 내 논문은 참고 문헌이 거의 없다. 문헌에 오류가 많음을 안 이후로 작품 자체에서 정답을 찾으려 했고, 그런 만큼 작품이 가장 위대한 스승이 된 지 오래다. 그러면서 평생 독학으로 미술사학의 새로운 개념을 개척하고 있다.

일찍이 ‘무본 본립이도생’(務本 本立而道生·근본에 힘써 근본이 서면 방법은 저절로 생긴다)이란 공자의 말에서 ‘무본당’이란 당호(堂號)를 끌어 만들고 그 말대로 실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책더미를 오랜만에 둘러보다가 책들 틈새마다 꽂힌 명함 철을 헤아려 보니 모두 열 권 남짓 된다.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맞아 한 권씩 펼쳐 본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지난날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유학이나 전시 관련 일로 해외에 나가는 기회가 많아 국내는 물론 일본, 미국, 독일, 프랑스, 영국 등의 큐레이터들로부터 받은 명함이 많다. 오랜만에 국내외 친구들의 명함을 보니 지난 일들이 눈에 선하다. 이제 만난 지 오래되어 연락이 끊긴 채라 전화해 봐도 통화가 되지 않는다. 이미 타계한 분도 있고, 대학이나 박물관에서 퇴임한 분이 대부분이다. 특히 전공 관계로 함께 지낸 국내 또래의 교수들이나 선후배들도 퇴임한 지 오래여서 생사를 모른다. 퇴임하자마자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으니 자연히 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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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갤러리에서 일하기만 하면 모두 큐레이터(curator)라 부른다. 하지만 원래는 박물관에서 어떤 분야의 전공자로 뛰어난 전시 기획력을 갖춘 사람을 서양에서는 큐레이터라 했으며, 대학교수 이상으로 문화적·사회적 위상이 높다. 박물관에 특정 분야의 권위자인 큐레이터가 있으면 중요한 주제로 훌륭한 전시를 기획하는 경우가 있어 그런 기획전시로 박물관은 평가를 받고 국제적 위상을 갖춘다. 중요한 전시는 준비 기간이 6∼7년이란 긴 시간이 걸린다. 전시를 어떻게 기획해야 하는지도 큐레이터의 몫이며, 도록에 실릴 논문은 물론 반드시 기획자가 써야 한다. 그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미술사학의 중요한 문제가 풀리기도 하여, 동시에 큐레이터는 학문적 역량이 몇 단계 올라가게 된다. 나는 그런 전시를 국내외에서 끊임없이 기획해 왔으며, 동서양의 크고 작은 박물관 큐레이터들과 교류가 잦았다. 국내에서는 큐레이터를 학예관(學藝官)이라 불렀다.

나는 국립박물관의 큐레이터로, 그리고 또 한 번 대학교수로 퇴임했다. 가장 이상적인 학자의 길이 아닐까. 퇴임을 은퇴라고도 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났으므로 누구에게나 죽음이 다가오듯이, 살면서 반드시 맞게 되는 게 퇴임이다. 공무원이나 교수는 나이가 차면 정년퇴임을 한다. 두 번째 퇴임 즈음 무본당을 열어 매일 연구하여 강의하며, 세계 여러 나라를 누비며 답사하고, 학술 발표와 강의도 하고 강연에 초청되기도 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요즘 간혹 “무슨 일을 하나요” 하고 물어 오면 당황해 갑자기 말문이 막힌다.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짧게 설명하면 그 까닭을 알 것이다.

“건축-조각-회화-도자기-금속기-복식 등 인류가 창조한 전 세계 모든 나라의 조형예술을 심층적으로 연구하여 보니 그중 문양(文樣)이 90%나 차지한다. 그런데 뜻밖에도 모두가 문양을 지나치며 올바른 연구자가 없어서 충격적이었다. 나는 문양의 전개와 원리를 세계 최초로 밝히며 ‘문자언어’에 상대되는 ‘조형언어’를 기적적으로 찾아냈다. 그에 따라 공간적으로 즉 세계 미술을 씨줄로 삼고, 시간적으로 즉 구석기 이래 지금까지의 미술을 날줄로 삼아 촘촘히 옷감을 짜나가는 동안 ‘전공’을 넘고 ‘한국미술사’를 넘어 ‘동양미술사’를 넘고, 다시 ‘서양미술사’를 넘고 마침내 ‘세계미술사’도 넘어 전인미답의 ‘인류미술사’라는 거대한 카펫을 정교하게 짜는 중이다. 학문과 예술은 세분화하여 쇠락의 길을 걷는 세계적 추세에 저항하며 융합적 사고로 융합적 문화사를 개척하여 모든 분야에 영향을 주는 문화혁명이 일어나고 있어서 ‘세계의 르네상스’를 꿈꾸고 있다. 아무도 경험해 보지 못한, 우리가 알던 세계와는 다른 ‘침묵의 언어’를 쓰는 ‘영화(靈化)세계’를 창조해 나가고 있다. 즉,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세계다.”

요즘엔 ‘조형분석학회’를 창립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학회지도 세상에 내놓을 것이다. 세계 모든 나라가 공유하는 상식에 얼마나 많은 그릇된 지식이 있는지 알게 되면서 암흑에 숨어 있는 악마를 퇴치하려는 불퇴전(不退轉)을 비장하게 결심하게 되었다.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는 요즘 말로 퇴임이나 은퇴 후의 행복을 노래한 것이다. 나는 고향이 서울이니 도심 속의 은둔자인지라 이미 귀거래를 누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죽음만이 ‘귀거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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